눈만 뜨면 밭에 나가고 피곤하면 어디서나 드러 눕는 늙은 농부와 아내 ⓒ장정숙

한 집에서 6대를 이어온 ‘변산 사랑방’ 주인

발로 캐낸 부안 주류성

송기옥이 누구인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번득이는 눈동자를 보면 별 것 별 것 다 할만한 재주를 지닌 듯한데 이런 사람이 한집에서 200여년 6대를 살았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고 더구나 농사가 본업이오, 부안 향토사를 연구한다거나 여기 저기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라니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더구나 지난 6년 동안 월 수당 25만원 받고 상서면 신성리 이장을 한 풀뿌리 공직자다.

할아버지 약방 집터에 ‘변산 사랑방’차려

-변산 사랑방’이라, 옥호 하나 근사하네요. 초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김용택은 수십 년 동안을 섬진강 상류에 있는 자기 집과 학교를 주제로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바람에 섬진강을 통째 잡수셨다는데 송선생은 아예 변산을 사랑방으로 삼으셨으니 흐뭇하시겠습니다.
“옛날 수 백 년 동안 변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두 갈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내소사 쪽으로 해서 대소골을 거쳐 변산 안으로 들어가 북재를 넘어 지서리로 빠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도화동에서 우슬재를 넘어 실상사-월명암을 거쳐 지서리로 빠지는 길이지요. 이 가운데 구비 구비 봉래 구곡을 따라 가는 길이 사시사철 절경이었다고 합니다. 문헌상으로 변산이 알려진 것은 중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규보의 ‘남행일기’ 그리고 부설거사의 행적을 다룬 ‘부설전’인데 부사의방장의 모습이나 월명암의 전설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 분들이 어디로 해서 변산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어요. 150~200년 전 문헌에는 거의 도화동 코스예요. 우리 어려서는 흔히 ‘동아실’이라고 불렀지요. 내가 나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나셨다는 신성리’는 바로 동아실 옆이지요.”
하서 면사무소가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린데 행정구역으로는 상서면 통정리로 되어있다.
-선대는 대대로 농사를 지었습니까
“증조부께서는 송 부자’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전장을 가지고 계셨대요. 한편으로 의원을 열었고. 할아버지께서는 가업을 이어 한약방을 했다고 합니다. 그땐 이런 시골은 물론 서울에도 양약이다 양약방 병원이 없던 때 아닙니까. 지금 말로 한약방이지 그때 100 여년 전이야 약방 열기만 하면 화태 편작 대접을 받았데요.
-어떻게요?
“이 쪽이 갑오농민전쟁의 싸움터여서 동학군 쪽이든 관군 쪽이든 간에 반 주검이 되어 실려 오고 업혀 왔다 합니다. 전쟁은 2년으로 끝났지만 그 뒤 몇 년 동안을 잡아 다 곤장을 쳐댔대요. 지금부터 120여 년 전 이지요. 그 때 뭐 별 약이 있었겠어요. 요새 식으로 말하면 ‘아무개 약방’하는 ‘브랜드’가 환자를 안심시키고 믿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부 영원 운학동의 나씨 일가가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은 그때로서는 전라우도 장성 갈재 위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약방을 한 것이 갑오 전쟁으로 호황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처마 위로 솟은 호랑가시나무, 40년 전 심은 나무란다

애향운동 사무국장이 주류성 찾기에 정신없어

신라와 당나라, 백제와 일본, 이 동아시아 네 개 나라가 국제전쟁을 일으킨 끝에 마침내 백제는 멸망한다. 전쟁은 끝났으나 마지막 항전이 남아 있었다. 부흥군을 돕기 위해 원정 온 일본군은 마침내 ‘백강 주류성’에서 패퇴하고 만다. 이 주류성이 어디인가. 학자들은 여러 고증을 내세워 금강 하류의 충남 비인으로 보기도 하고 동진강 하류의 습지대와 두포천과 연결된 습지 변산 우금암의 산성으로 비정했다. 어디로 비정하든 학자가 입수할 수 있는 문헌은 주로 일본 쪽에서 쓴 ‘일본서기’(日本書紀)였다. 이 전쟁에서 이긴 신라는 패전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깡그리 말살했다. 심지어 자기 나라 승전의 역사마저 전설적인 영웅의 기록뿐 전쟁의 경과를 제대로 기록한 것이 없다. 백강과 주류성을 어디로 비정하든 그 근거는 어쩔 수 없이 ‘일본서기’에 의존하는 것은 이러한 사료의 한계 때문이었다. 어떻든 비정의 논리적 근거는 거의 문맥 해석에 치중 되었다. 이와는 달리 전주 박물관장이던 전영래(全榮來)는 일본군의 퇴로 일정을 꼼꼼하게 계산하여 동진강 하구설을 뒷받침했다. 쟁쟁한 역사학자들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송기옥(宋基玉)은 비인의 지형지세를 자세히 관찰하고 실측하여 그쪽 학자들과 함께 비인의 한산성이 백제 때 성이 아니라 고려 때 성임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고려 때 성임이 밝혀진 이상 논란의 여지는 없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논거는 금방 뒤집어졌다. 학회의 연구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도와주는 독지가도 없었다. 카매라와 발품의 합작이었다.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20여 년 전, 그러니까 1993년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가 원광대학의 김삼룡 총장이었어요. 부안 본부장이 강성채 씨였고 거기에다 개암사 주지가 효산 스님인데 제가 그 무렵 부안 사무국장 일을 보면서 아주 가깝게 모시면서 향토사 연구에 나섰지요. 향토사는 향토에 사는 사람들의 향토애랄까 이런 것이 토양이 되고 끌텅이 되어야 하거든요.
거기에다 어려서 할아버지나 아버님으로 부터 개암사 ‘매암골’ 이야기를 들어왔어요. 지금 개암사 건너편에 ‘매암’이라는 중이 있었다는데 성을 쌓고 궁궐 같은 곳에서 왕처럼 행세했다는 그런 말씀이었어요.“
송기옥의 말이다. 웬만큼 연구가 진행되자 그는 격주간인 지역신문 ‘부안저널’에 20회에 걸쳐 주류성을 비롯한 향토의 사적과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실었다고 한다.
그의 안목과 열정은 이어진다.
“백강 주류성은 부안의 일등 관광 상품입니다. 서쪽으로 14억의 중국 사람에게 손짓하고 1억의 일본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이만큼 좋은 문화유산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는 문화가 되고 돈이 되는 거지요.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은. 그 전쟁에 이긴 자에게나 진 자 에게 말입니다. 그리스나 로마 문화, 중국의 당나라나 송나라의 문화가 어찌 그 사람들만의 문화에 그치겠습니까, 동방의 문화, 세계의 문화지.”
    
홀딱 벗은 자유 언론인

직격 인터뷰에 당황하는 자유언론인 송기옥

70 나이인데 허리가 꼿꼿하다. 자전거로 좁은 길을 달리는데도 비틀거리지 않는다. 훤한 이마며 하얀 얼굴이 신선 아니면 한량이다.
-어디 그 얼굴 가지고 농사 짓는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허 허! 누구 보라고 농사 짓습니까”
그러고 보니 팔뚝과 장딴지가 진짜 농군이다.
-농사는 얼마나 짓습니까?
“선친께서 남겨주신 논이 만여 평 됐어요. 지금은 논 7,000평, 6필지에 밭이 한 1,000평 되는데 힘 들어서 내어주고 지금 버는 건 집에 붙은 텃밭 500평이지요. 파 마늘 양파 고추 같은 걸 계속 심어요.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게 편하니까.”
-수익은?
“한 2,000만원 되나…… 아이들 다 나가서 살고 우리 내외 건강하니까 별 의료비 들지 않고. 특별히 절제한다기 보다 촌살림 오래 하다 보니 돈은 그저 안 쓰는 걸로 알아 왔지요. 경조비도 그 대상이나 액수도 크게 줄이고. 어쩌다 고기나 생선은 읍내 시장 가서 사오지만 과일이나 곡식은 전부 자급자족 해요.”
달변인데다 성량이 커서 왕년에는 마이크 잡고 어떤 정치인 찬조 유세도 하고 새만금 반대운동을 하다가 기왕에 막을 바에야 빨리 막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위로 누님 네 분을 나신 다음 아들을 낳으셨다. 어찌나 기뻤는지 호적에 일찍 올렸더니 어려서 갔다.
“그래 저는 2년 뒤에야 호적에 올렸대요. 오뉴월 하룻볕이 어디라는데 늦게 학교 들어가니 대장 노릇 하는 거지요. 여덟 살과 열 살이니.”
지방신문 지역신문 할 것 없이 거침없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끝엔 성역이 없다. 김성수 일가의 행적이며 노벨 문학상후보 어떻고 떠돌던 유명 시인의 괴벽이며 심지어 아무도 못 본체 하는 교회의 부패에 이르기 까지 종횡무진 한다. 옆에서 보기에 아슬아슬하여 더러 그래도 괜찮냐며 걱정하는 소리가 나와도 혼자 가는 코끼리처럼 대범하다. 말이 언론인이지 돈을 뽀치며(바치며) 권력에 아부하며 시류에 편승하는 그런 ‘월급 받는 언론인’ 같은 일부 어줍잖은 언론인과는 다른 언론인을 부안에서 본다. 너설너설한 가면을 훌렁 벗어던진 부끄러울 것 없는 홀딱 벗은 성자의 모습이랄까, 부안에 서 그런 사람을 본다.

송기옥 수필집 ‘면산 사랑방’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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