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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 사람 10>항일 혁명투사 백정기(白貞基) 의사

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부안에서 뼈가 자란 신운리 운기 사람

상해에 있는 일본 고관들을 몰살하려던 이른바 ‘6.3정 의거’ 직전의 백정기의사

잊혀진  이름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이름 석자만 나와도 당장 항일 투사를 생각하고 폭탄을 연상한다. 하지만 백정기 하면 어디서 들어본 이름 정도로 아련하다. 더구나 항일 투사 ‘백정기 의사’를 아는 사람도 그가 ‘부안 사람’임을 아는 사람은 정작 부안 사람도 많지 않다. 이름을 모르는데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1945년 8월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의 기록일 뿐 실제는 여전히 일본 총독 치하에 있었고 북위 38도선에 금을 좍 그어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된다. 징용으로 끌려가고 징병으로 잡혀간 수십만의 이 땅의 젊은이들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있었고 혈육이 있었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는 조국도 고향도 혈육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조국 광복을 위해 폭탄을 들고 권총을 들고 싸우다 죽은 순국선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상해 임정의 주석 김구였다. 1946년 7월 마침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가 묻힌 흙 한줌을  일본에서 모셔다 효창공원에 안장한다. 윤봉길 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저들의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경축 식전에 폭탄을 던져 현지 사령관 사라까와(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요인들을 박살낸 사람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윤의사는 일본 본토의 오사카 근처 육군형무소에서 총살형이 집행 되었다. 그의 유해는 그 근처 육군의 형사자 묘지(중죄로 죽은 사람을 묻은 묘지)에 아무렇게나 방치 되어 있었다. 이봉창(李奉昌)의사는 일본 본토로 건너가 이른바 저들의 천황이 사는 궁성 근처의 사꾸라다문(櫻田門)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또 천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람이다. 백정기 의사는 상해 일본 공사 아리요시(有吉 明) 등 중국 침략의 원흉들이 모이는 고급 요리집 ‘63정’에 폭탄을 던져 이들을 몰살할 계획이었다. 이봉창, 백정기 두 의사는 각기 다른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의사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처형되었고 백의사는 무기징역을 받고 같은 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 했다.

백의사 유해 봉안-1946년 효창공원. 왼쪽부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 백의사 유골함 옆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 세 의거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거의 동시에 중국 침략의 본거지 상해와 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일본 동경의 궁성에서 일어났다. 모두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이 주도한 통쾌한 사건이었다. 조선청년의 기개를 천하에 알렸다. 3.1운동의 불길이 다시 폭발했음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뼈를 묻은 유해, 흙 한줌이라도 광복된 조국 땅에 묻어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임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의 요인들은 사무치도록 느꼈다.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내리는 조선침략의 원흉이자 일본 정계의 최고 거물 이또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거사 11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 3의사를 안장한 김구 선생의 유택이 먼저 간 동지들이 누워 있는 그 효창공원에 묻혔다. 원수 일본 놈에 의해 살해 당하지 않은 그가 해방되고 정부가 선 뒤인 1949년 여름 대한민국에서, 더구나 그가 거처하던 서울 충정로의 경교장에서, 그것도 백주에 현역 육군소위의 손에 의해 암살 된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무정부 주의자(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에서 아버지 백남일과 어머니 윤옥문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용선(溶善) 호는 구파(鷗波)다. 어지러운 가정, 가나한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908년 8월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해 10월 정읍군 영원면 앵성리 조병열의 여동생 조팔락(曺八洛)을 아내로 맞았다. 두 살 위였다. 양가 모두 아버지를 잃자 전에 부모들끼리 정한대로 서둘러 혼사를 치렀다고 한다. 얼마 뒤 백파 일가는 처가가 있는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갈선 마을로 이사했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정읍군과 부안군으로 꽤 떨어진 곳으로 알기 쉽지만 그 무렵 동진 하장리와 영원 은선리는 고부 쪽으로 가는 통로, 한 30리 되는 반나절 길이었다. 부안에서 정읍으로 이사한 시기를 두고 뒷날 증언하는 하는 사람에 따라 결혼 전이라는 사람과 결혼 후라는 사람으로 엇갈린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출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그가 부안에서 난 사람임은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결혼은 했어도 나이는 못 속이는 소년이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 세 동생을 거느린 13세의 가장은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농사 지을 자기 땅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일찍부터 합방 전후의 휙휙 돌아가는 비깥 세상 물정을 어떤 연고로 보게 되고 일제 강점하의 조선에서 자기가 할 일을 확신 하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어떻든 그는 1919년 3.1운동 전에 일제에 맞서 ‘행동으로’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 봉천으로 망명, 서로 군정서의 홍범도 장군 부대와 연락 활동한다. 일황 암살을 계획, 동경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중국 북경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 단체인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 동지와 ‘정의 공보’를 발간한다.

이강훈과 ‘육삼정六參亭’ 거사
‘흑색공포단’의 테러는 적의 심장을 겨누었다. 그는 천진항에 정박 중인 1만톤 급 일본군 수송선에 폭탄을 던졌다. 일경의 주구 셋을 상해 시외로 유인하여 몰살 시켰다.
마침내 일본 공사 아리요시(有吉 明)를 비롯한 중국침략의 수뇌들이 상해로 모인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흑색 공포단은 이들 일당을 몰살할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너도 나도 하며 8명 전원이 자원하여 죽음의 길이 뻔한 마지막 선택을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추첨한 결과 백정기 이강훈 두 사람이 실행자로 뽑히고 원심창은 알선을 맡았다. 1933년 4월 17일 중국 침략의 원흉 일당을 한꺼번에 몰살 시키려는 그 찰나에 적의 습격을 받아 이들 셋은 현장에서 체포 되었다. 백정기 의사는 일본 규슈로 압송되어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1936년 5월 20일 오전 5시 부안이 낳은 항일 영웅 백정기 의사는 광복의 그날을 보지 못한 채 망국민의 한 사람으로 40살의 생을 마친다. 규슈의 육군 형무소 묘지에서 수습한 백의사의 유해가 돌아올 때 누구보다도 통한에 사무친 사람은 상해 임정의 김구 주석과 거사의 동지 아강훈 이었다.
잠잠하던 항일의 불길을 중국 상해와 적도 동경에서 다시 짚이도록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아닌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목숨 걸고 거사에 참여했던 이강훈(李康勳)은 해방 덕으로 출옥했다. 90살 까지 장수 했고 말년까지 광복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감옥에서의 유언     
백의사가 감옥에서 옥사하기 며칠 전 같은 감옥에 수감된 이강훈과 원삼창 의사에게 한 유언이 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지는 몸이 건강하니 자중자애 하여 출옥하거든 만일 독립이 안 되었으면 나를 조국 땅에 묻지 말고 독립이 됐으면 나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어 주되 무덤 위에 꽃 한송이만 꽂아주기 바란다.” (조광해, ‘구파 백정기’기념사업회 2009)
    
우리가  배울 것이 무엇인가        
백의사는 40년의 생애 가운데 거의 20년을 해외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투쟁에 바쳤다. 부안 신운리에서 나서 그 마을에서 컸으며 그 마을에서 장가를 갔다. 상해임시정부의 동지들이 해방된 조국 땅에 뼈 한 조각 흙 한줌이라도 묻고자 효창공원 한복판에 개선장군의 유해처럼 모셨다. 하지만 그가 난 부안에서 몇 사람이나 자기 고향에서 그런 큰 인물이 나셨나를 알았을까.

정읍 영원에 있는 백의사 기념관 전경.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총사업비 44억원.

1959년 정읍 영원 면민들은 백의사 순국기념비를 세우는 추진위원회를 만들자 십시일반으로 공사비에 보탰다. 발의한 지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영원면 은선리 백의사 집터 일대에 보아란 듯이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만들었다. 정읍시에서 나선 것이 추진위 발족한지 30년도 더 지난 1996년이다.

부안 신운리 운기 마을에 있는 백의사 생가 집터. 2011년 사업비 3억 2천만원.

정작 부안에서는 어떤가. 부안군청은 2008년에야 백의사의 생가 터 복원기본계획을 세웠다. 2010년 400여평(1,480 평방미터)의 토지를 사서 그 자리에 있던 서너 채의 집을 철거했다. 이 일이 끝난 것이 2011년 3월, 특별교부세 3억에 군비 2천만원의 돈을 들였다. 지난 8년 동안 부안사람들이나 부안군청은 무엇이 그리도 바빴을까. 백의사를 알려면 서울 효창공원에 가야 하다니! 아니 부안 읍내에서 5분이면 갈 백의사 생가 마을을 놓아두고 30리나 떨어진 정읍 영원의 가념관에 가야 할까.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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