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가방 끈 짧으면 어때” 부안 읍장 한자리만 20년

한자리 20년의 기록을 남긴 부안읍장 김봉술. 훈장다운 훈장.

복이 많은지 ‘빽’이 좋은지

부안읍장 한 자리에 꼬박 20년을 일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1967년 10월 산내면장 발령을 받은지 1년 반만에 행안면장이 되었다. 행안면장 4년반 만에 일약 부안읍장으로 발탁된다. 1973년 1월이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더구나 나이 스물 다섯이 되어서야 고향인 주산면사무소 촉탁으로 들어간 사람이 이렇게 승승장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아, 거 봉술이 복이 많은 사람이어, 거 상을 봐, 이마박이 훤출하게 트이고 눈이 툭 튀어 나온 게 한자리 하게 생긴 상이란 말이어.
-그래 그래, 박정희가 공화당을 사전 조직할 때 면서기 그만 두고 거기 들어갔어. 뒤에 재건운동 주산면 촉진회장 감투도 썼어. 다 ‘끌텅’이 있어.
나 같은 사람도 수 없이 들어온 소리였다.
장본인 김봉술(金鳳述 1931-) 선생을 전주 전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봄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3월 20일 저녁.
-저는 회장님으로 부르는데 다른 분들은 뭐라고 부릅니까.
“읍장이라고 불러, 읍장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게 그거지.”
-이병옥 의원 덕에 출세했다던데?
“별 말을 다하시오. 그 양반이 오래 국회의원 했고 또 부안 일도 많이 하시지 않았소. 부안읍내 일은 내 일이 그 양반 일이고 국회의원의 지역구 일이 읍장 일 아니겄소?  다 같은 일인데. 김의원 앙 그리여?

김대중 대통령 예방. 1990년대 후반

급수도 없는 촉탁

논 한필지 1,200평, 밭 한 마지기 200평 밖에 없는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농사철이 되어도 힘지게 일할 꺼리가 없었다. 초등학교마저 학령보다 4년이나 늦게 들어간 데다 나오는 것도 역시 그만큼 늦었다. 그럭저럭 훌쩍 7-8년이 지났다. 한일 없이 나이만 먹어 스물 다섯이 되었다. 그에게 길을 터준 사람이 주산면의회 의장 박봉수였다. 그때 처음으로 도의회와 함께 면의회가 생겼었다. 면의회를 없애고 군의회가 생긴 것은 훨씬 뒤다.
아마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무렵이었다. 주산면의회 박봉수 의장이 좋게 보았던지 넌지시 면서기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연고가 없이는 꿈도 못 꾸는 자리였다. 알고 보니 말단 촉탁으로 우선 들어갔다가 기회가 생기면 제대로 면서기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며 젊은 사람 장래를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김봉술의 나이 몇 살인가. 스물 넷이다.
“생각해보지요” 자기를 배려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면장이 아닌 다음에야 자기 장래가 그 분 말대로 그렇게 밝게 만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여, 지금 자네가 쌀밥 보리밥 챙길땐가, 촉탁이고 ‘꼬쓰까이’(급사)고 가봐, 면장한테 이야기 해놓았으니까.”
초등학교 때는 그저 슬슬 해도 성적은 첫째 둘째였다. 하지만 정작 졸업할 무렵에는 애초부터 상급 학교에 진학할 처지가 못 되어 그렁저렁 보낸 터였다. 1945년 3월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몇 달 뒤 8월에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없던 땅이 생기나, 취직자리가 생기나, 중학교 갈 형편이 되나, 세상은 독립의 열풍에 휩싸였고 난데없이 38선이 갈라지자 주산 같은 시골에서까지 좌익이다 우익이다 해서 어디론가 붙어 편이 쫙 갈라졌다. 만석군 부자 김상기 같은 사람 말고도 누구다 누구다 하는 몇 백석 몇 천석 한다는 부자들이 유독 많은 곳이 주산이엇다. 이런 부자들의 우익 틈새에서 좌익도 만만치 않았다. 청년 김봉술은 오라는 사람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다.
마침 자기가 사는 마을 사산마을(뉘영매)에 구학문은 물론 ABC도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생겼다. ‘신구학문학원’이라고 했다. 학생은 농번기에는 7-8명이 되기도 하고 겨울 같은 농한기에는 열 댓 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여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갓 초등학교를 나온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교다. 면의회 의장이 자기에게 면사무소 들어가라고 추천한 것도 아마 이때의 명성 탓이 아니었을까 그는 짐작했다.

부안향교 전교 시절

읍장 가운데 최초로 훈장 받아

어떻든 그는 말단 행정기관 치고도 맨 끝자리 급수도 없는 자리에 의자 하나 갖다 놓고 앉았다. 자기 같은 촉탁 포함해서 7-8명이었다. 취직한지 한 2년 되었을 때 민선 면장 김종섭씨가 재무계장을 하라 했다.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중학교 문턱도 가본 일이 없는 ‘신출내기’에게! 하지만 그의 정확한 행정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뒤 그는 운 좋게도 면서기 시험에 합격한다. 면서기 8년에 여러 계장을 두루 거칠 때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났다. 그는 ‘공화당’에 참여하고 이른바 ‘재건국민운동’ 주산면 촉진회장의 책임을 맡아 6년 동안 여당표를 모으는 현장 책임자로 활동한다. 그 논공행상으로 산내면장 1년 8개월, 행안면장 3년 7개월을 거쳐 일약 부안읍장 발령을 받는다.
-어떻게 된 거지요?
“행안면장으로 있을 땐데 마침 도에서 심사가 나왔어요. 군수랑 다른 과장이랑 많이 참석한 회의장에서 담당과장이 ‘이런 사람 읍장 시키면 어떻겠느냐 했어. 얼마 뒤 읍장이 되었어.” 
여기까지는 두말 할 것 없이 흔한 말로 공화당 빽이오, 여당 국회의원의 신임 덕으로 볼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래 심줄이 아닌 담에야 어떻게 20년인가. 
그런데 충성스럽고 아첨하기로 하면 기고 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왜 김봉술이 그 좋다는 자리를 독점하게 되었을까. 그 동안 군수 여섯 사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박정희부터 김영삼까지 다섯 사람이 바뀌었다. 그만큼 격동의 시절, 읍장의 모가지 하나쯤이야 태풍 속의 돛단배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제의 공이 오늘 허물로 지탄 받기 십상인 세태였다.
전두환 정권 말기 쯤이던가, 지역구 여당의원이 군수에게 읍장을 갈아 치우라고 넌지시 이야기 했다. 군수는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인데 봉술이가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며 지사님께 말씀드리라고 우선 넘겼다.
“그 사람 공화당 사람이라던데 오래 했으니 어때요, 한번 지방과장이 타일러 보세요”
지사의 말에 지방과장은 한술 더 떴다.
“얼마 전에 지사님께서 부안읍장 최고라며 표창 상신하라 해서 내무장관 표창까지 받도록 해주신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공화당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말이 많은 모양이고……”
그 내무과장은 이때다 하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공화당 정도가 아니라 자유당 때부터 민주당을 거쳐 지금까지도 좋은 자리에 그대로 일을 하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꼭 그 사람 부안읍장 사표를 받아야 한다면 제 사표를 먼저 내겠습니다.”
아, ‘공직’이라는 것이 공무원법이 저절로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쿵 저러쿵 주변의 말이나 압력에 흔들리지 않는 상사가 지켜주는 것인가!
1992년 6월 30일  부안읍장 김봉술은 만 60세의 정년을 맞았다. 1953년 면사무소 촉탁으로 들어와 두 군데 면장 6년 남짓을 빼고 20년을 부안읍장으로 일했다. 공직 40년 이었다. 퇴임 날짜에 맞추어 그의 어깨에는 녹조근정훈장이 걸쳐졌다. 읍면장한테 이런 훈장이 수여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90 나이에도 또박 또박 쓴 자필 이력서
정년퇴임을 톱으로 다룬 중앙일보 기사

 공자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읍장의 전 반생은 말 그대로 찬란하였다. 사람들은 후 반생 또한 그에 못하지 않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김봉술은 가만히 앉아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디는 사람이다. 공직 퇴임 얼마 전에 흥무왕 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보령서원’의 도유사, 가락 부안군 종친회 회장을 맡는다. 총무의 한사람으로서 김태진 회장을 도와 사당의 개축과 신축을 진두 지휘한 공이었다.
-그런데 성균관 전교는 어떤 연고로 되셨습니까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향교의 ‘전교(典校)’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학식과 덕망은 물론 원로들이 추천하는 자리인데 이 원로들은 문벌이 다 대단한 분들이지요. 그런데 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향교 출입한 분도 아니고 우리 씨족을 대단하게 아는 처지도 아니고. 말하자면 읍장 20년 한 덕이랄까. 아침 일찍 읍내 골목골목을 누벼요. 빗자루를 들고 삽을 들고. 내 별명이 뭔 줄 모르는구만. 청소반장이오, 청소반장. 공자님 제사 지내고 부안의 ‘양반들’이 다 모이는 향교를 정갈하게 해드리는 것이 읍장 일이지요.”
-공자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한 두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삼강오륜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명심할 것이 효(孝)지요. 명심보감에 나오는 ‘효행편’을 틈 나면 보세요.“
90살 노인이 86세 기자를 만나는데도 그는 준비를 꼼꼼하게 챙겼다. 간단한 이력 몇 줄 적어 주시면 인터뷰에 도움이 되겠다고 이틀 전에 전화로 말했었다. 이 양반은 인사 서식 용지 3페이지를 가득 메운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고 도장까지 찍은 문서를 봉투에서 꺼내 주었다. 글자 한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기자는 검정 불펜으로 또박또박 눌러 쓴 글자 한자 내려다 보고 얼굴 한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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