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76원 밑천, 총장 얼굴 보고 카이스트에 350억

내 손으로 밥 먹는 게 얼마나 큰 복이냐며 ‘기부 바이러스’를 설명하는 김병호 박사.   Ⓒ 장정숙

탈출

식구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어머님 몰래 미영베 보자기에 옷가지 몇 개를 쌌다.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으로 갔다. 잘 휘어지는 대나무 하나를 잡아 그 끝에 보자기를 묶었다. 그리고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옷 호주머니 속에는 보리 타작 폼삯 760환이 들어있었다.
정작 집을 뛰쳐나온 것은 그 며칠 뒤 음력으로 5월 단오날이었다. 남의 집 일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소년은 점심 차려주려는 어머님의 말을 사양한 채 얼른 손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대나무 숲으로 가서 며칠 전 매달아 놓은 보자기를 내려 손에 들었다.
“어머니, 저 서울 가요! 돈 많이 벌어올게요.”
“안 된다, 안 되어, 병호야!” 하며 어머니는 소리쳤다.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원상림 마을(부안군 보안면)에서 정읍까지는 40리 길, 초행길이지만 그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다. 보자기 속에 760환(통화개혁 전)의 서울 가는 기차표 살 돈이 있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나온 열댓 살의 ‘소년 가장’. 아버지는 무슨 일이 바쁜지 한번 집을 나가면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5남매의 맏이, 어머니가 믿고 의지 할 자식은 맏아들 밖에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소년은 어머님의 기대를 거슬렀다. 눈 뜬 놈 코 베어가는 서울인데 이 촌놈은 무슨 궂은일을 하든 배고픈 설움은 면할 것으로 여겼다. 하루 한 두 끼로 끼니를 이었다. 전차 탈 돈이 아까워 뛰어서 배달했다.

보안초등학교 졸업사진(지금은 학생 수가 적어 폐교)

350억을 한꺼번에

지난 4월 초 김병호 박사 내외분을 수원 시내 음식점에서 만났다.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선 듯 기부하시게 됐습니까, 카이스트와는 특별한 연고라도 있는지.
“제가 참 외로운 사람입니다. 천지 사방 살펴봐도 특별히 빚진 일도 없고 보살펴 주어야 할 연도고 없어요. 학교를 다녔어야지요. 또 무슨 직장에서 월급쟁이를 했어야지요.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깐 내 돈이 한 몇 백억 된다는 겁니다. 그래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나보고 보람 있게 쓰라는 돈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상해요. 내가 가톨릭이지만 신앙이 깊은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사회 환원’이다 뭐다 하는 말은 누구다 누구다 하는 재벌이나 하는 일로 알았지요.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는데 카이스트 총장이라는 분이 나오데요. 서남표 총장이래요.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나라 ‘대학다운 대학’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세계 최고의 대학, 과학기술 클러스터 만들어야겠다, 이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 이런 분 같으면 내가 가진 돈을 다 맡겨도, 기부해도 헤프게 쓰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대중음식점‘꼬막’집에서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가야겠다며 준비해 온 그릇에 담고 있는 부인 김삼열. Ⓒ장정숙

-흔히 서울대학이다, 고려대, 연세대를 쳐주는데 카이스트를 택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 때 다른 대학 총장이 나와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혹 그쪽으로 미음이 쏠렸을지도 모르지요, 허허”
그는  실상 서남표 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버렸다. 총장으로서 그 추진력이며 카이스트 학생들이 유태인처럼 강인한 것에 끌렸다. 아내에게 상의하고 나서 서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기부 대상 토지는 서전 농원 토지 약 2만여 평, 마평리 토지 약 4천 평, 2009년 8월, 지금부터 꼭 10년 전이다.
-그 전에도 부안장학재단에도 큰돈을 기부 하셨습니다.
“그건 뭐……”
-어떤 연고로 하시게 됐는지
김병호라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로 소문난 것 못지않게 ‘짠 사람’으로 알려졌다. 평생 먹을 만큼 번 부자 정도가 아니라 몇 백억이 되는지 모를 ‘큰 부자’로 소문났다. 짜기로는 어느 친구 경조사에 표 나게 봉투를 내는 일이 없었다. 실업테니스 연맹회장이나 재경부안 향우회장, 변산산우회장을 지냈지만 선출이나 추대된 자리다. 그런 자리라 해서 듬뿍 듬뿍 돈을 쓰지 않았다. 부인이나 외아들인 자식에 대해서도 이런 절약, 절제는 몸에 배었다. 수백억을 학교에 기부하면서 서울대학을 나온 외아들에게는 종로에 있는 20여평 되는 2층 건물 하나를 주었다. “아들아, 너에게는 줄 돈이 없다”면서. 아들은 해외에서 커피 만드는 공부를 해서 찻집을 경영하고 있다. 그 집마저 아버지는 세를 받고 있다.
어느 날 김종규 부안군수가 쾌유를 빈다는 리본이 달린 난 화분을 들고 수유리 김 회장 집으로 찾아왔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몇 달 동안 의식불명이던 몸이 겨우 목발 짚고 부축 받으며 거동하던 무렵이었다.
“혹시 우리 부안에는 밥 굶는 아이들은 없습니까? 그런 아이들 점심 값이라도 보태주었으면 하는데.”
한쪽 팔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하는 장애인 김병호가 먼저 제의했다,
“정 그런 뜻이 계시다면 학생들 장학금을 주면 어떻겠느냐” 해서 만든 것이 부안군 나누미근농장학재단이다. 근농(根農)은 김회장의 아호다. 이때 현금으로 10억을 선뜻 내놓았다. 처음 한 달은 1,000만원씩 내기로 했다가 아예 3억을 내고 수유리 살고 있는 집 팔아서 7억을 보태 10억의 기금을 만들었다. 지금 근농장학재단은 한 달에 만원씩 수 천명의 ‘개미 기부자’ 외에 수백만 원을 내는 기부자들이 줄을 이어 기금은 200억 이 넘는다던가.

김병호, 김삼열 내외가 기부한 350억원을 들여 만든 카이스트의 IT융합빌딩.

'기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에게 스스로 고개가 숙여진다. 주인공의 표정이 한결 밝다.
-어떻게 그런 좋은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언제 부터인지?
“누구한테든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고 우리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저는 보통 가난한 게 아니라 아주 찢어지게 가난해서 누구 개인한테 신세질 처지도 못 되었어요.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는 6.25 직후라서 학교에서 분유를 주었어요. 아주 가난한 아이들만. 집안 식구들이 다 굶는 처진데 나만 먹을 수 없어서 그 분유통을 들고 집으로 오면 다들 좋아 했어요. 지금 사람들은 그런 처참한 처지를 짐작도 못해요. 그래 나도 돈 벌면 가난 구제는 못해도 배곯는 것만은 면하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으셨다구요. 그리고 카이스트 재단 이사이시고.
“다 과분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게 그냥 명예로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밥값을 해야지요, 명예 값을 해야지요. 바로 제 집(노블카운티 실버타운) 옆이 경희대 국제대학원이 있어 틈나는 대로 강의도 하고 경연도 하고 좌담도 하고 재능기부를 하지요. 또 만나는 분들은 저를 잘 알만한 분들이어서 이분들이 카이스트는 물론 당신이 기부하고 싶은 대학이든 연구소든 큰돈을 기부하고 있어요. 아마 400억이라던가 450억이라던가. 저 보고 ‘기부바이러스 전도사’ 라고 해요.”
공명을 위해서 세금 탈세를 위해서 재단을 만들고 기부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뇌졸중으로 사경을 헤매던 70노인이 ‘제2의 인생’을 남을 위해 살고 있다.
“저도 미국에 가서 치료도 받고 공부도 해야지요. 필요하면 전용기라도 타고 말입니다.”
눈부시게 발전하여 인류의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현대의학은 전자기기에 날개를 달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거기에 대비하는 것이 김병호 박사의 꿈이다. 부인 김삼열은 김박사보다 9년 아래, 1950년 순천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호는 동원(桐園). 봉황은 오동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 호 하나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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