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진흙판 산자락 일군 ‘부안 농민’

난 곳만 고향인가 묻힌 땅도 고향이지

한창 펄펄하던 시절의 유기농 개척자 오건. 사진작가 허 철 선생이 특별히 보내주셨다.

요란한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깬 농촌 마을은 몰라보게 달라져 갔다. 울타리가 담으로 바뀌었다. 지붕이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마을회관 마이크에서 울려나오는 새마을의 노래는 쿵쿵 울리는데도 못 산다고, 더는 못 살겠다고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갔다. 소를 팔아서라도 논밭을 팔아서라도 자식은 서울로 보내겠다고 별렀다. 그런 속에서 어엿하게 대학을 나온 갓 결혼한 스물여섯 살의 남녀가 서울에서 고속버스 타고 일반 버스로 갈아타고서도 한 시간을 걸어 내리 일곱 시간이나 걸리는 변산 안 도청리에 굴러 왔다. 거기엔 집 한 칸도 땅 한 평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의지할 사람은 그들 보다 스물 몇 살 위인 진짜 농사꾼이 1만평 남짓의 대여 받은 국유지를 개간하고 있었다. 조각가 김오성이 아직 내려오기 전이다.
이 사람들은 매창을 찾아온 유희경이 아니었다. 율도국을 꿈꾼 허균 같은 이상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흙속에서 살 길을 찾고 손발로 먹고 살자는 당찬 패기의 남녀였다. 토박이 농민들은 피식 피식 비웃었다. 유기농을 하겠다고 겁도 없이 나서자 미친 짓 한다고 깔보았다. 하지만 그들을 응원하고 이끌어주는 지칠 줄 모르는 동지와 선배들이 다섯 손가락, 열 손가락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만든 변산농민회는 1970년~90년대의 치열한 대정부 투쟁을 거치며 부안을 유기농의 메카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서울에서 굴러온 두 톨의 씨앗은 생리적인 번식은 이루지 못 했다. 대신 이들의 꿈은 ‘한살림공동체’로서 자연 건강을 알아주는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차려주고 있다. 어찌 건강한 먹거리뿐이겠는가. 흙이 썩고 물이 썩고 바다가 썩고 마음마저 썩어 문들어져 가는 이 땅에 가느다랗지만 한줄기 희망으로 비치고 있다.

이준희 여사 72세, 몸매나 표정이나 어디 맺힌 데가 없다. 그저 하늘과 땅이 주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장정숙

어쩐지 변산에 끌려  
필자는 오건1948-1990 이라는 이름을 30여 년 전이던가 일찍 들었지만 그의 부인 이준희 여사는 며칠 전 만나고서야 처음 알았다.
-어떻게 변산 이 험한 산중에 오시게 됐습니까?
“건(남편 오건)이랑 제가 여기에 온 게 아마 74년 3월이었어요. 우린 동국대 원예과 동기였습니다. 여기 저기 몇 팀으로 나누어 농촌 실습을 나가는데 변산 도청리에 오게 됐어요. 그때는 농촌 계몽이다 뭐다 해서 되지도 않는 소리들을 했지만 우리는 이런데 살면 좋지 않겠나, 진짜 벽지구나, 그런데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까지 있는 이런 데를 개척하면 보람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이든 바다든 경치보다 삶의 터전으로서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집이나 땅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지금 조각공원 김오성 선생 아버지께서 챙겨 주셨어요. 언덕배기 야산 황무지 몇 천 평을 혼자 일구시니 얼마나 힘 드셨겠어요. 좀 떼어 달랬더니 우리를 기특하게 여겼는지 3천 평을 주셨어요. 집도 그 어른이 사시는 손수 지으셨다는 집에서 얼마동안 같이 살다가 우리가 흙벽돌을 찍고 슬레이트를 얹었어요. 설계도 건이와 내가 상의해서 했고.”
-대단하셨네요.
“자기 집 자기가 지어야지요. 누구한테 맡기겠어요. 그런 돈이 없는데. 한번은 흙벽돌 수백 장을 찍어 마당 한가운데 쌓아 놓았는데 아침에 나와 보니 어젯밤 비에 와르르 다 무너졌어요. 기가 막혔지요. 다시 찍을 수밖에.
-농사는 어떤 농사를 지었습니까?
“우선 먹어야 하니까 쌀과 보리 고구마 농사를 지었지요. 유기농이니 처음부터 소출은 형편 없었고. 여기 와서 처음 쌀 한가마 들여 놓고 한 일 년도 더 먹었지요. 꽁보리밥에 고구마 몇 뿌리, 감자 몇 알로 끼니를 이었지요. 반찬도 집에서 기른 채소가 전부고……”

오건과 같이 짓고 같이 살던 이 여사 집. ⓒ장정숙

작가의 아들, 여관 집 딸 
이들이 정착하자 이들보다 훨씬 먼저부터 아기뚱하게 변산에서 농촌운동을 벌여온 박배진은 이들을 곱게 보면서도 저것들이 몇 조금이나 견딜까 싶었다. “너희는 농사 안 되면 도망갈 놈이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도망갈 구멍이 없는 거여.” 박배진의 앞뒤 가리지 않는 직설에 자존심이 상해도, 그래 토종만 농민인가 개량종도 농민이다, 하는 뱃심이 있었다. 이곳 농촌으로 들어오면서 평소 보던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왔는데 농업책 세 권 외에는 아예 보따리조차 풀지 않은 것도 토종으로부터 조롱당하지 않겠다는 발버둥이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굴러왔는가. 건이의 아버지는 작가였다. 오영수는 아들들을 출세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건의 형 오윤은 80-9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아스팔트 거리와 써클의 밀실에서 선풍을 일으킨 판화가다. 이들 형제는 한때 도청리 농장에서 같이 기거했다. 준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조그만 여관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세대는 저 남쪽 부산과 북쪽 황해도였다. 남북의 2세들은 서울에서 컸거나 났다. 아들딸들은 남산 북쪽 기슭 동국대학 클라스메이트로 만났고 이 만남이 서해안 바닷가 부안에서 둥지를 틀기에 이른다. 운명인가 의지인가!

오건은 1990년 1월 간암으로 42년의 생애를 ‘농민’으로 마친다. 그는 농민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농민 운동의 선두에 서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흙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한울’의 한 조각으로서 그가 16년 동안 파내고 북돋던 집 뒤 언덕에 묻혔다. 아내 이준희와 ‘한살림’ 동지들이 상석에 몇 자 새겼다. 시인이자 지금 변산 공동체 교장을 맡고 있는 박형진의 비문이다. 

집 뒤에 잠든 오건의 묘소. 편한 대로 상석 위에 덜퍽 앉았다. ⓒ장정숙

“여기 우리들 가슴 속에 오래도록 살아있을 농민 오건 잠들다.” 많은 사람들이 변산을 떠나갔다. 1980년대 초 12만이던 부안 인구는 2019년 6만을 밑돌고 있으니 반토막이 났다. 하지만 아무개가 떠나고 아무개가 묻히고 해도, 거기에다 거대 자본과 국가 권력 까지 합세하여 환경을 짓이기는데도, 변산하면 유기농의 메카로 순례자가 그치지 않는 것은 오건과 같은 불같은 열정이 지금 변산의 누군가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건이 간경화로 사경을 헤매는 걸 보다 못해 아내 준희가 좀 쉬도록 말렸다. 그러자 오건은 말했다.
“아프다 죽으나 일하다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차라리 일하다 죽어야지” 하며 흙 퍼 나르는 리어카를 끌었다, 땅을 묵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으로 여기는 것이 농민의 마음이다. 그 리어카가 철길 끊어진 경의선 레일 위에 멈추어선 화통처럼 숲속에 묻혀 있다.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사지를 뻗고 죽어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오건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펄쩍 펄쩍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농약으로 죽게 만들다니!

아버지 오영수가 쓴 오건의 실록소설 ‘어린 상록수 ’(들녁 2001)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곳              .   
-지금도 농사를 짓습니까.                     
“힘에 부쳐요. 저도 나이가 일흔 두 살 인걸요. 채소 조금 가꾸고 꽃 가구기도 바빠요. 격포 차 타고 나가서 이것저것 사오기도 하고. 나간 길에 수영장에도 가고……”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국민 연금이 30만원, 노령연금이 25만원 나와요. 절약하면 그저 지낼 만해요. 아직은 의료비가 들지 않으니까요. 젊어서부터 남에게 신세지지 않겠다는 것이 몸에 뱄어요. 여기 오시는 유기농 손님들을 위해 민박집을 하고 있어요. ‘작은 농장 민박’ 블로그가 있어요.”
“사는 게 재미있어요.”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