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유물은 말이 없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힘과 미래를 열어준다. 처음부터 뜬구름 잡는 말을 던진 이유는, 옛 주소로 동중리 3구 새 주소는 구영 2길에서 이루어지는 공사에 부안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해서다. 이 마을은 동쪽 성문 안쪽에 위치하여 ‘동문안’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마을 뒤의 능선은 성곽이다. 위 사진은 2016년에 찍은 것인데 위쪽으로 구영말과 성터가 보인다.
  지난 2월 12일에 부안을 지나다 보니, 이곳에 입간판 하나가 서 있었다. ‘구영말 도시재생 사업’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뒤쪽으로 넓은 도로가 뚫려 있고 성 밑으로 포클레인이 굉음을 내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마을에 이런 큼지막한 도로가 왜 필요한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걱정이 뒤따랐다. 이 도로가 이어지는 곳이 마을 뒤의 부안읍성이라면 훼손은 불 보듯 자명하다는 이유에서다. 도시재생 사업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삶의 질을 고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길 하나 넓게 낸다하여 도시재생이라 한다면 70년대의 새마을 사업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부안읍성의 복원을 얘기하고 주장에 동의도 한다. 다른 지역의 읍성(邑城)들은 말만 성이지 사람이 살지 않는 박제된 읍성이 대부분이다. 전남의 낙안읍성, 우리 주변의 고창읍성이나 무장읍성도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매 한가지다. 그러다 보니 성 사람들의 생활은 없고 방문객들의 호기심어린 구경거리 정도가 남을 뿐이다. 하지만 부안읍성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다양한 생활문화와 역사문화가 숨 쉬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을 전수조사해서 문화재로 등록하고 읍성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다. 욕심을 낸다면 전주 쪽으로 나가는 동문안 당산 주변에 옛 문인 동문(청원루, 淸遠樓)을 복원하여 부안의 대표 문루로 삼는다면 부안읍성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올 것이다.
  부안현이 성황산 밑에 자리 잡은 것은 1416년(조선 태종 16년)이다. 보안현과 부령현이 합쳐지면서이다. 성곽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지금처럼 넓은 토성이 형성된 것은 1487년(성종18년)이니 올해를 기점으로 보면 532년 전이다. 우리는 500년이 넘은 대단한 읍성 문화재를 가졌음에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남아 있는 것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지금까지 어렵게 유지되어 온 구영말 뒤편 등성이의 읍성이 파괴된다면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역사의 흔적마저 우리 손으로 지우는 것이다. 군청 앞의 본정통에 있던 일본식 건물을 근대문화 유산으로 지키지 못했다고 이제사 후회한들 늦었다. 파괴된 문화재는 재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안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저 부안읍성의 조선시대 문화재를 지키는 것은 부안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다.
  부안은 너무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부자여서 귀한지를 모른다고 얘기한다. 오래된 유물들을 없애기에만 급급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구영말 뒤의 성터를 눈여겨 봐야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갖지 못한 500년 넘은 이 대단한 역사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부안을 찾는 사람들이 읍성 위에서 부안읍을 내려다보며 가족과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꿈을 꿔본다. 그때 성황산 뒤로 떨어지는 해는 역사를 찾는 이들을 힘차게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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