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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꽃91-계화도의 현대사를 들추어보니-3

계화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이곳에서 출토된 신석기유물이나 곳곳에서 패총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빗살무늬 토기파편들이 수습되고 어패류를 얻기가 좋은 곳이라서 조개묻이가 많이 발견된다. 역사가 오랜 이곳도 고려 말 부터는 섬을 비우라는 정부의 공도(空島)정책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데 해안가나 섬 사람들이 왜구와 결탁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화도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정부의 정책에 반하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컷을 것이다. 계화도 뒤쪽 바다와 고군산도 사이가 서해항로여서 계화도는 왜구들의 피해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알릴 행정 주체가 없었다. 이곳에는 수군이 주둔했다는 기록도 없어서 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곳이었을 것이다.
이런 계화도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것은 한국전쟁 이후이다. 해방 후 냉전이 계속되면서 이곳은 북한 간첩선의 침투가 용이한 곳으로써 침투한 간첩과 경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2001년도에 계화도에 갔을 때 하리 들어가는 곳에서 왼쪽 둑에 있던 초소를 사진에 담았다. 철조망과 초소가 있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어떤 사람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경고이다. 당시에 이런 장애물을 뚫고 들어온다면 북한 간첩일 수가 있다. 요즘 계화도에 자주 가는데 살끔 공동묘지에 북한의 공작원 안내자들이 묻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증언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안내자가 둘이었다고도 하고 한명이었다고도 하나 이곳에서 대치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인데 1959년의 일이다. 이들이 공작선 모선을 타지 못하고 계화도에 고립되자 살끔의 새로 만든 묘를 파고 들어가서 기다리며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찰의 포위 속에서 자수하려는 사람과 자폭하려는 사람 사이에 실랑이로 둘 다 자폭으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 후 이들은 이곳에 묻혔는데 무덤은 찾을 수는 없다고 한다. 평장을 했기 때문이란다. 고삼곤의 책에는 이들을 북한의 주준정과 김정태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부안은 해안선이 많다. 이곳에는 전투경찰이 있었고 해안가는 철조망이 바닷길을 막았다. 곳곳에는 초소가 있어서 바다로 침투하는 적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은 철조망과 초소들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변산 쪽에 가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한국전쟁이 많은 희생을 남기고 끝났지만 냉전으로 인한 남북의 정세는 첨예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60~70년대에 학교를 다닌 필자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산 것 같다. 간첩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가관인 것은 선거 때가 되면 갑자기 붙잡히는 간첩들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왜 이런 희생을 당하면서까지 내려오는가가 궁금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학생들은 6월 달이 되면 반공 웅변대회, 반공표어 쓰기, 궐기대회 등에 몰린다. 표어 중 하나는 ‘우리동네 간첩있나 너도나도 살펴보자’는 것인데, 이웃사촌도 한번쯤 의심하라는 얘기였다. 군에 가서도 아침마다 외치다 보니 지금도 입에서 논다. ‘때려잡자 000 무찌르자000 이룩하자 유신과업’ 외칠 때마다 남북현실이 슬펐다.   
남북대치는 휴전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대치가 분단에서 멀리 떨어진 듯한 계화도 현대사에도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젠, 전쟁무기를 녹여 논을 갈 보습을 만들고 평화를 화두로 삼아야 할 때이다. 남북대화의 진전이 있기를 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긴 호흡으로 남북 관계를 보며 민족통일을 앞당겨야 할 것이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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