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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꽃86-보안면 유천서원에서 포폄(褒貶)을 생각하니

줄포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걸었던 작년 9월의 유천서원 앞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더욱 빛나고 대추 씨알도 굵어져서 찾는 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가까운 곳 보안면에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교가 있었지만 처음 찾는 학생들이 대부분 이었다.
  현대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 여럿이다. 그 중에서 옛 학교인 서원(書院)은 대원군이 없앤 이후에 다시 건립되지 않은 곳이 많다.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 중 · 고등학교나 지방 대학 같은 곳으로서, 학생들은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서원에서 글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경치 좋은 산천에 자리 잡은 서원이 많아서 가까운 산에서 운동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며 몸과 마음 모두를 수련했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세 가지로,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하는 강당, 학생들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었다. 학생들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강당인데 학생들은 이곳에서 스승으로부터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을 배우거나 토론 수업을 받았다.
  부안의 서원은 도동서원(道東書院) · 옹정서원(甕井書院) · 동림서원(東林書院) · 청계서원(淸溪書院) · 유천서원(柳川書院) 등이다. 유천서원은 보안면 원영전 마을에 있었고 1652년(효종3)에 처음 세워졌다가 1865년에 헐어서 없애는 훼철(毁撤)을 당한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200년 넘게 지역 학교로서 역할을 당당히 했던 곳이다. 유천서원은 동상(東湘) 허진동(許震童)을 배향하였고, 영조44년(1768)에 죽계(竹溪) 김횡(金鋐), 화곡(火谷) 김명(金銘) 형제가 추배되었으며, 그 후 농암(聾岩) 김택삼(金宅三)등 4현을 모셨다.
  고종 2년(1865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유천서원 역시 유허비와 함께 그 터만 남아 오다가 1999년 10월 후손들에 의해 사당만 복설되었다. 매년 4월 8일(음) 4현의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있다.
  서원에 어떤 사람들이 제사의 대상이 되느냐는 것은 향촌 사회의 큰 관심사였다. 유교사회에서 서원이나 향교에 배향되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안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 추배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포폄(褒貶)이 반드시 필요했다. 포폄이란 대상에 대해 칭찬과 나무람이고,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것이다. 한사람을 향교나 서원에 배향하려면 당시 지역의 유림들의 가혹한 평가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향교에 배향되는 한국 18현들의 면면을 보면 역사에서 많이 거론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율곡 조차 포폄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젊은 날에 불교에 심취했던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유천 서원의 4현 역시 지역 사회의 심할 정도의 포폄을 거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는 포폄의 문화가 많이 희석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면몰수 하고 일제 편에 서서 일했던 친일파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자신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친일 안한 놈 나와 봐”라고 목소리를 되려 높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우리 사회는 상식과 정의가 실종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입 다물고 중립에 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공포정치를 거치면서 피해를 당하지 않겠다는 슬픈 학습효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가치중립이란 태도가 가당치나 한 일인가. 우리 사회는 역사의 지속적이고 준엄한 포폄이 여전히 필요하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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