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나부터 혁신해야

밀려다니면서 발탁된 교직 40년 

나부터 혁신해야한다는 신조로 공직 40년을 살아온 김성화 관장. ⓒ장정숙

오늘의 교육은 그 범위가 어찌나 넓어졌는지 유아단계부터 70~80 까지 말 그대로 평생교육이다. 문화는 교육보다 뻗치는 치맛자락이 훨씬 넓다. 오락 취미 교양 지식 건강,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다. 한 두 마디 말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모르는 것은 쥐어주어도 모른다. 관장이 건네주는 안내 책자나 설명으로는 딱 이곳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방 저 방을 슬쩍 슬쩍 기웃거리고 나서야 머리에 들어왔다. 내가 보기로는 초중등학교 아이들 학교 방과 후에 저 하고 싶은 대로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그런 곳 같았다. 또 어렸을 때 학교를 다녔든 못 다녔든 뭔가 공부에 한이 맺혔거나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은 성인이나 노인들에게 공부도 하고 취미를 살리기도 하고 건강을 위한 활동도 하는 그런 곳으로 보였다. 도내에 몇 개 밖에 없는 교육문화회관이 군청에서 200여 미터 동남쪽, 예전에 동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은 2010년 3월이다. 김제 출신 최규호 교육감과 이 지역 국회의원 김춘진 의원이 이 시설의 부안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군부로서는 첫 번째다. 건설비는 국비 56억. 3층의 본관과 430평의 체육시설이 있다. 
김성화 관장(1958-  )은 상서 감교리 생으로, 이 시설의 개관 얼마 뒤  2017년 7월 1일자로 관장으로 부임했다. 정년을 2년 남짓 앞두고. 

교육문화회관 전경

 관청 냄새 나지 않는 관장실
언뜻 보기에 안내실 같은 곳, 관청 냄새를 웬만큼 뺀 이 집 책임자를 만났다. 공교롭게 스승의 날 며칠 전이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감회가 특별하시겠습니다.
“글쎄요, 뭐 특별하겠어요? 무슨 날을 정한다고 특별하겠습니까. 설날이다 추석날이다 하면 누구나 즐거운 날로 치지요. 8.15나 3.1절도 그렇고. 하지만 어버이날이다, 어린이 날이다 하면 아까 그런 날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교직에 40년이나 계셨다는데.
“어찌어찌하다 올해 12월 1일로 만 40년이 됩니다. 하지만 처음 1-2년 초등학교 선생을 했고 나머지 전부를 교육 행정 일을 보았습니다. 정년이 내년 말이니까 올 년말 이면 공로연수로 들어가게 돼 있지요.”
-특별히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습니까?
“그저 월급 받는 곳이면 어디든지 비벼대는데 저 같은 사람이 재주가 있습니까, 무슨 시험에 합격했습니까, 더구나 상서 중학교에 부안농공고(지금 부안제일고 24회) 간판 가지고 어디 취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행으로 취직한 곳이 신태인 북초등학교였습니다. 그게 1979년 12월 1일 제 인생의 ‘제2의 생일’ 같은 날이지요. 얼마 뒤 군대에 입대했고 2년 반 만에 제대하자 정읍 교육지원청에 말단으로 들어갑니다.”
4,5년이 멀다 하고 도내 여러 곳을 두루 거쳤다. 청각장애인을 보살피는 전주 선화학교, 전북교육청의 의사과 등. 마침내 이 사람은 농업학교를 나온 지 12년 만에 모교의 행정실장(6급)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시 교육청을 거쳐 변산 도청리에 새로 세운 학생해양수련원 발령을 받는다. 교원대학대학원 파견을 거쳐 익산에 있는 마한교육문화회관에 이르기까지 밀려다녔든 발탁되었든 간에 희한한 곳을 두루 다녔다. 주유천하의 세월이었다. 그는 부안교육청 행정지원과장을 거쳐 전북교육청 감사담당관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맹물로 배를 채우던 김성화의 소년시절
“저만 가난한 게 아니었어요. 한 반 30명 가운데 죽이든 밥이든 세끼 먹는 아이는 열도 안 돼요. 집에서는 맹물로 배를 채워요. 어른들은 뛰지도 못하게 해요. 이놈아, 그렇게 뛰다가는 배를 무얼로 채우려고 허냐 말이다. 남들은 ‘밥심’으로 사는데 너는 이놈아 ‘물심’으로라도 살아야지 이렇게 야단쳤어요. 무슨 기운으로 일하고 무슨 재미가 있어서 공부 하겠어요. 어찌 신물이 났던지 지금도 고구마나 꽁보리밥은 보기만 해도 고개를 젓는다.
그런 속에서 아버지는 자식이 초등학교 다녀 한글 깨쳤으면 그만이지 중학교에 보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엎어지면 코 닿는 오리 밖에 새로 중학교가 생겼는데도! 그런 아들을 중학교는 물론 30리 밖 읍내 고등학교 까지  보낸 것은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다. 이 땅에 맹자나 율곡의 어머니 못지않은 애틋한 어머니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제 자식 어떻게라도 출세시켜야겠다는 치맛바람이 아니었다. 배우지 못해 천대뱓는 걸 자식 대에라도 끊어야겠다는 피 맺힌 한이었다.
밭 닷 마지기가 재산이었다. 남의 땅 다섯 마지기 1,000평을 빌려 담배농사를 지었다. 아들 위에 누나가 넷이었다. 아무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니, 갈 형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외아들마저 중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 아버지의 방침이었다. “배우면 머리가 커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반거충이가 되거나 건달이 되기 일쑤였다. 김성화의 아버지는 어느새 평소에 생각하던 이런 생각이 ‘생활철학’으로 굳어 있었다. 김성화는 공직을 맡고서야 대학 나오지 못한 것이 차별의 원천임을 알았다. 고등학교를 나온 지 14년 뒤에야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고 그로부터 정확하게 9년 뒤 교원대학교 정책대학원을 졸업하게 된다. 숱하게 받은 표창이나 포상 못지않은 각고였다.

말보다 실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김성화의 40년 공직은 그저 장기근속 어떻고 하는 ‘복 많은 월급쟁이’로 그치지는 않았다. 공직 초년부터 부대끼며 부딪쳤다. 전주 교육청 말단으로 있을 때 일이었다. 여당 국회의원의 청탁을 완곡하게 거절하는가 하면 ,부안농고 행정실장으로 있을 때는 선생들의 숙직을 집에서 하도록 바꾸었다. 이 제도는 곧 전북 농어촌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무상급식을 전국 최초로 단행한 것도 그가 건의한 정책이었다. 급식의 전자조달시스템을 도입하여 학교급식을 투명하게 한 것은 또 하나의 그의 공적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맡은 직책이 위든 아래든 관계없이 그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웠다.
“여러 교육감님들이 제 건의를 잘 받아 주셨어요”그는 겸손해 했다. 그저 받아 주었겠는가. 그의 제안이 합리적이고 그가 신임할만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가 바로 혁신의 주역이었다.
김성화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하의 의병장 김낙선 선생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사람이다. 그 암흑의 시기는 물론 해방되고 독립된 60년 뒤까지도 나라에서 모른 체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에서도 문중에서도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오죽하면 독립운동의 영웅을 ‘독립질’ ‘의병질’이라고 폄하하며 쉬쉬 했겠는가.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햇볕을 쬘 수 없다는 것을 부안 감교리에서 배운다. 의병장의 아들은 겨우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뼈 빠지게 일해서 그저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손자가 할 일은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었다. 

향토자료관 전시실 내부. 김형주 정재철 선생의 손때 묻은 원 자료와 희귀 도서가 잘 전시되어 있다.

교육문화회관 관장실 대각선으로 향토자료실이 있다. 평생 선생이던 김형주와 정재철이 부안 문화를 캐내고 북돋으며 알린 생생한 자료와 희귀도서를 기증받아 제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들이 석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학생이 몰려왔듯이 경상도나 충청도 궁벽한 서원에도 유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부안 교육과 문화를 꽃피울 것인가는 부안 사람들의 몫이다. 이 좋은 시설에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하드웨어는 말을 모른다. 말을 이해하는 건 소프트웨어다.

지난 1월 28일 열린 부안문화를 꽃 피울 향토자료관 개관식.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김성화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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