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군청 앞 본정통(本町通)에는 다양한 상업기능들이 있었다. 대서소, 인쇄소, 은행, 양복점, 음식점, 문구점, 카메라가게 등 다양한 상권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 중고생들이 드나들던 곳 중의 하나가 ‘일신모자점’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모자점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필요한 이름표를 박아주던 곳이기도 하다. 교복을 입던 우리들은 학생복에는 반드시 모자를 쓰고 이름표를 달아야하는 것으로 알았다. 아침 등교에는 규율부가 서 있는 교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름표 붙이고 목을 죄는 호꾸(교복의 목 부분을 잠그는 고리)를 채워야 하고 모자를 써야했다. 호꾸를 잠그지 않거나 모자를 삐딱하게 쓸 수 있는 것은 고학년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학생들을 군인으로 훈련하던 그 체제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여전히 통제의 대상이었고 학년이라는 계급으로 서로를 의식하면서 무서운 선배들을 머리에 두고 살아야했다.
부안의 학생들은 이름표나 모자가 필요하면 일신모자점을 찾았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거나 교통이 좋아져 인근 도시를 제집 드나들 듯 갈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부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름표를 박으러 간다는 것은 큰 각오와 모험이었다.
  나이 들어 학생 때를 생각하며 일신모자점을 들른 것은 2009년 8월이었다. 한 여름이라 더웠다. 상호 밑에는 ‘각종 표찰 명찰’ ‘각종 단체주문’이란 빛바랜 글자가 쓰여 있었다. 가게 안은 선풍기 하나가 돌고 있었고 주인은 어쩐 일이냐고 반기며 맞았다. 백사장은 이제 일을 고만두어야 한다며 사업을 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찰서와 교육청, 국민은행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본정통 상권은 죽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 본정통의 상권을 살릴만한 뾰족한 방법도 찾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일신모자점 건물은 1960년대쯤에 지어진 것인데, 학생용품인 모자와 가방을 팔고 명찰 등을 박아 주었다. 익산 출신의 이사장이 솔찬히 장사를 잘해서 부러운 상점이기도 했다. 새로운 주인 백사장은 행안면 궁안의 고성초등학교 옆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었다. 이 집을 1980년에 인수할 때 쌀 500짝을 주었으니 상당한 고가였다. 전 주인이 가지고 있던 일본산인 부러더미싱도 인수했다. 미싱은 50년 정도 된 물건인데도 실했다.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되었다. 서울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갔다. 청계천이나 동대문으로 물건하려 갔는데, 서울 사람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용케도 알아채고 냄새를 잘 맡아서 거래를 했다. 그곳에는 4~5평 쯤 되는 곳에 공장을 차려놓고 2층에는 팔 물건들을 쟁여놓았다.
80년대에 중고생들의 교복 자율화로 어려움을 겪고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 장사는 재고가 쌓이는 통에 죽는다. 유행도 변하니 재고를 팔수도 없어 내버린 것도 많고 아까워서 못 버린 것도 있다. 본인 집이라서 이득을 조금 남겨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만 아예 손님이 끊겼다. 여름 장마에는 도로가 집 문보다 높다보니 성황산의 물 일부가 쏟아지면서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그 뒤 군청에서 집들을 사들여 도로를 넓히면서 주변 상가가 사라지고 일신모자점도 뜯겨나갔다. 이름으로만 남은 곳은 원조해장국, 낭원다방, 두리치킨호프, 인쇄소(합동, 연합), 한양식당, 복지식당, 아리산(중화요리) 등이다.
부안의 중심지도 몇 번에 거쳐 바뀌고 상점들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사라짐을 계속했다. 일신모자점의 사라짐도 본정통 부침(浮沈)의 역사와 함께한다. 이곳에 있던 많은 상점들이 사라졌지만 본정통이라는 정체성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일신모자점을 찾았던 기록을 들여다보며 10년이 지나서야 게으른 기억 저편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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