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농사도 연출이다”

논밭 4만평의 가족 영농

농투성이 같이 투박한 유재흠 국장의 인터뷰 모습 &#9400; 장정숙

제1막 밥도 마음대로, 입도 마음대로

오후 다섯 시 조금 지나 하나 둘씩 식당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하던 그대로의 모자와 신발 작업복 그대로다. 50-60대의 건장한 남성 사이에 간간이 40-50대의 여성이 들어선다. 웬만큼 아는 사이, 끼리끼리 앉은뱅이 식탁 앞에 앉자 곧 식사가 나온다. 돼지고기 국밥이 나오기도 하고 소고기 샤브샤브 냄비가 끓는다. 방안은 시끌벅적하다. 웬만큼 식사가 끝나자 황토색으로 염색한 위아래 전통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한쪽에서 일어났다.
“식사들 하셨습니까, 시작 할까요? 
부안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보고 있는 유재흠의 사회다. 넥타이를 맨 몇 사람 가운데 권익현 군수와 신영근 공동대표가 서로 떨어져 편하게 앉아 식사를 막 마쳤다.  
그제사 사무국장은 식당 입구 대각선에 선 채 이동식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회의 안건은 동상을 세울 위치 문젭니다. 일어 나셔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추진위원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후보지는 시계탑 있는 곳과 군청 앞 작은 공원입니다. 양쪽 다 한 20~30평 이라고 합니다”
서너 사람이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아주 요령 있게 설명했다. ‘저요!’ ‘저요!’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특별히 지명하지도 않았다.
“그럼 자문위원장님 의견은 어떠신지?”
자문위원장 정재철은 역사성, 접근성, 군청과의 관계로 보아 군청 앞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이야기 했다. 다른 사람이 이를 정식으로 동의하자 사회를 보던 유 국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럼 군수님 의견은 어떠신지 군수님 말씀을 들어보실까요?”
권 군수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한다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민의 주거나 교통에 피해가 없는 한 도와드리겠다“고 공식으로 다짐했다.
“그럼 동상을 군청 앞에 세우겠다는 동의에 재청 있습니까?” “3청 있습니까” “이의 없습니까”
우레 같은 박수와 함께 만장일치로 소녀상 건립 장소는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들어가기 조금 전에 식당 입구 주방 쪽에 스크린이 쳐지고 두 군데 영상이 서너 번 천천히 비춰졌다. 30여명의 추진위원들은 이를 제각기 ‘자기 일로 알고’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아, 이런 회의도 있구나 싶었다. 제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자기 식성대로 정하듯이 동상 세울 자리도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결정하는 자기 결정권이랄까 자치능력을 우리 부안에서 본 것이 흐뭇했다. 더구나 능숙한 사회 솜씨는 압권이었으니!

오른쪽이 부인이자 동지인 임덕규 씨

제2막. 학생운동의 기수 부안에 정착

부안 하서면 석상리. 웃돌마리 마을. 53세의 농사꾼 유재흠이 부안으로 내려오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아니 운명이었다. 춘천이 고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은 서울에 있는 인문대학을 다녔다. 임수경이 ‘평양 축전’에 극비 입북할 때 그는 학생회장으로서 그녀의 방북을 도왔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의 고향이나 서울에서 멀리 떠난 어느 곳에서 밭 갈고 씨 뿌리는 농사일을 꿈꾸었다.
유재흠은 같이 학생운동 하던 나이도 학교도 한해 위인 한 아가씨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전북 서해안의 부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부안으로 내려온다. 그가 목마르게 찾은 여인이 서울대 영문과를 나오고 4기 전대협 농민분과장으로 활동한 임덕규다. 전에 이 스페셜 칼람에서 쓴 ‘엄영애 할머니’가 농민운동 할 여성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 처녀는 부안으로 내려 왔고, 그 뒤를 따라 같은 학교 동문이자 학생운동의 동지 유재흠이 내려왔다. 그들은 얼마동안 하서 노곡(노로지)에 정착, 농사를 짓다가 곧 두 사람만의 둥지를 틀었다.    
“부안 사람은 각씨 따라다녀야 먹고 산데요”
유재흠은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던 아내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저 양반 아니었으면 저는 없어요. 저 몸을 보세요, 진짜 농사꾼이예요”
얼마 전 해창 갯벌에 장승을 다시 세웠다. 흔히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으로 세운다. “그걸 ‘천하 여자 대장군’으로 모셨어요. 갯벌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잖아요”
그 여성에 그 남성이었다. 부부이자 동지는 이런 것인가. 두 남매의 엄마는 아랫돌마리에 있는 ‘부안여성농업인센터’의 소장으로 봉사한다. 10여년전 유재흠이 농민회 전북 정책위원장 때 정부 보조와 모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부안 평화의소녀상 제막식 현장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유재흠 국장.

제3막 축복. 진실을 기억케 하는 새로운 역사의 원형으로

제막 식장. 30여평의 원형무대. 아래 쪽 도로와 상가가 널판으로 가려져 조그만 소나무가 드문드문 들어선 오붓한 원형무대다. 바닥이 조금 높은 북쪽 군청 군의회 쪽으로 100여개의 철제 의자가 여남은 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전통예술원 타무 팀이 농악을 울린다. 커다란 용트림이 창공을 뒤덮는다. 그 뒤를 이은 건 호랑이가 아니라 멧돼지다. 꼬리를 6자로 꼬고 앞으로 사납게 달려드는 멧돼지. 고구마 밭이나 뒤지고 밭 한구석 한적한 묘똥이나 후비는 그런 졸물이 아니다.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전국의 농민과 천대받는 백성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그런 기세다. 고부관아 정도가 아니라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호기가 바람을 가른다.

  고난의 거친 손 잡으리니 일어나소서
  평화의 나비로, 역사의 신으로 부활하소서
  당당한 부안의 딸 그대여

유명 시인만 시인인가. 진실이 담기면 만인이 시인인걸! 기억에서 살아진, 기억에서 지우려고 발광하는 안팎의 사나운 발악을 물리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어린 소녀들의 군무로 이어져 서쪽 조그만 동산을 둘러싸고 그 뒤를 따라 10여명의 ‘높은 사람들’이 동상을 가린 하얀 천 끝 양쪽을 붙잡고 늘어선다. 호명하는 누구 누구 나오시오, 하나둘 셋 하면 줄을 당기세요, 하는 식의 고성능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관청식 잡소리는 없다.
이래서 우리 부안의 소녀상은 여느 다른 소녀처럼 처량하게 앉은 소녀상이 아니었다. 울밑에 선 봉선화가 아니었다. 역사를 기억해 내고 다시는 그런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을 저 멧돼지의 억센 기상으로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 부안의  소녀는 서서 외친다. 당신들이 외치지 않으면 내가 외치겠다고. 이것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성황산을 받치고 있는 암반 위에 창조해야 할 자유와 평등 통일에의 염원을 새롭게 다짐하는 새로운 역사의 원형을 세운 것이다. 이 원형이 다른 곳 아닌 부안군청과 부안군의회 앞에 작지만 의연하게 세워졌다. 부안의 축복이다. 부안사람들이 뿌듯하게 자랑할 만한 문화를 오늘 창조한 것이다.

유재흠이 직접 그린 그림. 소녀상을 세우기까지 크고 작은 일을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한 데는 부안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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