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호남 장사, 경상도 풍기에서 향기 뿜어

고제신 초상. 의병장 고제신의 초상은 선비인 듯이 보이나 호남 7장사의 한 사람이었다

석불산 동쪽 노로지에 잠든 호남 장사

하서면소재지 섶못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청호를 거쳐 국도 30호선 도로 밑을 가로 질러 잠깐 사이에 노로지(노곡마을)라는 마을이 나온다. 길가 오른쪽에 모정 지붕 위를 감싼 울뚝 불뚝하게 들어난 팽나무 뿌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로마 신화속의 장사 심줄처럼 제멋대로 뻗어난 뿌리 바로 앞 안내판에는 이 나무가 400년 된 보호수라고 쓰여 있다. 모정 오른쪽으로 몇 걸음 가다 보면 앞에 계화도 간척지로 생긴 청호제가 시야를 확 트이게 한다. 덜렁 큰 봉분이 둘레석도 망부석도 비석도 없이 평평한 땅 위에 방치되다 시피 놓여있다. 앞쪽 동북쪽이 호수요, 뒤쪽 서남쪽은 석불산이다. 한눈에도 예사로운 사람의 봉분이 아닌 듯 싶은데 이게 도대체 누구의 묘일까. 그 바로 아래에 2기의 조그만 봉분이 있고 그 아래에 또 2기의 봉분이 보인다.
-저 큰 봉분이 있는 묘소가 의병장을 하신 할아버지 유택입니까?
“아닙니다. 저 큰 봉분은 저희 선대 묘래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는 맨 밑에 모시고 있고 그 바로 위는 저희 조부모님 묘소지요.”
-저 오른쪽 묘들은 누구 묘인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저희 증조부모님과 고조부모님 묘소래요.”
독립유공자의 장손 고광복(高光福 59세, 하서농협 전무)의 말이다.
역시  봉분이나 그 주변이 깔끔하다. 봉분 앞에 상석하나 비석 하나 없다.

호남 장사 고제신의 항일무장투쟁

전국 각지로 번지던 3.1만세 운동의 불길이 웬만큼 잡히던 1922년 10월 13일 동아일보 3면에 톱기사가 났다. 전남 보성의 벌교 부자 서인선을 전북 정읍의 칠보 산속 아무개 집에 잡아다 협박하여 군자금으로 1만 4천원을 빼앗았다는 기사다. 이들은 그냥 강도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던 암살단, 의열단(義烈團) 광복단(光復團)의 의사들이었다. 광주재판소에서 나온 기사다.
이들 광복의 의사 열사들은 이미 몇 년 전애 군자금 모금투쟁을 하다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었다. 암살단의 거두 한우석(韓禹錫)은 경성감옥에, 유장열(柳漳烈)과 고제신(高濟臣)은 전주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사건 전에 벌써 유장열과 고제신은 10년 징역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이들의 힘이 어느 정도이고 그 지혜가 어떠하며 그 기개가 얼마나 끈질겼는지 공판기사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요지다.
-벌교 부자 서도현이란 사람이 1916년 5월 ‘강도’에게 총 맞아 죽었다. 3.1운동도 임시정부도 나오기 전이다. 서씨 가족은 1만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경찰은 단순 강도가 아니라 의병이거나 의열단으로 보고 수사망을 전국으로 넓혔다. 헌병과 경찰의 눈은 식민지 통치의 운명을 걸만한 사건으로 보고 감시망을 좁혀갔다. 거액의 돈, 그때 1만원이면 쌀 천가마, 2천가마에 해당되는 돈이다. 지금 경제규모로 보면 몇 억 몇 십억 값어치가 있는 거액이다. 더구나 권총의 탄환으로 보아 흔히 보기 어려운 체코제였다고 한다.   그런 속에 해괴한 사건이 벌어진다. 서도현은 아들이 없어 서인선이라는 당질이 이 집의 살림을 챙기고 있었다. 이 서인선이 보성에서 2백리나 떨어진 칠보 산속에 잡혀와  75일 동안이나 감금된 된 끝에 결국 돈 1만을 가져다 주고 몸이 풀려났다. 정읍군 칠보면 사적리 김봉술 집에 감추어 두고 그 부자와 거래가 있는 군산 남일 여관으로, 평양 연광정으로, 대전 이리 황등역 부근의 산중에서 미리 연락한 사람과 접선한다. 마침내 지정된 사람을 만나 1만원을 먼저 받고 2만원씩 두 번에 걸쳐 4만원을 받기로 계약서를 받았다.
고제신은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출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부안의 고제신과 보성의 유장열, 그리고 경상도라고도 하고 서울이라고도 하는 한우석이 어떻게 의기투합하여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목숨 거는 무서운 조직에 가담하게 됐을까.

고제신 의병장의 묘(가운데) 왼쪽이 열녀로 현창된 장씨부인의 묘. 오른쪽은 가묘라고 한다

충의의 뼈, 영성군 고희 장군의 후손

고제신은 16세기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란한 호성공신 영성군의 10대 손이다. 충주성이 왜적에게 떨어졌다는 급보를 받고 부랴부랴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한 왕의 행차는 처음 며칠 동안은 왕의 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도성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의 경호와 침식을 담당하는 사람들조차 하루가 다르게 달아났다. 평양에서 의주로 가는 길엔 임금의 행차를 털겠다는 도적떼들이 칼을 들고 몽둥이를 들고 덤벼들었다. 이 위기를 막아낸 사람이 근접경호를 맡은 선전관 고희였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해 영양부족 상태인 임금에게 개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여 고완을 해드린 사람이 그 고희였다. “웬 소 갈비뼈가 이렇게 작은고...” 선조는 넌지시 물었다. “전하 !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이곳은 땅이 하도 척박하여 송아지도 강아지 만 하답니다” 시장이 반찬이다. 임금의 혀도 시장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선조 임금은 그에게 영성군의 칭호를 주어 본인은 물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4대를 군으로 봉하고 그가 자란 석불산 주변 10리를 봉토로 내렸다. 하서면의 청호리와 의복리 장신리 일대의 산기슭이 제주 고씨 후손들의 봉토가 되었다. 하서면 전체의 반이 훨씬 넘는 땅이다.
고제신(1883-1942)의 호는 백파, 자는 문경이다. 1883년 10월 27일 부안군 하서면의 청호리 30번지(지금 묘소가 있는 노곡마을)에서 아버지 항진(恒鎭) 어머니 반남 박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도 몇 대째 독자였다. 그의 아들 영상(永相 1937-1997)도 독자다. 그는 제주 고씨 집성촌에 살면서도 실제로는 외롭고 가난했다.  명문가의 후예일 뿐 논 한마지기 밭 한 뙈기도 없이 무엇으로 생계를 이었을까. 자세히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30대와 40대초의 전부가 항일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40대 말에서 50대 말까지 옥중에 있었다. 전주 감옥에서 12년의 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3년 살다 갔다. 광복 3년 전이다. 그의 혈육 영상이 네 살 때였다. 광복운동의 열혈, 영원한 청년의 기개를 가진 고제신의 얼굴이라도 본 몇 사람들은 기자에게 그 어른은 농사지은 일이 없었다고 말했었다. 농사일을 모른 어른이었다고 한다. 노로지 집 근처에  옥구 두씨네 선산 밑에 밭뙈기에 수박이나 호박 고구마 같은 걸 심어 그저 소일 하셨다는 것이다. 자주 주재소 순사(순경)가 다른 집은 빼놓고 그 집만 들러 몇 마디 말을 건네거나 휙 둘러보고 가는데 왜 그 집에만 가느냐고 물으면 ‘강도 전과자’라고 소곤거리더라는 이야기다.                   
강도 전과자는커녕 총 들고 군자금 모금 운동하던 조국광복의 지도자로 나라에서 인정받기는 1977년이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은 어디 가 있었고 그 동안 부안의 관계기관이나 마을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바빴던가.    

경북 영주시에있는 광복단 기념관

  

광복단 기념관내 광복단의 명단, 맨위 고제신의 이름 석자가 천리 동쪽 경상도 풍기 땅에서 빛난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열녀였다

고제신은 다섯 살 아래인 부안 장씨(1888)를 아내로 맞았다. 그가 남편을 만났을 때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킨 때였다. 어디로 어떻게 연관이 됐는지 남편은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오는 날이 사는 날’이었다. 칼이 없으면 식칼을 들고라도 총이 없으면 몽둥이를 들고라도 왜적을 무찔러야겠다는 의기였다. 남편이 없는 동안  장씨 부인은 노모와 시누를 보살폈다. 장씨 부인은 십 몇 년 동안을 이렇게 지냈다. 남편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자 단숨에 전주에 달려가 일본 관현에게 눈을 부릅뜨며 그 왜놈 상관에게 질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 1929년에 어용단체인 공자를 숭앙하는 이른바 ‘성공회’에서는 장씨 부인을 특별히 ‘효행이 지극한 현부인’으로 추앙했다. 남편의 묫자리 옆에 자기 묫자리도 같이 만들어 얼마 뒤 정씨 부인도 거기 묻혔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에는 ‘풍기광복단기념관’이 날개 돋친 듯 광복된 조국의 하늘에 뻗혀 의혈의 영웅들을 기리고 있고, 충청남도 계룡에는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이 학의 날개처럼 우아하다. 수십명의 이름이 새겨진 광복단원 가운데 ‘고제신’의 이름 석자가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20여명의 결사대원 가운데 ‘고제신’의 핏자국이 서려 있다. 

고씨묘 입구 느티나무. 400년쯤 된다는 하서 노곡리 팽나무 안내판은 있어도 의병장을 표시하는 흔적은 없다 ⓒ장정숙

400년 된 팽나무 한그루도 아끼는 부안 사람은 100년 전 우리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이 묻힌 묘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있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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