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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꽃84-100년 전, 줄포초 만세시위와 서용순
일장기가 달린 줄포보통학교 전경

3.1절 노래를 부르며

삼일절 노래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초등학교 때는 국경일 노래를 자주 부르고 동무들과 놀 때도 흥얼거렸다. 지금도 곧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노래는 열심히 불렀지만 3·1운동에 참여한 선조들의 고난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못했다. 여기에 대한 교육도 받은 적이 없고,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교과서의 막연한 내용을 그저 읽는 정도였다. 그러나 6월이 되면 갑자기 교정이 활기를 띤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되는 행진곡 풍의 6·25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학생들의 반공 웅변대회도 6월에 집중된다. ‘무찌르자 공산당’이나 ‘간첩을 잡자’는 표어도 많이 써냈다. 어쩌다 보니 우리를 35년간 노예로 지배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전쟁터로 몰아넣어 살인을 일삼았던 일본보다도 동족을 미워하는 교육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민족의 큰 아픔이지만 이제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제는 3·1운동이 아니라 혁명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얘기도 듣는다. 앞으로 학문의 성과를 쌓아가고 공감대 형성을 통해 성격 규정도 달리할 수 있겠다.
부안의 3·1만세 운동하면 줄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을 얘기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어려움을 겪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추적하지 못했다. 줄포를 들렀다가 줄포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묻고 다니는 서정일(徐廷逸)을 만나면서 그의 아버지 서용순의 삶을 어렴풋이 따라 갈 수 있었다. 
 

젊은 날의 서용순

서용순은 보안면 원영전 사람

서용순(徐龍順, 1902~1985)은 원영전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가 원영전에 있을 때만 해도 이곳은 지역의 중심이었다. 용순은 15세가 되어서야 줄포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학교까지는 걸으면 40여 분이 걸렸다. 마을 앞의 산태골을 지나 소나무 길을 따라 공동 산을 거쳐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을 했다. 키가 크고 건장하며 주변 학생들과 사귐이 좋고 설득력이 있었고 사람이 좋아 친구들과도 관계가 좋았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가 두세 살 더 먹은 김태순, 김동섭,  박기봉 등과도 어울려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기에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입학 동기 이병근과는 죽마고우였다.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사건은 1919년의 3.1만세운동이었다. 서울과 부안읍내의 만세시위 소식이 이들에게도 들려왔다. 부안군의 만세시위는 일찍이 이 지역 천도교인들이 인근 정읍 등지의 천도교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계획되었다. 그리고 3월 중순경부터는 기독교의 청년층과 연대를 통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하였다. 3월 26일경부터는 천도교계·기독교계와 청년·학생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으며, 거사 일을 3월 30일 부안읍 장날로 정하였다. 기독교계는 전도를 핑계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은희송 등 청년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배부하고, 천도교 측에서는 백산·상서면 등 지방민 동원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시위에 그치고 말았다(『한국독립운동의역사』제 20권, 제6장 전북지방의 3·1운동)

서용순의 고향마을 보안면 원영전 전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줄포보통학교 학생들은 최고 학년인 4학년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월 7~8일 경에도 학생들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좌절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은밀하게 추진되지만 학교 훈도들이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기 때문에 성사가 쉽지 않았다. 김태순, 박기봉, 김동섭 등은 다시 4월 18일에 줄포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학교 수업이 끝난 18일 오전 11시경, 소식을 알게 된 훈도들의 설득도 뿌리치고 학생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에 들어갔으나 줄포 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들의 만세시위를 우발적이 아니라 조직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② 새벽에 면사무소 게시판과 큰길가 소나무에 태극기를 달았다.
③ 학교에 비밀리에 태극기를 가져다가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④ 태극기를 시장에서 장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⑤ 7명의 주동자가 있고 학생들 50명이 참여했다. 이런 조직적인 움직임에는 역할 분담과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대처하는 전망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은밀히 태극기를 준비한 것은 서용순과 이병근으로 봐야할 개연성이 크다. 이들이 18일 새벽에 같은 마을의 보안면사무소와 학교 가는 길가의 소나무에 태극기를 달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안면과 멀리 떨어져 살던 학생들이 면사무소나 학교 가는 길의 소나무에 태극기를 게시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 훈도에게 발견 되어 주의를 받은 상태였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문을 뛰쳐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줄포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했다. 이들은 이미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갈 각오를 했던 것이다. 시장이라는 공개적인 곳에서는 숨을 곳도 없고, 체포되는 과정까지도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대범함을 보였던 것이다.

주동학생인 김태순(金泰順), 김동섭(金東燮), 박기봉(朴基鳳), 서용순(徐龍順), 이병근(李秉根), 박병섭(朴炳燮), 이병갑(李炳甲) 등 7명이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는 일본인 검사와 서기·통역을 줄포 현장으로 보내서 학생들을 취조케 했다. 학교장과 학부모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학생들은 석방될 수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보통학교 학생들의 구속은 부담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만세 파급으로 이어져 여파가 눈덩이처럼 커질까 두려워 내린 회유책이기도 했다.
취조 기록에 따르면(『소요사건 도장관보고』) 주로 참여한 학생들은 3,4학년 학생들이고 태극기는 87개가 제작되었으며, 만세시위에 참가한 학생은 50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18일 밤 10시경에는 인근 마을에서 횃불과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10여명이 검속되었으며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는 운동은 계속되었다.

줄포학생들의 만세시위를 기록한 보고, 붉은색 안에 서용순의 이름이 보인다

고창고보에 입학한 서용순

서정일은 고창고등학교를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아버지 서용순이 돌아가신 뒤 1980년대 말에 아버지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싶어서 학교를 찾았지만 그때는 어떤 자료도 없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섰던 기억이 있었다. 2018년 12월 18일에 갔을 때는 아버지의 제적증명서를 뗄 수 있었다. 증명서를 떼어주던 행정실 직원이 한마디 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잘하셨네요. 1등을 하셨어요.” 이 말을 듣는 정일은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아버지는 만세시위 운동이며 학교 다닌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그저 침묵하셨을까.
1921년에 고창고보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서용순은 곧잘 흔들렸다. 학교에 다녀서 졸업장을 받은들 배운 지식을 써먹을 데나 있는 것인가. 써먹는다 해도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살아야할 식민지 백성의 처량한 처지만이 다가올 뿐이었다. 학교의 교육환경 개선이나 문제 있는 교사들의 배척 등으로 동맹휴학이 있을 때 참여하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학교에 소홀하다 보니, 1,2학년의 결석은 2,30일이 넘었다. 3학년 때는 공부에 전념했으나 퇴학을 당한다. 이유는 ‘학자(學資) 부족(不足)’이다. 공납금을 못 내서 3학년에서 1등하는 학생이 학교를 고만둔 것이다. 다음해 3학년에 재 편입 했으나 한 달 후에 가사에 의하여 다시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이때는 이미 결혼하여 자녀가 있는 가장으로서 가정 경제도 꾸려야 하는 책임감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하여 공부를 아예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사실 확인이 필요한데, 법관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도 되었으나 독립운동 사건이 결격 사유가 되어 임용이 되지 않았다는 가족들의 증언이 하나이고, 광주학생 운동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증언으로 볼 때, 자신의 어려운 경제 현실에서도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과 행동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줄포시장의 모습

해방의 새벽을 여는

분가하여 줄포의 교하마을에서 살다가 군산으로 이사한다. 그 사이에 아이들도 여럿 태어났다. 이곳에서는 변두리의 땅을 사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흥수(홍익학원 초대 재단이사장)와의 관계는 규명되어야 할 일이다. 6년 차이가 나는 이흥수와는 사업을 같이했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또 하나는 해방 전에 모르는 사람에게 은밀하게 세 번에 걸쳐서 돈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독립운동 자금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전 2,3년은 서울의 동대문구에서도 살았다. 돼지 사료와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다가 공장을 가동하기 전에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에는 가족들을 먹일 수가 없어서 목포의 처가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고생, 말도 말아라, 징글징글하게 고생만 혔다”며 손사래를 쳤다.

해방 후 군산의 변두리인 조촌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돼지도 키우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쳤다. 배추농사를 지어 기차로 용산까지 가지고 가서 팔기도 했다. 군산 구암초등학교의 설립에도 관여하여 땅을 희사하고 상당량의 후원금을 낸 것으로 가족들은 이야기한다. 군산 장미동에서 호남제분을 설립한 이용구회장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미국에서 원조 식량으로 들어온 소맥을 재료로 밀가루를 생산하는 호남제분은 국내에서는 두 번째 설립된 제분회사였다. 서용순은 이 회사의 법인 등기에 이름을 등재하기도 했다.
아들 서정일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온유한분, 누구에게나 인격적이고 함부로 말씀을 하지 않으신 분. 자녀들에게 욕설을 한다거나 매를 드는 경우도 없었다. 평소에도 “정직해야한다”는 말로 자녀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아내와 금슬이 좋았던 서용순은, “자네는 내가 죽어도 훗날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요. 고생 많이 했지만 아이들이 막돼먹지는 않았으니까” 라는 말로 나이 차이가 솔찬한 아내를 위로하곤 했다.

서용순의 가족사진, 195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서용순은 뇌경색으로 죽음을 맞았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했다. 아버지가 보통학교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고생했다는 소문에도 반신반의 했지만 확인해 보니 엄연한 사실로 드러났다.
서용순은 삼일 운동 때의 만세 시위는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의 노예 상태에서 민족이 해방된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여전히 행동한 서용순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용기로 어둠을 물리쳐 새벽을 열고 해방을 쟁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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