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사람 좋고 산이 좋아

40년 전통의 알뜰한 산우회를 짊어진 사업가

지리산 중턱에 선 김보철 회장

‘변산산우회’는 수 천개, 혹 만개를 넘을지도 모르는 다른 산악단체와는 크게 다른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부안사람이어야 한다. 부안에 사는 사람은 물론 서울애 살든 전주에 살든 부산이나 인천에 살든 관게가 없다. 옥작옥작 모이는 좁은 지역이 아니라 광역을 표방한다. 둘째, 꼬박 40년의 역사 가운데 한 번도 돈이나 회장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거나 시비를 벌인 일이 없다. 임기 2년을 꼬박꼬박 지켰다. 2년도 지겨운데 무얼 바라보고 더 봉사하겠나,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산만 다니면 그만이지. 셋째, 더러 형편에 따라 회의 운영이 조금씩 바뀌었지만 기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여러 부서가 있지만 기본은 회장-총무-재무-산악대장-봉사가 핵심으로 움직인다. 전임회장이다 부회장이다 해서 고향이나 직장의 선후배나 상하관계는 적어도 산행 때 만은 묻히고 만다. 산에 왔으면 신선이거나 알피니스트의 자세는 아니더라도 그저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구름을 보고 꽃을 보면 그만이지 세속의 피곤한 골칫거리를 여기서까지 되씹으려 하지 않는다. 넷째는 정말 변산산우회의 회칙에 없는 불문율, 철 따라 나오는 부안의 음식을 걸판하게 싸가지고 와서 둘러 앉아 ‘허천나게’ 퍼먹는다. 산중이든 갯가든 어릴 때 먹던 식성은 나이 들수록 절실하게 느낀다던가. 어디 쭈꾸미나 산채뿐이겠는가. 갑오징어든 가오리든 박대든 장대든, 몇몇 친구는 아예 열 댓명이 먹을만한 광어나 민어를 산채로 모셔와 산중턱 점심 자리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생선 요리용 칼을 대는 솜씨를 자랑했었다.
 
 

산악인이라기 보다 배우 같은 미남 김보철 사장

사람이 좋아 산도 좋아

변산산우회징 김보철사장(65년생)을 서울시청 뒤 프레스센터 19층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만났다. 오후 4시.             
-언제부터 산을 좋아하게 됐습니까
“얼마 안돼요. 한 10년 전 쯤 친구들과 지리산에 간 게 처음이에요.
-지리산 어데요?
“우리 천왕봉 한 번 가자 해서 같이 놀던 친구 여덟이 갔어요.”
-많이 힘들었겠네.
“죽을라다 살아났어요. 모두들 운동하던 친구들이어서 그 정도는 별 것 아니겠거니 했는데 정작 갈수록 힘이 드니 이거 괜히 왔다 싶기도 했고.”
-난 곳이 상서 지석 숙실산 밑이라는데 학교 때 변산이나 내장산 모악산같은 산 안 가셨습니까.
“학교를 부안에서만 다녔거든요. 누가 가자는 사람도 없었고. 학교 때는 운동에 미쳤거든요.”
-무슨 운동?
“상서중학교와 부안고등학교에서는 핸드볼 선수였고 대학(오산대학) 때는 배구 선수, 군대도 수방사에서 했는데 거기서도 배구 선수 했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산산우회 들어오게 되고 더구나 회장의 중책을 맡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말씀을 하시니까 그렇지 저는 산을 좋아하기 전에 꽁(공)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 했어요. 김 의원님이 만든 ’변산산우회‘도 몰랐지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도 한참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 선배이자 바로 이웃 마을에서 나신 김경엽씨(전 변산산우회장)가 산우회 들어와서 같이 다니자 해서 들어왔습니다. 고향 친구들끼리 산에서 만나니 이건 또 별미데요.”
-변산산우회의 회원은?
“정회원이 110명, 비회원이 아마 80-90명쯤 되지요.
-회원 아니면 다 비회원 아닙니까? ‘비회원’이라는 뜻을 잘 모르겠는데.
“가까운 산행은 괜찮은데 버스라도 대절해서 먼데 산행하자면 아무래도 그날 회비만 내고 가는 그런 산행 손님과 같이 산행하게 되지요. 이런 분들을 편한 대로 ‘비회원’이라고 불러요.
-월례산행은 빠지지 않고 잘 합니까?
“그럼요. 전통이다 관행이다 하는 게 대단하다는 걸 실감했어요.”
-지난 3월엔 서울과 전주 합동으로 계룡산 산행 하셨다구요?
“서울에서 버스 한 대, 전주에서 버스 한 대에다 승용차로 오는 일행도 있고 해서 총 94명이 합동 산행을 했습니다.”
-클럽 운영 예산은 얼마나 되지요.
“년간 1,500에서 2,000만 원정도 됩니다. 기본 수입은 입회비 10만원 년 회비 10만원 입니다. 여기에 회장 취임 때 분담금이 500만원이고 총회 때는 부회장이나 총무도 형편이 되는대로 좀 내지요. 회원 가운데도 적지 않은 찬조를 해주시고. 지출은 유급직원이 없는데다 산행 외에는 경조비도 화환 외에는 공식으로 나가는 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검소한 살림이 수 십년 동안 몸에 배였다고 합니다.”

계룡산 합동산행

30대 수혈과 부안산우회 재건이 과제
-사업은 어떤 사업을 하고 계시는지, 지금 다들 불황이라고 야단들인데.
“그대로 큰 어려움은 아직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우리 또래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큰 고생은 하지 않은 듯합니다. 농사짓는 집에서 3남으로 태어났으니 부모님을 모시거나 동생들을 보살필 책임이 적었고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지방의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산업공학과’에 갔으니 거기 휩쓸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더구나 지금 많이 욕을 얻어먹고 있는 80년대 후반을 수방사 30경비단에 있었으니 바깥세상과는 전혀 딴 세상이었지요. 청와대 바로 앞 경복궁이 우리 부대였으니까. 거기에서 하사로 만기 제대 했어요. 그 무렵 얼마나 많은 우리 또래들이 학생운동을 하거나 옥고를 치루었습니까. 어떻든 제대하자 조그만 중소기업에 중견사원으로 한 10년 있다가 일을 배워 회사를 차렸어요. 수원 근교에. 식품 포장지 관련 사업인데 커피컵 LID(테이크 아웃용 커피컵 뚜껑)를 만듭니다. 해태나 롯데 빙그레 같은 큰 업체에 납품하기 때문에 판로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 2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려다 못한 일이 무엇 입니까.
“우리 변산산우회가 자꾸 늙어 가요. 이러다가 ‘변산 노인산악회’란 말 듣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젊은 30대를 영입해야지요. 입회금이나 회비를 조금 받더라도 말입니다. 또 하나 부안에서 태어난 ’변산산우회’ 재건은 오랜 숙원인데 이게 잘 안 되네요. 얼마 전 김한수 의장님과도 그런 말씀 나누었습니다.”
 

변산산우회보 2호

탯자리는 변산 내소사. 초기에는 천왕봉, 대청봉 누비기도
변산산우회는 1978년 10월 21일 오후 부안 변산 내소사 입구 전나무 숲에서 발족했다. 서울에서 20여명, 부안에서 10여명 도합 3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전문 8조의 아주 간단한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 선거에 들어갔다. 이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일이 쉽게 처리된 것은 서울의 김진배와 부안의 이중석이 부안농고(지금 부안제일고) 1회이고 주요 임원들이 거의 고등학교 선후배들로 짜였기 때문이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색은 서울과 부안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회장을 맡되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1년에 봄과 가을 두 번은 변산에서 만나 산행을 하기로 했다. 이러한 원칙은 처음 얼마 동안은 잘 지켜져 왔다. 전주에 있는 부안향우들이 곧 전주 쪽 변산산우회를 만들었다. 부산과 인천에서도 이에 호응했다. 한때 변산산우회는 산을 좋아하는 부안 사람이면 들어가고 싶어 했다. 잡음 없는 것이 사람을 끌었다.       
창립 당시의 임원은 회장 김진배, 부회장이자 차기회장 이중석, 부회장 이택환이었다. 서울 쪽과 부안 쪽의 임원은 총무 강신영 신양근, 봉사 안병원 이정선, 연락 김대석 신형문, 감사 김석성 최규석. 이들은 내소사에서 자고 직소폭포-월명암-지서리 코스 산행과 개화도 간척지를 둘러보았다. 조그만 친목단체인데도 이들은 창립과 함께 ‘변산산우회보’라는 회보를 다달이 내 산우회의 명단, 수입과 지출, 다음 달 산행일정을 자세하게 알렸다. 인쇄와 배포는 창립회원이자 뒤에 회장으로 활동한 신정인쇄(지금 신정프린텍) 김종철 사장이 수고했다. 1978년에서 2007년까지 30년 동안에 한 쪽 또는 두 쪽짜리 회보가 차곡차곡 쌓여 100호가 되자 당시 서울 쪽 김상기 회장은 4X6배판 704쪽의 통합본을 냈다.
세월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산을 좋아하는 마음조차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그 스타일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필자 같은 구식 스타일과는 크게 벗어난 김보철 회장의 말이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