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재형 가족실습농장 전경 사진 / 김종철 기자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 안길을 따라 13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작은 주택 10여 동이 모여 있는 아담한 주택단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부안군이 인구를 늘리고 귀농귀촌을 활성하기 위해 조성한 ‘체재형 가족 실습 농장’이다. 주택 10개동과 공동이용시설 1동, 실습농장 3000㎡의 규모로 조성된 이 농장은 부안에 정착하기 전 농촌의 삶과 영농실습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민의 임시 거주지다.

부안군은 지난 10월부터 귀농귀촌교육을 받고 가족 2인 이상이 전입신고를 마쳐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추고 임대기간 1년에 년 150만원에서 170여만 원의 임대료 등 운영조건에 만족한 입주자 모집에 나섰다.

그 결과 최근 이곳에 9세대가 입주해 부안에 정착을 희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들 예비 부안사람들을 만나봤다.

체제형 가족실습농장-입주자들 사진 / 김종철 기자

 

1호 농장 강영선 씨

“어디라고 말은 못하는데 충남 어디 쪽 사람들 인심이 안 좋더라고, 근데 같은 서해안이라도 부안은 달라, 처음부터 아주 좋았어. 딱 내 스타일이다 했지”
사람 좋은 곳을 제 1조건으로 두고 귀촌지를 찾아다녔다는 강영선 씨의 말이다.
거기에 전라북도만의 기막힌 음식솜씨와 변산반도라는 자연환경이 부안을 선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올해 63세인 그는 강원도 태생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우여곡절 많은 인생을 살았고 부안에 오기 전에는 인천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았다. 자식도 훌륭하게 길러내고 어렵사리 집도 한 채 장만했다.
“손자 봐 주길 내심 기대했던지 아들 녀석이 귀농을 반대하더라고”. 자식 키우느라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내 인생 찾아갈 즈음 손자 보느라 노년을 보낸다는 말이 실감났다고 한다.
사랑하는 손자지만 시골에서 살고 싶던 오래된 마음은 바꿀 수 없었다.
더욱이 부안이라 놓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자신의 뜻을 따라 힘을 실어준 부인이 있어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는 이곳 체재형 농장의 조건 중 1년만 거주할 수 있는 것을 아쉬움으로 꼽는다. 1년 후 부안에서 집을 못 구하면 어쩌나 고민이 깊어 서둘러 주산면 덕림리에 집 지을 만한 곳을 최근에 샀다.
비싼지 싼지도 모르고 산 것이 아쉽다며 귀농인 간 또는 부안지역 사람들 간 정보를 공유하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비춘다.
더해서 그는 “내 사망 신고지는 부안이다”라며 부안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뜻도 전한다.

 

2호 농장 주기만 씨

주기만씨는 가족실습농장 초대 대표직을 맡고 있다.
입주자 9명의 대표인 그는 부안이 고향이다. 거기에 할머니가 부안 김 씨라며 부안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서울 강서구에 살다가 내려온 그는 올해 55세로 자동차 딜러 생활을 거쳐 송파에 있는 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던 중 귀농을 결정했다
“시골가면 먹고 살기 힘든데 그냥 직장 다니면서 편히 살지 뭐하러 내려가”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귀향이라는 본능을 잠재울 수 없었다고 한다.
시골에 내려와 정착하는 것을 반겼던 아내의 응원에 귀촌 결정에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염색 방을 꿈꿔왔던 아내 위금하 여사는 작년 6월부터 부안에 내려와 현재 참프레 공장을 다니면서 가정 경제에 도움을 더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3명의 자녀를 뒀고 이 중 1명의 자녀가 이곳에서 거주를 함께 할 예정이다.
광주에서 사격 선수로 활동 중인 아들이 이곳 부안에서 공익 근무로 군 복무를 대체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한테 귀향의 꿈을 이루러 부안에 간다고 자랑했는데, 이제 체면 때문에라도 못 올라가 곧 죽어도 부안 살아야 혀” 체면을 핑계 삼지만 부안이 좋아 계속 살고 싶다는 표정도 읽힌다.
비록 1년이지만 이곳에 입주해 당분간 걱정을 덜어 좋다고 한다. 땅도 사고 집도 살 돈을 좀 더 모으기 위해 취업을 결심했다.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 지인의 소개로 얻게 된 근처 공사현장의 관리인 자리가 부안에서의 첫 직장이고 부안생활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올해 말 즈음 싼 임대아파트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10호 농장 박종석 씨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키가 큰 박종석 씨는 증권기관에서 20년의 경력을 쌓아 온 증권맨이다.
명퇴 후 아직도 살아갈 날이 20년은 넘게 남았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귀농을 염두 해 두고 인터넷 귀농교육부터 시작해 서울 방배동에 있는 전북귀농센터를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그가 귀농지로 전북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간 살아온 서울과 교통이 좋아야 하고 땅이나 주택에 투자되는 금액을 줄일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충남, 충북은 서울과 가깝고 자연환경도 좋았지만 너무나 올라버린 부동산가격이 문제였다. 경남, 경북, 전남은 젊어서부터 다녀봤지만 너무 멀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면 3시간이 채 안 걸리는 전북, 그 중에서도 산, 들, 바다가 어우러진 부안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20대 중반에 바다낚시 차 격포에 들렀던 기억도 한몫했다.
또한 귀농귀촌 교육 중에 만난 부안귀농귀촌협의회 지용국 회장과도 말이 통했다. 왠지 부안으로 가야만 했다.
그의 부인 국소욱 여사는 더욱 반겼다고 한다. 10여 년간을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야 귀농을 결심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1년 뒤에 집 못 구하거나 마땅한 터를 정하지 못하면 읍내에서 셋방살이를 할 겁니다”라는 그의 말에 부안 정착의 의지가 엿보인다.

 

7호 농장 백승완 씨

입주한 9개 농가 중 마지막으로 입주 결정을 받은 52세의 백승완 씨는 “그냥 마음 가는 곳이 여기더라구요”라며 부안을 선택한 이유를 말한다.
수원과 광주 등지에서 회사를 다녔고 식당을 운영하는 등 다재다능했다는 그는 불현듯 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농업을 해보겠다고 사업체를 접고 3개월을 귀농에 몰두했다.
귀농교육 이수를 위해 강좌를 살피던 중 안성에 있는 한경대학교에서 전북 부안지역 귀농 교육을 하기에 수강을 신청했다. “이것이 부안과의 첫 인연이었다”고 말한다.
교육을 이수한 후 지자체마다 지원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안을 포함해 전남 영암, 강진, 곡성 등 지원금이 많은 곳을 찾아 귀농지 물색에 나섰다.
“다른 곳은 뭔가 허전한데 부안만 오면 포근하고 좋더라고요. 지원금의 유혹을 벗어나 이곳이라면 정착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이 부안으로 이끌었다”고 소회한다.
그는 이곳 임시 거주지 임차기간이 1년인 만큼 3월경부터 시작되는 농사철에 적극적으로 참여 올해 안에 농업에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이 반대는 안했지만 살아갈 날이 많기에 서둘러 귀농에 성공해야 한다는 책임감 탓일 것이다.
그는 이장님과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봄에 일할 계획을 꾸리고 농사지을 땅 임대를 알아보는 등 목표 달성을 위해 농한기를 알차게 보내고 있다.
또한 가정경제를 위해 조만간 아내가 나가고 있는 참프레와 같은 공장에 나가 생활비를 보텔 계획이라고 한다.
“제가 귀농에 성공할 수 있도록 좋은 멘토 한분 소개해 주세요”그의 마지막 당부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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