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 있어야 마을이 형성된다. 큰 부자 집 빼놓고는 우물을 울안에 두기는 쉽지 않았다. 기계를 이용해서 우물을 파는 전문가가 나오기 전만해도 마을 사람들은 울력으로 우물을 팠다. 땅 밑을 파고 들어가다가 샘구멍이 발견되면 거기서부터 돌을 둘러쌓아 올린다.
조선 초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현 편에서 부안읍성을 살펴보니 읍성 안에는 1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읍성을 확대하면서 우물은 16개로 늘어났다. 80년대만 해도 부안 시내를 걷다보면 우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많던 성 안의 우물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성황산 밑의 성황마을에 외롭게 남아 있다. 성황산은 암반이 드러난 곳이 많고 곳곳의 돌 틈에서는 물이 난다. 군청 뒤에는 주림(珠林) 옥천(玉泉)이 있는데, 주민들의 얘기는 6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에서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림 공원 쪽으로 오르면 혜천(惠泉)에 닿는다. 이곳에는 20여 수의 금석문이 바위에 새겨졌는데, 고을의 현감과 지역 인사들이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지은 시를 암반에 새겨 놓은 것이다. 내용은 서림공원의 풍광과 혜천이라는 샘에 대해 읊은 시이다. 그 중에 시 한편을 보면,

상소산 맑은 정기 솟구치는 작은 정자가에
한 움큼 은혜로운 샘물 바위 틈새 시원하네
선녀들이 내려와서 다투어 길어다가
깊은 밤 단약 만드느라 다 밭아질까 두렵네
                                        -신경환
혜천의 물맛은 뛰어나고 약효도 있어서 시원한 이 물을 하늘의 선녀들이 다투어 길어갈 정도라고 시인은 노래했다.
우물과 관련된 속담이 많다. 완전무결한 것은 없으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고 참아야 한다면, ‘우물 좋고 정자 좋고 다 좋은 집이 있나.’라고 한다. 융통성이 없으면, ‘우물 옆에서 목말라 죽는다.’고 했다. 자신이 살기위해 남을 대신 끌어들여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를, ‘우물귀신 잡아넣듯 한다.’고 했다. 우물에 빗댄 속담이 많은 것을 보면, 생활 하는데 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물가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 목마른 길손이 물을 요구하면 바가지에 버들 잎 한두 개를 띄워주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동네 아낙네들은 우물에서 하루 두 번씩은 만나 떠들썩하게 말 꽃을 피울 때가 있다. 아침밥 짓기 전과 저녁 끼니 준비하기 전이다. 이곳에서 나물도 씻고 빨래도 하고 동네의 색다른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우물가에 핀 얘기꽃은 각자 물동이를 인 채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우물가를 맴돈다. 마을마다 물맛이 달라서 자기 동네의 물맛이 으뜸이라는 자부심도 컸다. 부안시내에서 우물을 파면 대개는 건건한 맛의 짠물이 나왔다. 전에는 이곳으로 바닷물이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성황마을의 우물은 석천(石泉, 굴샘)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무거운 쇠로 덮여 있다. 사용도 하지 않고 나뭇잎 등 오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열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자연석으로 촘촘히 쌓아올린 돌들이 꾀복장구 친구 만나듯 반갑다. 이 우물이 동네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정월에는 샘굿도 치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우물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했으며, 동구의 당산나무보다 더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했을 것이다.
성황마을 우물 주변에는 작은골목이 지금도 살아 있다. 우물에서 조금 올라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황계제이다. 이 중턱 길을 통해 동진면이나 계화도로 걸어 갈 수 있다. 골목과 우물을 지나 산 중턱에 난 이 길을 걸어봄 즉 한데, 유채꽃이 노랗게 필 때쯤이면 길은 실핏줄처럼 생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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