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설/칼럼 시사칼럼
[부안논단] 동지(冬至), 긴 하루동안의 안거(安居)지난 아픈 세월이 내삶에, 부안의 역사에...꼭 건너야 할 강이었다면 그렇게 건너자

“눈이 언제 오냐”며 칠월부터 방한복을 꺼내 놓고 날짜를 세던 아이들 입에서 “이젠 겨울이 싫다”는 말이 나온다. 딴에는 눈에 길이 막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걱정, 그리고 땔감 마련하랴 지붕 눈 끌어내리랴 앞뒤로 허둥대며 부산한 내 꼴이 안쓰러웠던 것이리라.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들은 참호처럼 좁다랗게 뚫린 눈길을 쏘다니며 하루 종일 눈강아지가 되어 들어온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거칠 것’ 없는 아이들에게는 이 엄청난 눈 재앙조차도 하늘이 내려주는 마냥 즐거운 선물일 뿐인 것이다.

부실한 헛간에 몇 군데 기둥을 덧 받쳐 세우고 아궁이 불을 지펴 넣은 다음 서둘러 들어와 저녁을 차린다. 혹시 모르니 양초도 준비해 두어야지. 잠시도 쉬지 않고 퍼붓듯 내려 쌓이는 눈은 어느새 뒤란 창문턱 아래로 가지런하다.

아! 이러다가 정말 지붕까지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먼저 두려운 모습을 내보여서는 안되지. 애써 마음을 다져 먹으며 아이들과 윷놀이를 한다. 밖은 이제 눈보라가 치는 듯 댓잎 날리는 소리, 전봇대 울리는 소리가 벌판에서 울부짖는 짐승 소리처럼 으스스하다. 동짓날 길고 긴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이튿날 내다본 세상은 온통 눈 천지다. 마당과 지붕사이의 높낮이도, 고샅과 울타리의 나눔도 없다. 그야말로 눈으로 이룬 ‘평등세상’이다. 빈 터에 바쳐 둔 트럭은 한 길 눈 속에 폭 박혔다.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없으니 이제 나를 바깥 세상과 이어주는 끈은 거의 끊긴 셈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내게 닥치는 삶이, 부안에 펼쳐지는 역사가 굽이굽이 휘어 굽고 비탈진 산길처럼 험하게만 여겨진다.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모질고 추운 시간들이었던 걸까? 지난 삼년에 걸친 날들이 그새 묵은 사진첩 속에 든 빛 바랜 사진들 처럼 아스라하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절반을 차지할 만한 체험을 몰아쳐 했음 직한 삼년이다. 분함,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 어두운 기억들로 먼저 채워지는 삶이요 역사다. 그리고 그 어두운 체험들은 지금 너와 나, 왼편과 오른편 모두의 가슴에 단단한 옹이로 박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드러난 흉허물에만 마음 쓰며 매달려 있을 것인가? 그 또한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내 눈 안의 들보일 수 가 있다. ‘우리’를 ‘너‘와 ‘나’로 담을 두르며 갈라 세우는 것이 저 잘못된 정치 탓만은 아닐 터이다. 그것은 어쩌면 더 깊은 곳, 부와 권력에 대한 내 안의 끊임없는 욕구, 잃어버릴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오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나는 ‘잠에 취한’ 민중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부추겨 세워 제 잇속이나 차리려는 속물 정치꾼들에게 면죄부를 줄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다만, 밖으로 뻗은 손가락을 돌려 내 가슴과 눈에 든 들보를 후벼 파내는 뼈 아픈 돌아봄이 한 번쯤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맞은 매야 분하고 억울하지만,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고개 수그리고 풀어낼 마음이 없다면야 더 다그쳐서 무엇하겠는가? 이미 박힌 상처가 억지로 지워질 수 는 없는 법. 널빤지 위로 드러난 촘촘하고 매끄러운 옹이의 결처럼 얼마나 정성스레 아름답게 다듬어 낼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이 땅 부안에서 마지막까지 살아갈 사람들이 해야 할 바른 선택 아닐까?

세상살이 우연이란 없다 한다. 지난 아픈 세월이 내 삶에, 부안의 역사에 꼭 건너야 할 강물이었다면, 그렇게 건너자. 물 속에 빠뜨려져 허우적 거리던 무서운 기억조차 강물에 몸을 맡겨 헤엄쳐 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하자. 이미 큰 강을 건너 온 우리에게 강 너머 저쪽의 평화롭던 때도, 강물 속의 죽음 같은 날들도 모두가 강둑 이편 새로운 땅에 닿기 위한 한 과정이요 단련의 시간이었다 말하면 지나친 너그러움일까?

일 년 중 밤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 옛 사람들은 가마솥 가득 쑤어 놓은 검붉은 팥죽을 한 사발씩 울바자 너머로 나누어 먹으며 이 길고 깊은 겨울밤을 견디어 냈을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쥐꼬리 만큼씩이나마 길어져 갈 붉디 붉은 해를 반겨 기다리며…….
 

김효중   ibuan@ibuan.com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