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반동에 살던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대처로 나가기 위해서는 동진강을 건너야했다. 이곳 나루터에 닿으려면 집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을 것이다. 늦게 출발하면 동진나루 주막에서 하룻밤은 머물 수도 있다. 우반동에서 출발하여 거치는 길이야 보안면의 수랑뜰과 주산, 석동산 옆 학당고개를 거치는 부안남로를 택했을 것이다. 남문을 통해 부안읍성으로 들어왔다면 객사 앞을 지나 동문안 당산을 보며 동문인 청원루(淸遠樓)를 지나 혜성병원 뒤쪽의 망기산의 고개를 넘어 동진강으로 향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유형원이 만난 동진강은 썰물과 밀물 때가 되면 바닷가로 생각될 정도로 거칠었다. 강 주변 마을엔 안개가 끼어 있고 나무가 드문드문 했다. 그의 시 동진객회(東津客懷; 동진에서 나그네 회포를 읊다)를 읽으면서 그의 마음을 조금 짐작한다. 자신을 객(客)으로 표현했는데 살던 동네 우반동을 떠나왔다 하여 주막의 객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30여년을 살던 한양을 떠나 부안으로 내려왔으니 객(손)이요, 인생은 나그네 아니런가.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난 경화사족(한양 인근에 사는 선비)이었으나 32세의 젊은 나이로 부안의 우반동으로 내려와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하는 등 20년 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부안이 타관인 그를 요즘 구분으로 보면 귀농인으로 봐야할지, 귀촌인으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 부분도 있다. 그의 시 도부안(到扶安; 부안에 당도하여)을 보면 외진 남쪽 땅에 와서/ 몸소 밭 갈며 물가에 사노라는 대목에서 스스로 농사를 짓고 먹고 사는 문제를 이곳에서 해결했으니 귀농인으로 봐야할 것도 같다.
그가 동진강 나룻배를 기다리며 주막에서 쉬거나 숙박도 한 것 같다. 이곳 주막에서 밤 깊어도 잠들지 못하고 한양엔 언제쯤 가게 될는지 막연한 희망도 얘기한다. 동진야점객회(東津野店客懷; 동진의 시골 주막에서 나그네 회포)에서는 하늘가에 돌아오는 기러기 있어/너무도 처량해 고향 생각나는 구나라는 시 귀를 읽는다. 여기서 고향은 어디를 가리킬까? 잠깐 떠나온 우반동을 고향이라 하기에는 선 듯 공감하기 어렵다. 어린 날의 추억이 묻어 있던 삶터 한양을 고향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안에 내려왔지만 여전히 마음은 서울을 향하고, 지역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심정을 시에 담았다고 하겠다. 이곳에서 보는 하늘을 오가는 기러기조차 자신의 마음 같아서 외롭고 처량하게 보였다.
사진은 유형원이 건넌 곳 중의 한곳으로 추정되는 동진나루이다. 동진강 도선장(渡船場)이라 이름 하는 1950년대 사진이다. 도선장이라면 강폭이 좁거나 얕아서 건너기 쉬운 교통상의 중요한 나루터를 가리킨다. 사진에서 보듯 나룻배를 기다리며 강둑에 여럿이 앉아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배 삯인 선개를 내야했고 사공이 받는 화물의 도강료도 꽤 짭잘했을 것이다. 동진나루에는 국밥집을 겸한 주막이 있고 들병이라는 여성들이 술병을 들고 손님들에게 팔러다녔다. 사공은 물이 빠져 수심이 얕아 서 강둑까지 배가 닿지 않으면 등에 업어서 강둑까지 몇 사람을 나르기도 했다.
동진강 다리를 지날 때마다 위쪽 어디쯤에 동진강나루터가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강둑을 본다. 현재는 어디에 나루터가 있었는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곳을 찾아 안내판이라도 세워두면 좋겠다. 나룻배라도 매어두고 체험해도 좋을 듯하고. 이곳에서 유형원이 묵었음직한 주막터를 둘러보고, 걸었을 길 따라 우반동까지 걸으며 사회를 향한 당시 그의 고민과 지역에서 하고자했던 일들을 길동무들과 나누며 걷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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