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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꽃94-고성산성의 100년 전 묘비 하나

올해도 행안면의 고성산성에 자주 가게 된다. 혼자 가기도 하고 여럿이 가기도 했다. 이 산성이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하고 갈 때마다 꽃들이 반겨주는 정돈된 느낌을 받는 것은 이곳을 소리 없이 가꾸는 손길이 있음을 생각한다.
고려 때 부령현의 치소가 행안에 터 잡았을 때 이 산성은 읍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부안현의 치소가 성황산 쪽으로 옮기면서 이 산성의 역할도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행안이 바닷가였기에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중요한 산성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 산성이 무너지면 지척에 있는 부안읍은 큰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부안신씨와 진주김씨의 비석이 눈에 많이 띈다. 이곳을 들어서는 초입에서 보면 좌대가 드러나 비탈에 불안하게 서 있는 비석 하나가 보인다. 산성을 자주 찾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돌보는 사람이 없는 비석이란다. 작은 비탈을 올라 가까이서 보니 앞면은 진주김씨삼석지묘(晉州金氏三錫之墓)라고 쓰여 있고 옆면에는 세운 날짜가 나오는데 주후(主後) 1919년 3월이다. 비석의 뒤를 보니 ‘예수밋음으로영생함’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요즘 자주 듣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글귀 정도로 이해된다. 그 뒤의 영생이란 단어는 ‘영원함 삶을 얻으리라’는 것의 준말로 보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거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란 개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것은 묘비의 주인공이 일찍이 예수를 믿은 신자라고 볼 수도 있고, 다른 면에서는 자녀들이 기독교인이어서 비석에 신앙 내용을 새겨서 세웠다고 볼 수도 있다.
비석을 볼 때마다 어떤 분일까? 어떻게 신앙 생활했을까? 이 분이 신앙 생활했던 일제 강점기에 부안의 사회상은 어땠을까 등,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현재는 알 길이 없다. 다행히 가족을 찾거나 아는 분의 증언을 듣는다면 일제 강점기 부안의 기독교에 대한 추적도 가능할 것이다.
최근에 부안평화의소녀상 건립에 참여한 사회단체 가운데 기독교의 이름은 하서의 장신교회가 유일했다. 소녀상 세우는 것을 종교계에서는 다른 영역으로 해석했을까. 부안의 기독교인들도 개인 참여를 많이 했겠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왜 어려웠을까. 역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참여하지 않은 교회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참여한 장신교회를 찾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계가 지역 현안을 고민하고 지역민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하다.
고성산성의 100년 전 비석의 뒷면을 보면서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아침이다. 학교에서는 역사관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전주의 신흥학교가 개관한 역사관이 일찍이 모범을 보였다. 부안의 교회에서도 이런 역사관을 만들어서 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여기에 관여한 초기 개척자 분들의 신앙을 기록하면 어떨까. 상급은 땅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받으면 된다고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주기도문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신의 뜻도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기독교인들도 현재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니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사회가 밝아지고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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