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황폐한 갯벌의 파수꾼

하얗게 소금기가 올라오는 해창 앞에서 통곡한 사나이

생기가 펄펄한 사진작가 허 철   Ⓒ장정숙

내년이면 70을 바라보는 사진작가 허 철(허철희 許哲熙)은 생기가 펄펄했다. 꺼칠하게 자란 수염은 기른 것일까, 깎지 않은 탓일까. 검정 숲 속을 하얗게 덮은 자작나무처럼 억세게 보인다. 엷은 흙색 캡에 같은 색 재킷과 바지, 안에 검정 재킷을 받쳐 입었다. 군화인지 등산화인지 단조로운 신발, 바로 작업장 인부에게서 보던 그 신발이다. 한창 유행인 챙이 단단한 캪만아니라면 마치 영국이나 영 연방군대 복장이다. 망원을 장착한 80밀리 포신만큼이나 육중한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보통 풍채가 아니다. 1미터 80 가까운 키인데도 몸의 어느 한구석 맥이 빠진 구석이 없다. 그렇다. 권투 선수의 몸매에 백발백중의 궁사다. 그 눈이 공중에서 물고기를 낚아채는 갈매기나 해오라기의 눈처럼 형형하다. 어쩌다 가끔 눈을 치켜뜨기라도 하면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상대를 압도한다. 드물게 보는 당당한 부안의 얼굴이었다. 거칠 것 없는 불굴의 자세다.
서로 알고 지내기는 10여년 되지만 내가 아는 허 철은 아무개 동생 사진 작가 정도였다. 그가 아는 나라는 사람도 그 정도였다는 걸 정작 이제사 알았다.

-허 선생 인터뷰 좀 했으면 하는데 오늘 행사 (부안 소녀상 제막) 끝나고 어때요?
“지금 일하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한 10분 뒤 끝나지 않을까.               
“왜 저를 인터뷰 하세요. 제가 그런 사람 아니예요”
-그런 사람 아니라니 무슨 뜻인지?
“내가 누구다 하는 이름이나 파는 그런 사람 아니라는 말이지.”
-그런 사람 아니기 때문에 인터뷰 하자는 거여. 부안 갯벌을 지키려고 어떻게 싸웠는지, 또 왜 지켜야 하는지를 듣고자 해서 만나자는 것이여.    
“의원님은 새만금 아니면 죽는 걸로 아는 쪽 아닙니까. 저와는 입장이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저를 만나자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원 시절에 어떤 입장이었고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는 딴 문제고…… 어떻든 지금 좀 만납시다.
“허 참. 정 그렇다면 한 1주일 뒤든지 한 달 뒤든지 서로 편할 때 만나 차 한 잔이라도 할 수 있겠지요. 어떻든 지금은 안돼요.”

껄끄러운 인터뷰

나는 그의 손을 꽉 붙잡고 군청 근처 찻집 2층으로 들어섰다.
첫 질문이 그의 비위를 또 거슬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허 철’ 선생인지 ‘허철희’ 선생인지.
“두 가지 다 씁니다.”        
-생년월일은요?
“그게 필요합니까, 이건 인터뷰가 아니라 뭐 조사하는 것 같네요.”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름이나 나이를 모르고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묻는 것이지요. 미안해요. 
“허, 아, 제 나이가 얼마쯤 되는지 몰라서 물어 보세요? 탁 치면 다 나와요. 제 이름 치면 컴퓨터에 다 나와요. 그걸 하나하나 물으시면 이거 참……”
-허 형 컴퓨터 들어가 보겠지만 더러 나이만 나오기도 하고 생일이 나와도 음력인지 양력인지 또 실제 나이인지 호적상의 나이인지도 알기 어렵고, 그런 사정이 있어 여쭙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시고 안하시고는 형편대로 하세요. 왜 묻느냐 신경 쓰지 마시고.
허선생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 났다. 오랜만에 별사람 다 만나 시달린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어떻든 대화는 껄끄러웠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포탄 발사대처럼 카메라를 받친 허철의 자세  Ⓒ장정숙

생태계를 파괴하고서 사람은 어디서 사나?

-왜 새만금 막는 걸 반대했습니까, 지금은 어떤 입장입니까?
“생태계가 파괴되면 사람은 어디서 무얼 먹고 삽니까. 같이 죽어요. 새만금 막을 때 쌀이 부족하니 바다라도 메워 농사를 짓자 이랬어요. 세계에서 제일 긴 방조제를 우리 전라도 부안 앞바다를 막아 만든다, 지금 어떻게 되어 있어요. 공사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었는데 거기에서 쌀 한 톨이 나옵니까, 4만 정보다, 1억 몇 천만 평이다 하는데 그게 무슨 숫자예요? 우리가 그만큼 바다를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것 밖에 더 되느냐 말입니다. 이제는 엉뚱하게 어디에다 철도를 놓는다, 공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김의원님 같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저까지 걸고 들어가지 마시고 그냥 당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세요.
“흔히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나으냐, 이걸 막아서 농사를 짓는 게 낫냐 하는 경제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바다 밑 수백 킬로의 터널을 뚫기도 하고 바다 위에 수십 킬로 고가도로나 철도를 놓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수산업이냐, 농업이냐 할 때 만경강 동진강 같은 하구에서는 바다를 그대로 두는 것이 경제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드러났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 하시니 좀 풀려요?
“저 방조제는 부안 김제 군산의 38선이예요. 사람의 생존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는 38선이예요. 이걸 툭 터버리지 않고는 저는 눈 못 감아요. 해창 앞 그 좋던 습지에 하얗게 소금이 올라와요. 저는 그걸 눈으로 볼 수 없어 산중에서 읍내로 나올 때면 아예 남녀재~청림~우슬재 쪽으로 넘어 다녀요. 이 땅덩어리가 생긴 이후 ‘억만년’을 두고 하루 두 번 조류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2006년 4월 21일 새만금으로 물길이 딱 막혔단 말입니다. 1997년에 이미 시화호가 썩은 호수로 변한 것을 뻔히 보면서 부안에서 새만금 바람이 불었으니! 경기도 갯바닥과 전라도 갯바닥이 다르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되지요. 갯벌은 개발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영국의 ‘네이쳐’ 잡지가 말했어요. 갯벌의 생태적 가치는 농경지의 100배라고.” 

카츄샤 근무 때 사진 익혀, 기록사진 아카이브

핵폐기장 반대투쟁에서 새만금 반대투쟁에 이르는 2000년대 초 허 철은 ‘부안 21’이라는 인터넷 신문을 만들었다. 이어 ‘부안 생태문화 활력소’라는 간판을 걸고 생생한 사진을 통해 이 고장의 산과 바다가 얼마나 귀중한 유산인지를 알리는데 힘썼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찍어 댔고 밤낮 없이 자료를 현상하고 정리하고 문헌을 살폈다. 지금 부안의 ‘역사 문화연구소’에 참여하고 있다. ‘부안 이야기’의 편집책임을 맡고 있다. 그에 앞서 문규현 신부님 같은 핵 폐기장 반대의 투사들이 ‘부안독립신문’을 만들 때도 앞장 섰다고 한다.
-지금은 왜 뒤에 계십니까?
“내가 성질이 좀 까다로워요. 그리고 나 아니면 남들은 못할 일을 찾게 되었지요. 생각이나 목표가 같더라도 각기 맡은 역할이나 재주는 다르지요. 사진, 시각예술로 자랑스런 부안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운동을 벌이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고 보았지요.”

아카이브에 저장된 변산 바람꽃 사진 Ⓒ 허철

그는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서 농사짓는 집에서 8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변산초등학교를 나왔다. 대학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정작 대학은 가지 못했다. 전방에 있는 미 제2사단 카츄샤 부대에서 복무했다. 병과는 통신. 사진에 취미가 있어 사진 찍고 현상하고 브리핑이나 전시 준비를 하는 작업에 재미붙였다. 배우기 어려운 최신 기술을 군 복무 중 익혔다.
사진작가 허 철 선생의 불같은 바다 지키기의 야망이 지금 부안 어느 바닷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의 성패를 말할 것인가. 오직 셔터를 누를 뿐이다. 이래서 부안의 오늘, 오늘의 부안 바다는 아무도 흉내 낼 수도 변조할 수도 없는 ‘허철의 기록’으로 축적되고 있다. 그의 아이디 'huhhuh'(허허)처럼. 관심 있는 분은 www.imagebuan.com을 방문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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