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너그 할애비는 '독립질' 했다 야"

 

의병장 김낙선의사의 초상(1881-1925)

난리 속의 백성

세상은 난리 속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난리였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하늘이 도와주면 겨우 입에 풀칠했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기라도 하면  목숨 잃지 않은 것만을 고맙게 여길 정도였다. 전에 없던 돌림병이 돌면 부자 형제간이 아니면 문상도 삼가 했다. 너나없이 어려운 처지라 더러 상부상조 하던 미풍양속은 살아지고 각자도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난 데 없는 왜놈들이 우리가 대국이라고 받들던 청나라를 이겨먹더니 ‘아라사’라고 불리던 러시아를 이겨먹었다고 했다. 민심은 날이 갈수록 흉흉했다. 전주 이씨의 조선은 운이 다 해서 지금 망해가는 중이고 곧 정씨 성을 가진 ‘정도령’이 등극할 것이라고 글깨나 읽은 어른들은 수군거렸다. 우리 ‘대한제국’의 상감마마는 궁궐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꼭두새벽에 한양에 주둔한 일본 군대 몇 십 명이 불한당 같은 일본 건달을 앞세워 경복궁에 쳐들어가 황후를 쳐 죽여 궁궐 안에서 꼬실려 죽이는 참변을 겪고서도 우리 왕실은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이와는 달리 위정척사의 깃발을 들고 한사코 일본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법도를 지키려는 선비의 후예들은 창북리나 돈지에서 1-2키로, 갯가에서 빤하게 보이는 부안 계화도로 계화도로 몰려 들었다. 거기에는 도끼를 들고 경복궁 대궐 앞에서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리고 이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금이 주는 어떤 관직도 받지 않던 대쪽 같은 선비 ‘간재 전 우(艮齋 田 愚) 가 있었다.  순창에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의병 투쟁을 하다 일본 현병에게 붙잡혀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는 곤욕을 겪는 수모는 항일의 불길이 거세면 거셀수록 참혹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식이 어렴풋하게나마 전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어떤 곡절이 있었기에 

거기에는 그럴만한 곡절이 있다. 전라도 고부의 서당 선생이던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관아를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고 관아를 점거, 고부는 물론 정읍 고창 무장 흥덕 부안 등  인근 수 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전주성을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공주 우금치 까지 쳐들어갔다. 구국안민 제폭구민 같은 민중의 피맺힌 절규는 청일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의 기관총으로 어이없이 슬어졌다. 그것으로 일은 끝나지 않았다. 1884년 이른바 ‘동학비적’(東學匪賊)의 토벌은 이름이야 뭐라 붙이든 10여년동안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동학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얼마며 의병으로 맞아 죽은 사람이 얼마인가. 전라도의 어느 들판, 어느 고라실에도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불울 지르고 잡아가고 죽이고 몽둥이찜질을 했다.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잘 드는 칼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관헌이 치레로 가지고 다니는 그런 칼과는 그 기능이 달랐다. 아른바 ‘동학패’나 ‘이병’(전라도 바닷가 사람의 혀는 ‘의병’의 ‘의’자 발음이 잘 나오자 않는다) 을 토벌하는데 으레 조선의 관원과 통역을 앞세웠다. 무능한 왕조는 침략자의 편이었다. 푼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밀정’은 그들에게 딱 붙어 조국을 배반했다. 아니 강자에게 붙기 좋아하는 얼간이 밀고자들은 도처에 시글시글 했다. 
부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런 선택이오,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자손만이라도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길지를 찾아 헤맸다. 혹독한 침략자, 일본 헌병에게 대드는 일은 목숨을 앗아가고 집안을 망치는 무모한 일로 여겼다. 그것이 그때 20세기 초의 풍조였다. 1905년 이른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고 사법과 경찰권을 그들에게 바쳤다. 허울 좋은 3정승 6판서는 분명히 대한제국 황제의 신료였다. 하지만 임금마저 통감부의 손안에 놀았다. 1907년 ‘거적대기 같은’ 군대나마 해산하게 되자 그래도 뼈다귀가 있는 조야의 관원이나 유생, 농사 짓는 밑바닥 민초들 까지 나라가 망해가는 정황을 들음 들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낙선의사 부인 김씨할머니(1890-1973)

의병의 길

천년 고찰 개암사 들어가는 들머리 상서 감교리 서당 훈장의 아들은 어느 이른 봄날 꼭두새벽 길을 나섰다. 며칠을 두고 밤낮 골똘하게 이럴까 저럴까 궁리하던 28세의 젊은이는 혼자서 마당에 나와 한양이 있는 북쪽에 정화수 떠놓고 임금에게 4배를 올렸다. 입던 옷, 신던 신발 그대로, 헤어진 갓이나마 단정하게 쓰고 개나리봇짐을 걸머지고  새벽길을 재촉했다. 이 젊은이는 키가 6척이라 했다. 아니 8척으로 소문났다. 기골이 장대한데다 힘이 장사였다. 가오리 818번지 본가에서 부모님이 맺어진 배필 광산 김씨를 맞아 이웃 감교리 479번지로 분가한지 얼마 뒤였다. 외동 딸 하나 남겨두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일본군과의 혈전을 벌일 항일 독립전쟁의 길로 들어섰다.
부안 변산에 장사가 있다는 소문은 의병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얼마 뒤 칠보에서 먼저 퍼졌다. 며칠 전 이 소식을 들은 장성, 순창, 정읍, 칠보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일본군을 괴롭히는 의병장 이용서의 참모장으로 발탁되었다. 괭이와 낫 밖에 모르던 그에게 30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총 열다섯 자루와 작두 같은 장검이 지급되었다. 이들은 칠보 깊은 산중에서 총 쏘는 법과 칼 쓰는 법과 함께 이른바 게릴라 부대의 전법을 익혔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을 승리로 치룬 일본 군대에 저항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판에 강 건너 불 보듯이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고 혀를 깨물었다. 의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 놈은 한 놈이라도 더 처단하자는 분노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의 성패는 하늘이 내리는 것, 사람이 할 일은 옳은 일, 의로운 목숨을 거는 것 뿐으로 여겼다. 부안과 고부, 정읍, 태인, 김제 등 작전 지역은 사방 백리에 이르렀다. 일본 헌병의 화력은 그때로 보면 주로 체코나 독일을 모델로 한 최신식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 의병의 주무기인 화승총은 말이 ‘천보총(千步銃)’이지 천 걸음은 커녕 그 명중률은 백 걸음이 될까 말까였다. 총소리가 커서 총을 모르는 사람이 질겁을 할 뿐이었다. 다만 산탄이어서 여러 사람이 다치게 하는 데는 위력을 발휘 했다. 거기에다 잘 마른 쑥을 장약으로 쓰는 장탄에 시간이 걸렸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엄청난 무기의 우열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병들은 적군을 가까이서 만나기만 하면 몇 놈쯤은 때려눕히기 일쑤였다.
의병 참모장은 마침내 태인군(현 정읍군 태인읍 일대) 남촌면 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작전하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1909년 3월 8일의 일이다. 그는 간신히 사지를 탈출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데도 다시 동지 열둘을 모아 총 8자루와 장검으로 무장 유격전을 벌인다. 그는 동진 나루 건너 김제 홍산면 내리(현 죽산)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또 다시 총상을 입고 포박 당한다. 아는 집에 점심을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일본 헌병에 의병을 밀고 한 사람은 뜻 밖에도 의병이 잘 아는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적의 포로가 된 의병장은 통감부 광주 재판소 전주 지부에서 7년 형을 받고 갇힌 감방에서 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뒤늦게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 독립선언 후인 1925년 44세의 아까운 나이로 고향 상서 감교리에서 세상을 떴다. 
1894년의 갑오 농민전쟁 이후 20여년 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죽어간 동포는 수만 또는 수십만에 이른다. 전봉준 장군처럼 ‘제폭구민’ 의 거창한 깃발을 들고 삼남을 휩쓴 장군이 있다. 최익현처럼 의병대장으로서 여러 곳에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다가 생포 되어 적지 대마도에서 단식 자결한 사람이 있다. 안중근처럼 육혈포를 들고 만주 하얼빈까지 쫓아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포살, 셰계에 조선 사람의 의기를 보여준 의사도 있다. 이들과 다른 인연을 가졌다 해서 어찌 초라한 죽음으로 치부할 것인가.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의 일념은 죽어간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고귀한 가치로 승화되어야 한다.
28세, 부안 장사의 행적은 나라가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40여년이 되고 나서도 현창은커녕 알려지지 조차 않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의병의 선봉장이 눈을 감을 때 그의 슬하에는 산둥만둥한 아내와 열 몇살의 어린 딸과 서너 살 되는 아들 하나 있었다.

상서면 감교리 27번 국도변 밭에 세운 김낙선의사의 초라한 기적비

그 이름 김낙선-“할애비는 독립질 했다.”

항일의병의 길은 참담했고 남은 가족은 가난에 찌들었다. 일본의 식민정책이 포악해 갈수록 주변에서 마저 잊혀져갔다. 아니 어찌 주변뿐이겠는가. 남은 그의 가족들 마저 독립열사의 자랑스런 행적을 전혀 모르거나 숨기려 했다. 그의 아들 판술은 그 마을 그 집터에 그대로 살면서도 집안의 내력을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들은 이야기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80 여년 동안 묻혀 있던 의사의 장한 역사가 햇볕을 쬔 것은 참으로 우연한 계기였다.
1985년 추석 때 전주에 살던 의사의 단 하나의 혈손 김성화(金聖化, 현 부안교육문화회관 관장)가 고향 감교 마을에 들렸다. 마침 당숙 김인술은 엽서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한다는 김명호라는 사람으로부터 온 엽서에는 “김낙선의 이름이 적혀있고 한말에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손이 있으면 자기에게 연락 바란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마침내 당숙은 엽서의 발신인을 찾아가 의병장으로 7년형을 받은 할아버지의 판결문을 입수했다. ‘의병’ 하면 부안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아왔던 의병의 후손의 가슴은 뛰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의병 활동을 했는지 궁금했다. 당숙은 의병장의 아내이자 자기의 큰 어머니인 수락동떡(광산 김씨)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너그 할애비는 의병질을 했다....잉”

오죽하면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장한 ‘의병투쟁’을 어떻게 ‘의병질’이라고 했을까. 그것이 불쑥 나올 말일까. 세상이 모두 외면하는 까마귀떼 속에서는 백로마자 까마귀라 한다던가. 국권을 일본에게 넘긴 황실을 비롯한 왕족은 ‘구왕실 총국’이라는 간판을 어제까지의 궁궐 안에 두고 이들을 예우했다. 심지어 장안 5개 경찰서 외에 ‘창덕궁 경찰서’라는 걸 두어 왕실의 안전을 보장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조선의 귀족과 재빨리 시류에 합류한 친일역적들에게는 엄청난 하사금과 관작을 주었다. 그들로서는 불안한 왕조 시대보다는 총독부의 물심양면의 융숭한 보호 아래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 풍조는 6백리 남쪽 시골 부안 변산의 산기슭에까지 미쳤다. 그런 속에서 나온 스스로 한탄하던 ‘자기비하의 단어’가 어느새 의사의 손자 귀에까지 박혔다. 80년 전 일본군은 조선 남쪽 농촌의 열 몇살 처녀들을 아시아의 대륙과 태평양의 여러 섬까지 끌고 다니며 ‘성노예’로 만들었다. 40년 전 이 땅의 독재자는 노동운동하던 미혼의 여성을 성고문했다. 강간을 당하고서도 부끄러워 말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약점을 30년 전 이 땅의 독재자는 서슴없이 저질렀다. 꼭 일본 놈에 붙어 사는 못 된 사람이 아니어도 그저 시류에 따라 살면 편했다.     
대한민국의 눈에는 해방된 지 40년이 지나서도 의병의 행적이 보이지 않았다. 1986년에야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1990년 애국장을 주었다. 1945년 일본 제국으로 부터의 조선 해방은 김낙선 의사나 그의 유족에겐  해방이 아니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 정부를 세우기 위해 피 흘린 사람을 외면했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훈장이 추서된 것은 거사 91년 뒤다. 한 사람의 정년퇴직한 사학자 김병호의 눈은 역사를 새로 썼다. 이 현장사업에 부안의 역사문화연구소가 깃발을 든 것도 예사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모르고 군청이 모르고 대학이 모르고 유족이나 동내 사람이 몰라서 못하면 ‘내가라도 한다’는 사람들이 부안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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