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는 천곡스님은 손님(김진배 전의원)의 간청으로 포즈를 잡았다. 오른쪽 모과나무 아래쪽에 종루를 짓기 전이다. 종은 특별한 행사 때만 울린다. 전쟁과 살생의 질곡에서 중생을 구하려는 피맺힌 울부짖음으로. ⓒ장정숙

부안의 얼굴 4> 월명암 천곡(天谷)스님

옛 사람들은 서해안에서 절경의 암자 셋 가운데 하나로 부안 변산의 월명암을 꼽았다. 대둔산 태고사, 백양사 운문암이 그리 높은 곳에 있지 않으면서 앞이 툭 트여 선승들의 수도처로 알려졌다. 다른 곳들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큰 사우들이 들어섰다. ‘월명’ 가는 길만이 천 년 전 백 년 전처럼 휘발유 냄새를 배척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맷돼지

이건 큰 절에 붙어 있는 흔히 보는 조그만 ‘사내 암자’가 아니다. 주지스님 천곡天谷은 이 절 만큼이나 별난 스님이다. 1400년 전에 이 절을 창건했다는 부설거사가 이 절에서 아들 낳고 딸 낳고 부인과 함께 도통을 해서 한꺼번에 네 사람의 성인이 되셨다고 ‘부설전’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성인이 어떤 절집에서 어떻게 사셨는가는 베일 속에 가려 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선승들이 이 암자에 주석하여 변산 월명은 선승들이 부러워하는 성지요, 명찰이 되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나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는 그만 두고라도 최근 100여 년 동안만 하더라도 학명, 용성, 서옹, 고암, 해안, 원경, 능파, 탄허, 소공 같은 전국에 알려진 기라성 같은 고승 대덕 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거의 한 두 철 늦봄 풀이 돋을 때 오셨다가 찬바람 불면 인연 있는 아래 큰 절들로 떠나셨다. 큰 스님이 주석하시는 동안 스님을 시종하던 한두분 상좌들이 뒤따랐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천곡스님은 처음으로 주지 임기 3년과는 관계없이 ‘붙박이 스님’이 되셨다.
-얼마나 계셨습니까?
“몰라요. 한 20년 될 껩니다.” 
-임기가 여러 번 연장 되었겠군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계시게 됐습니까? 혹 본사에서 크게 신임을 받았거나 아니면 여기 이 험한 데 올 사람이 없었거나.
“그때그때 사정이 있었어요. 어떤 때는 본사에서 격려도 받았고, 어떤 때는 적당치 않은 사람을 보낸다기에 그래선 안 된다고 떼를 쓰기도  했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제가 큰 공사를 하고 있어 일을 모르는 스님이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흔한 말로 본사에서 소임을 맡으신 분들 저는 잘 몰라요. 그렇다고 어디 총무원이나 제가 있던 해인사나 상원사 같은 데서 천리나 떨어진 사문중 사람을 챙기기도 어려웠겠지요. 제가 그런데 기대는 사람도 아니고.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그런 거 대답 안 할래요.”
필자와의 오랜 인연으로 이런 저런 사정을 다 알면서 무얼 또 묻느냐는 투다.
    
큰 절이든 작은 암자든 ‘문화재 보호’라는 명분으로 수억 또는 수십억 공사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여기에는 사진이나 문서 또는 믿을 만한 전문가의 증언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월명암은 그런 자료가 없었다. 대웅전과 관음전을 짓고 요사채를 짓고 공양방과 운해당을 짓고 사자동 골짜기에서 운해당 밑까지 2㎞ 남짓 고도 200여 미터를 기어 올라가는 외줄 궤도차 모노레일을 깔고 선방으로 쓰는 묘적암과 무애당을 짓고 종각을 짓는 일을 지난 20년 동안 천곡의 손발로 해냈다. 행정자치부의 교부금이 주가 되고 거기 따르는 도비나 군비가 보태졌다.
스님이 변산 월명암에 온 것은 꼭 20년 전이었다. 전라도 절집이 처음이었다. 어니 전라도 땅은 그가 밟은 생전 처음 ‘미지의 땅’이었다. 출가 한지 10년쯤 되는 늦가을 천곡은 합천 해인사와 동래 범어사 선방에서 여러 번 만난 도반과 함께 물어 물어서 해질 무렵에야 공양간인 듯한 부엌에 발을 들여 놓았다. 불기는 없고 쌀독엔 며칠은 먹을 만한 쌀이 있고 된장 간장 그릇도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갈퀴나무와 장작도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겨울에는 이 절이 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작 와보곤 이런 절이 있나 싶었다. 지금 공양간이 들어서 있는 그 자리, 부처님을 모신 법당 한쪽에 붙은 두어 평 되는 방이 있었다. 이들 30을 갓 넘은 두 선승의 첫날밤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월명암은 변산 안에서도 눈 많이 오고 바람 세고 비 많이 오는 곳으로 소문 나 있다. 이와는 달리 물이 귀하고 모래나 돌이 귀하고 길이 없다. 말하자면 3다 4무다. 길이 없는 곳에 보란 듯이 ‘대궐 같은’ 집을 지은 사람이 하늘 천에 골 곡자 ‘천곡’이라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주지 스님이다.
적재량 0.8톤의 이 화물 운반용 모노레일 견인차는 지난 10여 년 동안 수천 톤의 건축 자재를 실어 날랐다. 모래와 시멘트, 합판과 철판, 기와를 실어 실어 날랐다. 그는 트럭 운전수요, 모노레일 운전기사였다. 견인 차대에 붙은 계량기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전진과 후진, 정지의 레버뿐이다. 기둥과 서까래는 대형 화물 헬기로 날랐다. 땅을 파거나 흙을 옮기거나 메우는 작업은 포크레인이 필수 장비다. 천곡스님은 그 육중한 쇳덩어리를 네 개 다섯 개로 분해하여 그 자가용 0.8톤짜리 모노레일 견인차로 날랐다. 가히 하늘을 나는 멧돼지였다.
10여 평 되는 양철집 하나 달랑 있던 월명암 불사를 처음 시작한 주지스님은 천곡보다 몇 년 전에 계시던 종흥(宗興)스님이었다. 종흥도 빈집에 들어와 ‘단지 밥’을 해먹으며 공사를 벌였다. 들어온 지 몇 년 사이에 운해당을 짓고 사성전(四聖殿)을 지었다. 손수 바랑 대신 지게를 지고 짐을 날랐다. 소나무 베어서 집을 짓고 수 백부대의 시멘트를 지서리 쪽 일꾼들과 함께 등짐으로 날랐다. 집은 됐는데 경찰서와 검찰청에서 오라 가라 시끄러웠다. 산림법위반에 인부들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더러 아래쪽 마을에서 불공을 드리러 오는 아낙네와 할머니들은 스님 손에 몇 장의 지페를 쥐어주었다. 한 만원, 또는 2만원이었다. 시멘트 한 포대 2천원인데 이걸 짊어지고 월명암에 대는 운임을 합치면 4천원이었다. 나라에서는 한 푼의 돈도 나오지 않았다. 읍내에도 더러 불자가 있었지만 이 험한 산에 있는 절에 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월명암 범종각

“원혼을 달래는 평화의 종을 울려야지”
 
천곡 스님은 억척이었다. 지은 사우가 한두 채가 아니오, 여덟아홉 채다. 반반한 땅이 없으면 언덕을 파고 구덩이를 메워서 집을 지었다. 그에게는 더 큰 소원이 있었다. 월명암 들어가는 입구 쪽에 불이문은 못 세우더라도 그럴 듯하게 종각을 짓고 그 안에 변산 골짜기 골짜기에 울릴 ‘평화의 종, 화해의 종, 상생의 종’을 매달자는 발원이었다. 누가 일으키고 이름을 무어라고 붙였든 간에 고봉 정상, 이 선경은 병화를 입었다. 20세기 초 의병을 잡으러 다닌 일본 현병이 불을 질렀고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군경이 불을 질렀다. 절이 없으면 중은 다른 절을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변산 안에서만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살래 사람’(행정구역이 변산으로 바뀌기 전 ‘산내’를 흔히 이렇게 소리 나는 대로 불렀다)들은 그때  거기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당하거나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군경 가족의 사돈네 8촌도, 청년단에 관계한 젊은이들도, 아니 산에 들어간 형제 밥 한 끼 먹여준 것이 죄가 될까 무서워 변산 동쪽 상서 우슬재를 넘지 못하고 변산 서북쪽 하서 해창 다리를 건너지 못해 1950년 겨울부터 52년 말까지 햇수로 꼬박 3년을 ‘나라 없는 유랑민’처럼 지낸 쓰라린 상처. 6.25 10여년 뒤에야 제주도 감귤 밭에서 난 스님이 어떻게 이런 변산 산중의 슬픈 역사를  알겠는가.
누가 ‘접적 지역’에서 나고 싶어서 났나. 들판 사람은 별일 없는데 산중 사람만 희생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천곡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큰 스님을 모시고 공부 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 생각났다.
“부처님이 나라를 구하나, 백성을 배불리 먹이나, 편을 갈라 누구는 극락으로, 누구는 지옥으로 보내나, 그런 것 없다. 부처님은 사람을 선악으로 가르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고 원혼을 달랜다.”
왜 어떤 절은 불타고 어떤 절은 그대로 남았는가. 절이 있는 지세에도 관계되겠지만 절은 중이 지켜야 한다. 나라가 백정보다도 노비보다도 더 중을 천하게 여기던 왕조시대에도 외적이 침입하면 중들은 나라를 지키려고 승병을 일으켰다. 6.25 때 많은 절들이 불에 탔다. 폭격으로, 포격으로, 방화로. 하지만 거기 살던 스님들은 자기 집도 아니고 잠깐 머무는 절을 ‘조국’처럼 지켰다.
천곡 스님은 이 ‘산중 이야기’를 산 밑 할머니나 아주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 띄엄띄엄 들었다. 아, 내가 이  분들에게 할 일은 극락왕생하라고 기도 하는 것이 아니오, 시주 많이 해서 절에 돈 보태라는 것도 아니라고 마음을 다졌다. 마침내 몇 달 동안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로 합천 해인사로 동래 범어사로 자기가 모시던 큰 스님들을 뵙고 범종 발원을 말씀드렸다. 몇 천만 원인가 현금이 확보되고 본사인 선운사와 가까운 내소사와 개암사에서도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마침내 10월 어느 날 사자동 ‘사성폭포’ 들어가는 입구 동화실 백씨네 재실 옆 100여 평 되는 텃밭에 대형 화물 헬기가 내렸다. 충북 진천에서 부안 변산 사자동까지 10톤 화물차로 실려온 종 박스는 육중한 쇠사슬에 매달려 좁은 내인천 골짜기를 서서히 곡예비행 하듯이 월명암 종각에 사뿐이 모셔졌다. 헬기 밑에 쇠줄에 무언가 매달린 것이 보였다. 철책과 성판으로 된 네모진 범종 박스 옆에 승복을 단정하게 입은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종만 해도 800키로, 범종 박스도 아마 200㎞라고 했다. 그 종이 변산의 산봉우리와 골짜기에 울리기까지는 한 달이 또 걸렸다. 기자는 월명암 범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하늘을 나는 맷돼지!” 언뜻 본 스님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 종루 건축에 필요한 자재는 기와 한 장, 시멘트 한 부대, 모래와 자갈 한 부대까지 모노레일로 스님이 직접 날랐다. 스님은 1급 노동자요. 포크레인과 불도저 기사요, 설계도를 보는 기사요, 전기 수리공이오, 농사꾼이었다. 절 주변에 수백 그루의 삼나무를 심고 절 입구에 수백 송이의 상사화를 심은 사람이다. 

병실에서 도망친 스님

지난 20년 동안 기자는 두어달에 한 번 쯤은 월명암을 휙 돌아보았고 좀 뜸하면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궁금해서 들렸더니 전에 보던 스님이 아니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있고 두 눈이 노랬다.
“아니, 병원에 가보았습니까, 뭐랍디까?
“황달이래요, 하지만 지금 일 하다 어찌 병원에 갑니까,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
“스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관세음보살이 스님 병 고쳐줍니까. 월명암에서 순교 할 겁니까! 내 전주병원, 잘 아는 병원 있어요, 병원 주인은 불자는 아니지만 여기 월명도 kbs 박권상 사장이나 한양증권 깅영인 회장과 함께 두어 번 왔어요.”
이사장이 보증하고 병원장이 직접 입원수속을 했다. 한 일주일 쯤 됐을까, 전주 병원 홍 이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의원,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월명암 스님이 없어졌어요.”
병원에서는 한 2주일 입원하고 그 다음은 한 달에 한번 정도 병원에 나와서 진찰하면 되겠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입원비는 꽤 되지만 그건 이사장이 처리하겠다는 말까지 해서 안심시켰는데 왜 도망을 갔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이 종합병원 이사장의 말이었다.
한참 지난 뒤에야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듣고 보니 그 놈의 핸드폰이 유죄였다. 폭우가 쏟아져 한쪽 절개지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흙과 함께 흘러 내리고 유일한 교통수단인 모노레일이 기관사의 입원으로 움직이지 않으니 공양할 보급이 내일 모래면 바닥이 난다는 급보였다.

월명암 주지 천곡스님. 본명은 고경협. 제주도 제주시에서 서귀포 쪽인 애월읍에서 감귤농장을 하는 중농의 둘째로 태어나 애월중학교와 제주상고를 마치고 어디로 도망칠까 궁리 하다가 기왕이면 서울로 간다고 ‘불교의 서울’ 해인사로 튀었다고 한다.
1963년 생, 우리 나이로 쉰 여섯이다.
-어떻게 출가하시게 되었습니까?“
“그냥 나왔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합천으로 해서 경주 수학여행을 갔어요. 해인사를 갔는데 수십 명의 스님들이 공양을 하시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좋게 보였어요. 멋있다! 저렇게 멋있는 사람들 처음 보았어요. 간호사나 육사생도들 멋있지 않아요.”
-지금은 법당엔 잘 안 가신다던데.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을 틈이 있어야지요.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는데.”
선방이어서 수도하는 스님들이 입재하는 여름과 겨울철 외에도 서넛은 항상 머문다. 그런데도 공양주는 비기 일쑤다. 추석 때 내려가면 안 올라오고 설 지나 온다던 사람은 소식이 없다.
“월급은 없고 공양주에게 4월 초파일에 100만원 드려요. 몇 달을 일하든 간에.”
-너무 적네요. 누가 있겠어요.“
“작지요. 하지만 어찌 합니까. 공양주 없으면 없는 데로 살아야지요. 지금까지 서너 달 째 스님들이 각자 끓여 자시지요.” 
지금 당장 급한 일이 모노레일을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 2㎞ 남짓의 레일은 그때그때 보수 해왔지만 이제는 수명이 다했다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나라와 부안군의 지원으로 전화를 놓아주고 전기를 끌어들이고 알루미늄 수도관을 끌어 올리고 그렇게 해서 새로 지은 10여 채의 사우는 이제 수도승들의 요람으로서의 명을 다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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