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면 궂은 일만 본다 는 ‘수즉욕’ 壽卽辱 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하는 김교장 ⓒ장정숙

연말도 되고 해서 찾아가서 뵙겠다는 말에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안 돼요, 안 돼!  내 지금 누구 사람 만나고 그럴 처지 아니예요. 경황이 없어!”
목소리는 카랑카랑한데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 불문곡직하고 고양 아파트 번지수 찾아 쳐들어갔다.    
-멀쩡한데 왜 엄살을 떨어.  얼굴도 환하고…… 떡국 한 번 더 먹어야 90 문턱인데 지금부터 왜 엄살을 떠느냐 말이오!
“허 나, 불청객이 큰 소리 쳐? 김형은 지금도 기가 펄펄하네. 내가 엄살을 떠는 게 아니라 면목이 없어 아무도 만날 수가 없는 처지요. 이거 무슨 변이오.”
흑흑 흐느끼며 “무슨 변이오, 무슨 변!”을 되풀이 하다 죄지은 사람처럼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거 무슨 변이오. 옛 사람이 수즉 욕壽卽 辱이라고 했어. 작년 이맘 때 내자를 잃었는데 며칠 전 큰 자식이 갔어. 어제가 49제여, 허! 내자는 여기 내 옆 침대에 오래 누웠다 갔지만 큰 자식은 뇌졸중으로 갑자기 갔으니 이거 애비가 겪어야 할 일이겠소.”
63세, 애비로서는 소년 죽음이다.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하는.
   
고샅에서 캐낸 보석

김형주 선생은 그냥 선생이 아니었다. 욕심 많은 선생이었다.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는 광산왕 보다 명당자리를 찾아 당대 발복에 목을 내미는 풍수보다 더 욕심이 많았다.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자기 사는 고샅에 풀어 속담이며 입으로 전해오는 민요, 구전민요를 들어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다. 한 개를 가져오든 열 개를 가져 오든 ‘감자’(고구마)나 ‘하지 감자’(감자) 뿌리처럼 죽 따라 나왔다. 그것을 엮으면 값을 부칠 수 없는 아무데서도 살 수 없는 보석이 되어 갔다. 어찌 보면 김선생은 이것으로 출세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학교에 여러 특별활동반이 있었는데 나는 향토문화반을 만들었어. 세계의 역사, 나라의 역사를 알려면 우선 자기 고장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한국의 역사를 한국 사람이 써야 하듯이 부안의 역사는 부안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어, 알아야 면장도 한다고 부안의 민초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부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캐내고 기록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이런 생각에서였어.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선생님들끼리 여러 번 모여 계획을 짜고 학생들이 아주 재미를 붙이고 잘 해주었어. 전국 수천 개 중고등학교 가운데 이런 ‘동아리’, 그때 말로 향토문화 ‘특별활동반’이 전국 최초라는 건 훨씬 뒤에야 알았고……”   
-군계일학이랄까, 혼자 1등이었군요.
“과분한 대접도 받았어. 도 교육청에서 연구발표회도 하고 몇 년인가 뒤에는 심지어 문교부(지금 교육부)에서 이런 동아리 활동을 하는 지도교사 16명을 여름방학 때 서울로 불러 말하자면 콩쿨을 열었어. 그 때 처음으로 호텔에서 잠도 자보고. 국비출장이지. 수유리에 있는 레인보우 호텔이라던가 하는 아주 경치도 좋고 근사한 호텔이었어. 그때 같이 애쓴 김한수 선생도 같이 묵었어, 지금 부안여중 교장이지.”
-어떤  연유로 그쪽에 그렇게 미쳤어요?
“헛허허, 그래그래, 김형 말대로 내가 미쳤었어. 나는 가끔 그렇게 미쳐. 거창한 일을 해야겠다 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옛날 선비들은 공부를 노는 것처럼 맛을 붙이라고 했어. 실제로 나 같은 사람이 해보아도 공부하는 맛이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지. 김형, 앙그리여?”

40년의 교직에서 물러나서도 향토 문화 발굴에 정열을 쏟은

김형주 선생. 눈빛이 형형하고 입이 야무진

고집스럽고 당당한 모습이다.

김교장의 마지막 역작 ‘김형주의 못 다한 이야기’표지

노인 대학 학장

김교장의 범상한 자세는 월급 받고 일한 부안여중고 40년의 붙박이 교직 생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양반은 1996년 2월 정년퇴임하자 바로 부안 대한노인회에 노인대학을 만들게 하여  학장이 된다. 회장이다 고문이다 하는 그저 이름이라도 올려놓는 것에 익숙해진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한자리 한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무슨 여한이 있어 여학교 선생으로 한창 피어나는 꽃 속에 묻혀 살있으면 그만이지 허리 구부러지고 눈 가물가물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을 상대로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장은 교육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봉급을 받는다. 허자만 노인 대학 학장은 무보수다. 교감 교장 15년 동안은 교실에 들어갈 일도 교안을 만들 일도 없다. 노인 대학 학장은 급사에서 교수 학장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우리 학장 선생님은 그런 궂은일을 자청해서 했다. 마치 향토민속 연구를 자기가 '좋아서' 하듯이 노인 대학 일도 '좋아서' 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않는다는 말은 있지만 무보수 노인 대학 학장이 뭐가 좋아서 했다는 것인지 다시 생각게 한다. 
“내가 천성이 그런 사람으로 생긴 모양이지.” 드러내놓고 씩 웃는 그 모습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20대 초의 그 모습이다. 내가 부안농고(지금 부안제일고) 3학년 때 자주 만나는 친구들 서넛이서 모산의 산기슭 허름한 초가삼간을 찾았었다. 그 때 이 선배는 ‘이리 농과대학’ 농업경제과 2학년이라 했다. 마침 때가 조금 지난 여름날 오후였다. 우리는 매연에 그을려 새까만 ‘정지’(부엌)천장에 매달아놓은 소쿠리에 담긴 보리밥 몇 덩이를 찬 물에 말아 요기했었다. 그 때 아주 기골이 준수하고 촌사람 답지 않게 얼굴이 해맑았다. 드물게 보는 미남이었다. 김형주, 내가 만나 이야기 해본 최초의 ‘대학생’이었다.  
이 사람의 노인대학 학장 근속은 월급 교육자로 정년퇴임한 65세부터 부안을 떠나 파주로 이사 온 80세까지 무려 15년에 이른다. 교육자의 길이 험난한지 달콤한지는 모를 일이고 스승의 길은 분명히 영광스러웠다. 그는 몸소 자신의 철학과 식견을 오직 향토에 쏟았다. 자주색이거나 군청색 베레모를 삐딱하게 머리 끝 오른쪽에 걸친 ‘탐구자’의 모습은 성황산 올라가는 산책길에서나 변산의 산등성이에서나 천주교 성당의 기도석에서나 어느 모임에서도 흔히 보아온 사람들은 이 베레모를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을 성직자 같다고도 하고 화가나 시인 같다고도 했다.
언젠가 물었다.
-교장 선생님은 뭐 같다고 생각하세요?
“김의원은 역시 기자여. 그냥 좋아서 쓰고 다니는 거지.”             
-하지만 수십 년 그렇게 오래 몸에 부치고 좋아한 물건이 있으세요?
“글씨! 그러고 봉게 그러네, 석정 선생 같은 분은 풍채 좋고 우뚝한 코며 그두 툼한 마도로스 파이프며 옛날 그 등산모가 참 잘 어울리셨어. 양복보다 한복이 더 잘 어울렸고. 그건 그렇고 옛날 선비들은 의관을 갖추는 것이 큰 덕목이었어. 이래 봐도 내가 선생 교장 학장을 근 50년을 한 사람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기는 좀 허전하기도 한 것 같았는지도 모르지, 물어보니까 한 두 마디 하는 거여”
   
진짜 양반, ‘간재의 현대판 맥’이랄까

교장선생님은 1931년 부안읍 옹정 샛터에서 태어났다. 지금 우리 나이로 여든 아홉이다. 선생님의 큰 아버지 김택술(後滄 후장), 아버지 김억술(拓齋 척재)은 한말 항일 우국의 지사이자 마지막 유학자 간재 전 우(艮齋 田 愚)의 수제자의 한 사람이다. 어쩌면 교장선생이 열네 살이 될 때 까지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은 가난 탓도 있지만 그까짓 왜놈 공부 시켜서 ‘사람 구실’ 하겠나 하는 완고한 가풍 때문이었다고 한다. 위 형님은 아예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갔다.            
이런 그가 이리 부안중학을 거쳐 이리공업 5학년 때 6.25가 나자 인민군 쪽 ‘의용군’으로 동원되고 수복 된지 한참 뒤 이리 농대로 진학했다. 1955년 간신이 얻은 첫 직장이 막 개교한 부안여중 임시 교사였다.
-우리 교장선생님 복이 많네, 임시고 뭐고 간에 군청이고 면사무소고 학교고간에 아예 채용시험이 없던 그 시절에 여학교 선생이 되셨으니 복 터진 거지.“
“석성이 덕이여. 자네 친구 김석성이 말이어. 언젠가 나한테 놀러 왔어. 석성이가 대학 다닐 때지. 여름방학 때여. 어데 취직 하겠느냐고, 어데 발 부칠 데가 막막해. 글씨 아무데고 어디 오라는 데가 있어야지. 부안 여중 어찌여, 우리 아버지한테 이야기 해 보께, 그렇게 된 것이어.”        
교장선생님은 학교재단 이사장을 여러 번 한 백주 김태수를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의 인연은 천의무봉, 거칠 것 없이 부안의 문화와 교육에 땀과 지혜를 쏟게 만들었다.
    일찍이 1960년대 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며 박정희에게 대들도록 한 무교회주의자 함석헌 선생을 부안으로 모셔 그의 훈도를 받았고 독립운동의 원로 지운 김철수 선생을 모시고 변산과 지리산을 누볐다. 부안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조사 연구하는 것은 물론 전주와 서울로 손을 뻗혀 잔리문화연구소, 비교민속학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회에도 관계했다. 부안에서의 활동은 눈부셨다. 거의 독보적이었다. 뒤늦게야 핵페기장 반대 투쟁에도 나섰다.
부안 사람 아니고는 부안의 보물을 캐낼 사람이 없다. 남이 못하면 내가 나서서 해야 하고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있으면 그와 함께 한다, 이것이다. 마지막 정열을 쏟은 일이 부안역사문화연구소와 부안독립신문, 부안이야기로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에 갇힌 천리마는 불쑥 이렇게 아쉬워했다.
“어이, 김형! 내가 부안에 살아야 하는데 여기 이렇게 엎어져 있어. 참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 이 친구들과 할 일이 많은데 말이어.”
어찌 부안이 싫어서 낯선 경기도 고양 땅으로 나와 큰 딸에게 얹혀 지내겠는가. 읍내 한복판 만석군 행낭채 담하나 사이 두고 보아란 듯이 네 귀에 풍경 달고 제대로  된 한식집을 지어 노부부가 말 그대로 여생을 즐기던 선생님이 천리 북쪽으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오래 동안 노환에 시달리던 부인을 좀 편안하게 하려던 그런 지아비로서의 마지막 정과 아이들의 간곡한 효심 때문이었다.

“지금은 내자도 가고 큰 자식마자 갔어. 내가 더 살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하겠는가. 지팡이 짚고 집 뒷길 따라 석왕산 길이라도 어정거리고 서쪽 변산의 그림자라도 보며 좋은 친구들 낯꽃이라도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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