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벚을 사진에 담고자 하여도 분위기를 넣을 뿐 꽃을 세세히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꽃은 작고 한꺼번에 다투어 피어버리니 풍성한 송이가 되어 한 잎 한 잎 가려내기도 그렇다. 하얀 꽃 대궐을 이룬 벚꽃 길을 걷는 것만도 좋은데 거기다가 하늘거리며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행복 더하기다. 부안에서는 격포 가는 길목의 마포 삼거리 벚꽃이 좋았다지만 도로를 넓히면서 벚나무가 사라졌다. 최근에는 개암사 벚꽃과 내변산의 청림 벚꽃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 개암사 벚꽃 축제는 상서면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이룬 성과이니 소리 나지 않고 소박하여 입 소문만으로도 찾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다.
  소박한 동네잔치처럼 이루어지는 이런 축제들이 있다면 옆 동네 마실 가듯 편하게 갈만도 하다. 그러나 어떤 축제든 사람잔치가 되다 보니 관광차들이나 자가용의 주차와 쓰레기 처리로 몸살을 앓는다. 먼데다 차를 대고 좀 걸어 보는 것도 좋으련만 행사장 바로 코앞이 아니면 안 된다는 차가진 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고집이 있다.
  개암사 벚꽃이 다른 지역과 다른 것 몇 가지가 있다. 재일교포인 이상균씨의 경제적 지원으로 나무를 심을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다. 고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실천이 그의 사후에야 드러나기도 했지만, 저 벚꽃을 보면서 이상균의 뜻도 함께 기리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그는 일본에 살면서 본토백이들의 질시와 무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업을 일구어 성공했고 조국 사랑을 실천했다. 부자가 돈을 쓰는 것은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마음의 깊이가 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주변에는 돈 좀 벌었다는 졸부들이 거들먹거리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데만 골몰하는 사람들이 쌔고 쌨다. 죽을 때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입에 올리기는 하면서도 자녀에게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별의별 탈법을 다 저지르는 사람들을, 저 이상균의 벚꽃이 부끄럽게 한다.
  개암사 벚꽃은 개암사라는 역사 깊은 사찰과 함께한다. 절집 앞에는 조화를 이루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동안은 닭 요리하는 음식점이 성해서 어쩐지 절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봤다. 벚꽃을 찾는 여행객들이 개암사라는 사찰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역사 깊은 절집에 이끌리고 입길에도 많이 오르내릴 것이다.
  셋째는 개암사 저수지와 하나 되는 벚이다. 사진하는 사람들은 벚꽃이 물속에 빠져드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할 것이다. 산 그림자와 함께 하는 벚이요 그 밑에는 벚을 담는 물이라니,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지 않은가. 마지막은 개암 벚이 오래 전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백제 부흥군은 이곳에서 신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국제전쟁을 벌였다. 백제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그 의지는 무너지고 생명은 벚꽃처럼 장렬하게 떨어진 이곳에 항전지인 주류성이 있다. 여행객들이 백제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당나라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강고한 저들의 뜻을 알게 된다면 크게 놀랄만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조선의 학교나 길거리 등에 벚나무를 심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우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일본의 꽃을 꼭 보러 다녀야 하나”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왕벚나무의 시작은 제주도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또한 일본 황실의 상징은 벚꽃이 아니라 국화(菊花)라는 것도 새길 만 하다. 그러고 보면 꽃에다가 화풀이 할 일도 그렇다. 나쁜 꽃 좋은 꽃이 어디 있으며 말 못하는 꽃에다가 이데올로기라는 굴레를 씌우기도 뭐 하지 않은가.
  아무려나 이번에도 여전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관광객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을 상서분들의 수고에 미리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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