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여성농민운동 대부, 50년을 하루 같이

여성농민운동의 대부 엄영애 여사, 당당한 풍채다. ⓒ이인기
여성농민운동의 대부 엄영애 여사, 당당한 풍채다. ⓒ이인기

돈지 탁아소 개척, 부안 40년  

부안 평화의 소녀상 사무국장 유재흠을 만나러 하서 웃돌마리(석상) 유국장 집에 갔다가 길가에서 그의 부인 임덕규를 만났다. 이야기 이야기 하던 끝에 이 부부가 어떻게 이곳 부안에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엄영애 선생이 계신다기에 왔다는 것이다. 엄영애? 서울 사람이란다. 이 분을 찾아 부안까지 오게 된 임덕규는 경기도 사람이고 그 여성이 있는 곳을 찾아온 사람이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남편 유재흠이다. 부안에서 농민 운동하는 활동가 셋을 놓고 필자가 헷갈리는 건 다름이 아니다. 농민 운동하면 의레 부안 토종이겠거니 생각해 온 선입감 탓이었다. 유재흠-임덕규 부부의 인터뷰를 뒤로 미루고 먼저 엄영애 할머니를 찾아뵙기로 했다. 두 분의 안내로 80세의 할머니를 게화면 돈지 엄여사 집에서 만났다.

오 건이가 있다기에

엄여사는 1939년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나셨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한창 꿈속의 소녀시절이 한꺼번에 날라갔다. 효제동이 집이어서 집 근처 효제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 6.25를 겪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폐허가 되다 시피한 서울은 자기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대구에서 여고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곳도 대구였다. 농민을 알게 된 것은 독일이었고 여성농민을 위한 활동가 교육과 훈련을 받은 곳도 독일이다. 서울과 대구 외에는 어데 가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어떤 연고로 어떻게 부안하고도 돈지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어떤 연유로 부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까?
“80년대 말이던가 전국농민회총연맹 부회장 일과 전북여성단체 연합 상임의장을 맡고 있었어요. 부안 격포 옆 도청리에 오건-이조희 씨 부부가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들과 진짜 생활을 같이하며 산다는 거예요. 오건이라는 사람은 그 무렵 처음 알게 되었지만 그 분의 아버님 오영수씨는 우리나라 문단에서 아주 존경받는 분 아닙니까.
오건 선생을 만나 뵙고 감격했어요. 나도 현장에 내려와 일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거지요. 부안읍내 청과시장에 방 하나 얻어 지냈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법도 없었어요. 입으로만 외쳤지. 선생님 알다시피 농민운동 특히 농촌 여성운동은 1930년대 소설에나 나오는 주인공 이야기 정도지 실제로는 없었던 거 아닌가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농민운동이 성과를 올리려면 여성이 참여해야 하고 더구나 여성의 영유아를 키우는 육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우선 그런 시설을 하자면 논이나 밭, 바다가 있는 현장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침 돈지에 있는 남쪽에 양지 바른 마당이 있는 허름한 집, 18평 되는 집이 있어 그만 하면 되겠다 싶어 거기에 유치원이랄까 탁아소랄까 이런 걸 만들었어요. 부안 성당을 비롯해서 여러 교우들이 도와주셔서 이루어 냈지요. 저도 그 덕에 처음으로 집을 갖게 되고. 그냥 열 명 안팎이 내 식구지요. 낮에만…… 93년이던가.“
-가족은?
“쭉 혼자 살았어요.”
-좀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궁금한데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신지.
“어쩌다 결혼할 시기를 놓쳤어요. 그 뒤엔 일이 바빠서. 선교를 위해 독신으로 지내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계시는데 농민 위해 결혼 않는 것이 도리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마음도 편하고……”
심각하지도 않고 수줍어하거나 우쭐대는 일 없이 그저 남의 이야기 하듯이 담담한 표정.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여성농민운동 익혀

이 소형승용차는 실상 화물 겸용이다. 비료도 싣고 농기구도 싣고 아이들도 실어나르고. 독일의 실용주의가 몸에 밴 만능 할머니다. ⓒ장정숙
이 소형승용차는 실상 화물 겸용이다. 비료도 싣고 농기구도 싣고 아이들도 실어나르고. 독일의 실용주의가 몸에 밴 만능 할머니다. ⓒ장정숙

-독일에 가서 공부 하셨다구요? 무슨 공부를 몇 년이나 하셨는지?
“66년부터 독일에 한 5년 있었지요. ‘베네딕토회’라고 선교를 목적으로 한 농촌지도자 학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사람이 갔는데 끝까지 남은 건 저 하나였어요. 나와서 아시아 지역 콘덕터, 말하자면 본부와의 연락 책임자랄까 조정자랄까 그런 직책이지요. 홍콩, 필리핀, 인도 같은 나라에 가서 일 했어요. 아시아 지역에선 이런 운동하는 분이 적어요. 그래 뒤엔 이런 인연으로 전농 국제담당 부회장이라는 감투를 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든 독일에서 배우고 실천한 여성농민 운동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넓히게 되었으니 그걸로 기여라면 기여겠지요.”    
-농민 운동, 그 가운데서도 남들이 선 듯 나서지 못한 여성농민운동 하는데 애로랄까 장벽이랄까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일에 바빠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요. 그런 건 정책을 세우는 분들이나 학자들이 할 일이겠지요. 또 그때하고 지금하고는 상황도 많이 달라졌고요. 한 가지 물으시니까 생각나는데 그때는 이념 투쟁이랄까 농민이나 여성의 지위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데 비해 오늘의 상황은 직업적 농민운동, 직업적 여성운동이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싸우고 부닥친 문제는 WTO 체제에서 농민의 존재 의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지요. 사실 그 문제는 만족스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김대중 정부 때 큰 틀에서는 웬만큼 얻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고.”                            
아주 차분하면서도 용어 선택이 갑자기 전위적인 이론가다운 톤이다. 한 30분 남짓 이야기 하는 가운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말로라도 하나님의 은총이라든가 은혜라든가 하는 말을 할 법한데 주의 깊게 들어도 그런 말은 절제되고 만다. 상대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할 법한데 한마디도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흔히 텔리비젼이나 신문, 시중의 이러쿵저러쿵 하는 이야기는 서로 입 밖에 뻥긋도 하지 않았다. 엑티비스트(활동가)의 모습이랄까, 아니 내가 생각해온 성자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그토록 속기를 말끔하게 씻어 낼까.

한국여성운동사 집필, 자료집으로 압권

한국여성농민운동사-'농민생존권 위기와 여성농민의 조직적 투쟁'이란 부제가 있다.

스물 네 살 때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독실한 카돌릭. 지금도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한 10킬로 떨어진 부안 읍내에 있는 본당으로 차를 몰고 나간다고. 농민운동 가운데도 특히 여성농민운동의 개척자이자 지도자의 한사람인 이 할머니는 67년에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도 4X6 배판 670쪽이 넘는 방대한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썼다. 자료와 이론에 있어 가히 압권이라고 한다. 소 값 폭락에 항의하여 부안에서 소떼를 몰고 600리 서울까지 쳐들어간 소몰이 투쟁을 이곳 부안의 농민들과 함께 한 문규현 신부는 이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여성농민운동을 빼고 농민운동을 생각할 할 수 없다. 농민 운동을 제외하고 가톨릭 운동사를 쓸 수 없으며 가톨릭 운동사 없이는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를 결코 써내려 갈 수 없다.”
전 한국농민회총연맹 이수금 의장은 “수많은 여성 농민들이 투쟁에 참여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았던 크고 작은 활동들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크게 치하하였다.

생명의 신비

생명의 신비, 계란 하나 하나를 넣은 달걀판을 조그만 화분으로 활용했다. ⓒ장정숙
생명의 신비, 계란 하나 하나를 넣은 달걀판을 조그만 화분으로 활용했다. ⓒ장정숙

거실에서 씨앗을 티운 꽃씨가 새 혓바닥만큼이나 삐주죽 나온 것을 양지 바른 남향 출입구 한쪽에 손수 만든 반 평 정도의 온상에 옮겨 심고 조그만 조로로 물을 주시던 선생은 넌지시 혼자 말처럼 말했다.
“볼수록 생명이란 것은 신비로워요. 흙과 햇빛과 바람만 있으면 몸부림치며 솟아요. 어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사람끼리도 이렇게 뻗어나는 생명을 보살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는 이 솟아나는 생명을 보는 것이 기도보다 더 좋아요.”
나는 하도 감격하여 엉겁결에 흙 묻은 목장갑 낀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쥐며 가겠다고 인사했다.
“저도 이제 새 일을 시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80 후반인데도 저렇게 나이를 잊고 치열하게 일하는데 거기 비하면…… 나이 핑게 대고 하다 만 일을 새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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