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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 사람 19> 이주성(李柱聖) 선생

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임업행정 37년

연좌제의 위협 속에 세계적 석학 키워내

풍상에 그 건장한 몸이 부서진 이주성 선생의 모습 ⓒ장정숙

대추 한알
부안군청 현관을 들어서는 큰 유리창에 빨간 대추 한 알이 그려진 일루미네이션이 시선을 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시인 장석주의 이 시를 보며 슬쩍 이주성(李柱聖 85세. 1934~ ) 생각이 났다. 부안 동진면 장등리가 본적지요, 출생지다. 전주 이씨, 여러 대가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산 부안 토박이다. 1958년 학교를 나오자 바로 들어간 곳이 임업 임시직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말기에 공직에 들어간 그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때 정년퇴임했다.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 전남도청 산림과 나주 사방 관리소였다.
퇴직한지도 25년, 퇴임 얼마 전 위암 수술을 받은 데다 퇴임 2년 뒤쯤부터 입이 비뚤어지고 눈이 감기는 ‘구안와사’로 시달렸다. 170센티가 훨씬 넘어 보이는 키에 아직도 80㎏ 가까운 체중, 기억이 또릿하고 패기가 만만하다. 수원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문병을 갔다가 즉석에서 몇 마디 물었다. 부인은 동진 내기리(원 상리) 태생인 부안 김씨 김영애 여사. 갑작스런 우리 내외의 방문에 주인은 어리둥절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 메시지도 회답이 없어 혹 이 친구 요양원이나 병원에 들어 갔나 해서 예고 없이 왔어. 괜찮은데.
“괜찮아, 자네도 괜찮고만. 허리도 빳빳하고.”
-창자 속이 어떤지는 진찰을 받은 지 오래라 모르겠고 귀에 보청기를 끼었고 눈도 전과는 달라. 그저 끄적거리는 재주는 살아있는 듯해서 죽기 전에 무언가 남을 위해 떳떳하게 사는 부안 사람, 말하자면 자네처럼 사는 사람을 만나고 있어. 비실비실 죽는 소리로 징징대거나 왕년에 어떻고 하며 제 자랑하느라 기고만장하는 그런 사람 말고 말이네. 그런 줄 알고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내 몇 마디 물어 볼게. (이주성과 나는 부안농고 1회 동기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갈수록 믿음직한 친구 사이다)

임업연수원장 때

난데없는 벼락 - ‘지리산 인간 송충이’
-37년을 임업직 한자리에 있었다니 대단해. 그것도 말단 임시부터 부이사관, 이사관까지 직업공무원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니 축하 할 만하지. 어데서 그런 복이 나왔을까.
“말도 마소. 산전수전 다 겪었어. 용케 살아남았지. 모가지가 날아갈 뻔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어.”
- 어떻게 임업직으로 가게 됐지?
“명색이 농고에다 농대를 나왔지만 어데 발 붙일 데가 없어. 아무 시험도 없어. 도청이고 군청이고 간에 그저 ‘알음알음으로’ 임시로 자리 비면 들어갈 정도고. 마침 농림부에서 ‘농림기술 요원’을 뽑는다기에 시험 봐서 됐어. 그래 발령 난 곳이 전라남도 산림과 나주 사방관리소였어. 총각 때니까 바로 내려가서 자취했어. 자네 알다시피 그때는 갈 데가 없었어. 군대 밖에는…… 다들 좋아라 하고 나도 아주 우쭐했어. 시험 봐서 취직 했으니까.”
나주 사방 관리소부터 목포관리소를 거쳐 구례군청 산림행정의 책임을 맡을 때 벼락이 떨어졌다. 지리산 천은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내는 공사를 하기 위해 공병대가 측량을 하기 위해 벌목작업을 했다. 허가는 구례군청 소관인데 허가량 보다 많은 나무를 베어 팔아먹은 사건이 이른바 ‘지리산 도벌 사건’이다. 당초 이 사건은 군부대를 통해 청와대에 직보되었다. 광주 지검과 전남도경의 합동조사가 40일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이주성 계장을 비롯한 8명의 직원 가운데 5명이 직무 위기로 면직되었다. 군수는 현지 감독의 책임이 없다 해서 당초부터 수사 대상이 되지 않았다. 주범은 산림계장으로 몰려 있었다. 심지어 어떤 신문은 ‘인간 송충 산림계장’이라고 타이틀을 붙였다. 
“나는 지금도 기억해요. 허가 한 것이 984입방이었어. 우리는 정확하게 측량지점만 벌목하도록 허가했고 입회했었어. 반출도 마찬가지로 법대로 했고. 어쩌다 호랑이 아가리까지 들어갔다 나온 셈이지. 그때 부하들이 참 안타까워.”       
그 무렵 친형(이주천)은 ‘인간 송충이’기사를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사람을 동생에게 보내 “동생이 죄 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 자리가 그런 자리니 차라리 사표를 내라”고 권했다고 한다. 열 살이나 위인 형님은 고향 동진면장이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죄가 없는데 웬 사표냐는 그런 의연한 자세였다. 이주성의 숙부(이남영)는 일찍이 보통문관시험에 붙어 해방 전후 부안군 산림 행정의 책임자였다. 박정권 초기 야당 간부이던 그는 경찰에 구타당해 앞을 못 보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말년까지 부안에서 ‘선명 야당’ 지조를 지킨 사람이다. 

공직 퇴임, 가운데 이원장. 오른쪽이 부인 김여사

피 묻은 둘째 놈 속옷
이주성은 주민등록을 열 두 번이나 옮겼다. 그만큼 이 지방 저 지방으로 근무지 따라 옮겼다는 말이다. 고향에 몇 천 평의 논밭이 있지만 일찍 서울로 올라와 셋방살이라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두 살 터울인 석근(石根)이와 근(根)이 형제는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공부도  잘 했다. 서울 변두리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두 형제는 과외 한번 안하고서도 형은 연세대 경영학과, 동생은 서울대 경제학과로 쑥쑥 뻗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천둥인가. 1981년 안동영림서장으로 있을 때, 전두환 정권 초기, 5.18 학살의 분노는 관악의 서울대학에서 마저 터졌다. 안동 관내 기관장 회의가 안동시장 방에서 열렸다.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자녀를 둔 공직자는 가차 없이 면직될 것이라는 엄포를 놓는 회의였다. 경찰서장은 바로 얼마 전 춘천지방의 한 고위 공직자가 이른바 ‘자식 잘못 둔 죄’로 목이 달아났다고 겁난 소리를 했다.
이주성 영림서장이 자기 방에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무계장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서울 집에 무슨 일이 있는 듯하니 바로 전화 해 보세요.”    
아내는 더듬거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겁에 질린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바로 조금 전에 낯설은 사람 두 사람이 근이(둘째 아들) 방과 책장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 한 보따리 들고 갔다. 친구들이 집에 와서 하는 말이 근이가 어디론가 잡혀 같다는 것이었다. 이주성은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 우선 대학에 들려 전후사를 들었다. 일이 묘하게 꼬였다면서 경제학과 지도교수(정운찬. 뒤에 서울대 총장)와 아버지가 서약서 쓰고 보증하면 며칠 사이 풀리지 않겠느냐 해서 우선 자식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급했다.
며칠 뒤 수사기관에서 연락을 받고 자식을 넘겨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말이 없었다. 자식의 몰골을 보자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끌려 갈 때 입었다는 얼룩무니 교련복과 겨울 내의는 찢기고 피에 물들였고 양쪽 무릎이 깨어진 것은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눈앞에서 혈육을 통해 보았다. 겨우 사지에서 빠져 나왔을 뿐 자식의 진로나 애비의 신상에 어떤 변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떨었다. 드디어 임업시험장 진해지장장이라는 발령! 초임 서기관이나 가는 자리, 해군통제부의 산림참모 같은 그러 자리로 좌천 되었다. 연좌제, 참자!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는가, 애비가 왜 좌천되어야 하는가, 그런 건 한가한 이야기였다. 서울대학 학생이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을 천행으로 여겼다. 영전이면 어떻고 좌천이면 어떤가. 이런 자세였다.  임업연수원장, 동부 영림 서장, 국립종자원장을 거처 식품연구원 감사를 끝으로 한 37년의 공직 생활 가운데 그가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우수 공무원 표창인가, 홍조 근조 훈장인가.

홍조보국훈장

“어이, 진배. 이런 세상 저런 세상 겪었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책이 맡겨지든 떳떳하고 공직자는 당당해야 한다, 이런 신조로 살았어. 아이들이 저희들대로 잘 배우고 잘 큰 것이 대견스럽고.”
큰 아들 석근은 금융감독원 부원장과 신한은행 상임감사를 거친 금융인이고 작은 아들 근은 서울대학 경제학교수로 명망이 높다. 제1회 서울대 학술연구상(2008), 슘페터 상(2014)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에 앞서 이 근 박사는 6대산업의 경제추격현상 논문을 SSCI학술지에 실어 세계적으로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 때 언론매체들은 ‘당신들이 한국의 미래’라며 파격적으로 국가가 지원하는 15명의 학자들을 칭송했다.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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