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에 계화도를 찾았다. 이곳을 몇 차례 가봤지만 장재울(장재월, 장잘) 마을은 처음이다. 계화산의 동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주민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산 뒤에 마을이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장재울은 하리에서 살금마을 뒤 중턱의 좁은 길을 넘어야 만나는 계화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80년대 말만 해도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6가호에 11명 정도가 생활하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의 벚꽃이 마지막 잎을 떨구고 고군산의 섬들이 몇 달음이면 닿을 듯 보인다. 마을 앞에는 중중다락이라는 절벽이 있어서 석간수가 바위 중간에서 바다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인의 소개로 장재울에서 만난 사람은 최복수(1945년생)씨다. 이 동네에서 7대째 이어 살았고 군대 3년하고 사우디에서 1년 일한 것 빼놓고는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다. 결혼도 계화도 상리 처녀하고 했다.
계화바다는 풍요를 주었지만 흉년이라도 드는 해는 산이나 바다의 풀들을 뜯어다가 데쳐서 된장과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때는 밥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최복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매기소’를 키웠다. ‘매소’라고도 불렀던 이 일은 부잣집에서 큰 소를 가져다가 2년을 키워주면 그 대가로 송아지 한 마리를 얻는 일이었다. 학교 가는 때 빼고는 소를 산에다 매고 소죽을 끓여 먹이는 등, 소에다가 모든 정성을 다 들였다. 그 뒤로도 집소를 1년 정도 키워서 부안 우시장에 내고 작은 소를 사서 다시 매면서 그 남는 돈으로 생활에 보탰다.
2010년 12월에 세 마리로 소먹이는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12마리가 됐다. 소 키우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 새벽 세시쯤에 일어난다. 우사에 들어가서 소가 하루 먹을 볏짚을 작두로 썰고 4시 30분이면 여물을 준다. 소를 먹이고 나면 다시 볏짚을 썬다. 6시 30분에 산에다가 소를 매기 시작한다. 풍족한 풀을 먹여야 하기에 한 곳에만 있게 할 수는 없다. 점심 후에는 풀이 있는 곳으로 소를 옮겼다가 해질녘에 끌어다가 우사에 맨다. 그러고 보면 하루 종일 소에 매어 있는 편이다. 큰 농장에서 100여 마리 소를 키우는 것보다 최복수의 일이 더 많고 어렵다고 한다. 밖에다가 소를 매일 매야하는데 요즘 이렇게 소를 키우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밖에다가 소매는 일은 비 오는 날을 빼놓고는 4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우사를 깨끗이 관리하려고 소를 매고 나서는 아침 한나절 청소를 한다. 소가 들어왔을 때 보송보송하고 청결한 곳에서 생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장재울을 찾은 시간에 최복수는 산에다가 맨 소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기둥에 묶고 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물어보니, 갯벌을 잃은 뒤에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마을이 배려버렸다”고 했다. 밭 경작이나 날일, 밖으로 품팔이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했다.
예부터 장재울은 바람이 센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새만금 이후에는 갯 땅에서 불어오는 뻘 먼지 때문에 마을 전체가 힘들다고 한다. 새만금 공사를 한다고 몇 십 년 동안 저렇게 하지만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해수유통으로 그나마 갯벌이 조금이라도 살아난다면 그래도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정부의 정책 실무자들을 만나면 살아갈 대책이라는 의견이라도 내고 싶지만 이 길도 막막하다.
최복수가 끌고 오는 소 세 마리가 새끼를 뱄다. 특별히 애지중지 하며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가 언제까지 이렇게 소를 끌고 다니며 계화산의 싱싱한 풀을 먹일지 자신감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도 나이를 먹었고 세상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삶터를 빼앗기면서 겪은 장재울의 슬픈 역사가 그저 묻히기만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장재울 마을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곳의 시간이 대지를 뚫고 나온 새싹처럼 희망으로 지속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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