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 창설 때부터 12년 동안이나 봉사해 온 이춘섭 관장을 명색이 부안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기자 김진배는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사진 / 장정숙

영하 10도의 눈보라 속에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모처럼 종합복지관을 찾아간 날 아침 눈보라가 쳤다. 서울이 영하 14도, 부안 이곳도 영하 10도라고 새벽부터 TV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보라가 날릴 줄은 몰랐다. 양어깨 눈을 털고 묵신한 등산화 신발을 동쪽 현관시멘트 바닥에 비볐다. 마침 먼 데를 돌던 12인승 봉고 차가 멈추자 몇 사람이 내렸다.
-어데서 오는 차지요?
“영전이오, 보안면 영전리.”
-장밭들 고개 넘어오는데 눈 괜찮았습니까?
“암시랑토 안히요,”
몇 년만에 들어 보는 고향 말이 마치 우리 동네 아저씨처럼 정겹다.
-날씨도 차고  한데 집에서 쉬시지, 이렇게 눈발이 날리는데,,,,
“집에 있어 보아야 뭣을 할 것이오. 여기 나와서 꼬무작거려야지, 이 나이 먹도록 꼬무작거린 탓인지 움직이지 않으면 병나요. 작년 여름 일 않고 좀 놀았더니 허벅다리가 뻗쳐서 몇 달 혼났어. 자식들이 요양원에 가야 한다느니 병원에 가야 한다느니 하는데 이 나이에 그런디 가기는 좀 그렇고 히여서 여기 복지관 왔는디 오고 가고 봉고차로 데려다 주지 뜨끈뜨끈한 점심 주지 참 좋은 시상 만난 거지, 댁은 어디 사시오?”
일흔 세 살이라고. 나보다 12년 아래 띠동갑이다.
요양원이다 요양병원이다 하면 그 이름만 들어도 무얼 하는 곳인지 바로 알만 한데 ‘종합복지’라는 말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쓰는데도 정작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짚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경증 장애인을 위한 학교랄까, 통학 버스로 학생들 실어 나르듯이 휠체어를 타든 지팡이를 짚든 보행이 가능한 분들을 복지관 버스로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성인 교육, 재능 교육 학교라 할까 그런 공익시설이다. 나라에서 지원하고 지방자치단체인 부안군이 시설을 짓고 그 운영은 기독교장로회사회복지법인이 맡고 있다. 이 서비스를 받는 장애우가 한 200명, 이들을 돌보는 실무 인원이 90여명이다. 자치단체 보조금 30억 원과 몇 억 원의 모금이나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여기 환우의 평균나이는 78.5세, 아흔 살이 넘은 초고령 노인이 서너 명 계신다고 한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복지관이 문을 연 2006년 4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12년 동안 관장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이춘섭 (63세)은 객지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이종억은 평양 가까운 대동강군에서 남쪽으로 넘어와 대구에서 김정선 여인을 만나 그를 나았다. 어쩌면 한반도 동해 쪽 원산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와 문재인 대통령을 낳기 전 그의 아버지처럼 이춘섭의 아버지는 서해 쪽 어느 조그만 포구에서 어선 밑창에 숨어 인천인지 강화도 어디엔가 던져 졌다. 밀리고 쫓기는 민족상잔의 불기둥 속에 휩쓸려 온 잔해, 수십만의 동포 가운데 한사람이다.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 3학년에 다니던 평범한 신학도가 묵주를 굴리는 조용한 목사가 되지 못하고 교도소에 쳐박히고 험한 노동자 목회의 현장으로 몸을 던지게 된 것은 1980년 전두환의 ‘광주학살’ 때문이었다.
“신학교 같이 다니던 친구 유동운 군이 시민군의 한사람으로서 도청을 사수하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우리는 이런 참변 소식을 듣고서도 서로 부등켜 안고 통곡할 뿐 감히 추도식 같은 건 생각도 못했어요. 10월 8일, 우리는 대학 안에서 100여명이 모여 추도식을 올렸습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는 그런 동포 분위기 속에서……”
잡혀서 징역 4년 선고. 2년 살고서 8.15 덕으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고층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뚝섬은 가난한 사람들의 판자집과 봉제 공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기에서 야학을 열고 서울청계천 판자집에서 쓰레기처럼 퍼다 부은 성남 판자집에서 빈민 목회를 열었다. 전두환 퇴진, 직선 개헌을 내건 87년의 6월항쟁 때는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을 뚫고 항쟁의 선두에 섰다. 마침내 재벌의 아성이자 역대 독재정권의 돈줄, 노동자 핍박의 총본산 ‘전경련’에 쳐들어갔다. 몇 년쯤은 콩밥을 먹어야 할 판인데도 벌써 저들의 기가 꺾여 석 달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노태우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그가 확실하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된 것은 재판장의 의젓한 ‘선고’ 때문이었다.
“피고는 기도를 빙자하여 시위를 했다.”
젊은 신학도는 감방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 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네 뜻대로 해라, 그것이 내 뜻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32년을 바쳤다. 그것은 실상 자기 인생의 전부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부안 땅에서 부안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 한지도 12년, 4,400날이다.
“제가 봉사를 한다고 해서 무엇을 얼마나 어려운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겠어요.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소명이오, 나라에서 맡겨주신 책임이오, 우리 복지관 환우들의 바램이오, 인간 본연의 정으로 알고 그저 열심히 할뿐이지요.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파서 고통 받는 사람,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람, 학대 받고 시달리는 사람……”        
얼굴이 둥글굴하고 말이 모질지 않고 꼿꼿한 자세이면서도 습관처럼 고개를 숙이는 이 사람, 슈바이처나 이택석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한 내가 부안 땅에서 뒤늦게 이런 사람을 눈앞에서 본다. 이만하면 부안의 얼굴이 아닐까 하고.

배워서 남주자

사무실 복도에 조그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배워서 남주자.” 어른들이 공부하라고 권할 때 “아, 이놈아 공부해서 남 주나” 했다. 장애우들은 제 몸 하나 움직이는 데도 천근처럼 무겁고 장애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배우는 것만도 대견한 일인데 배워서 남을 주자니 땅덩어리를 들어 올릴 만큼 혁명적인 선언이다. 관장 자신이 이곳에서 그림 공부도 하고 자잘한 도구를 만드는 공부를 익혀 지금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웃에게 물고기를 갖다 주느니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다.

 일찍이 100년 전에 도산 안창호는 ‘자애이타’라고 했다. 있는 사람이 남에게 정을 주고 돈을 주라 했다. 남을 도와주기 위해 배우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