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서로 귀가 어두워 가끔 필담을 한다. 손수 만든 꿀 차에 식탁에 소꾸리째 놓인 재래 고구마  사진 / 장정숙

부안의 얼굴①>농민, 전 부안농민회 회장 박배진

눈 뜨면 일하고 피곤하면 눕고

농민운동 1세대 지도자 박배진(朴培振) 씨를 뭐라 불러야 할까. 박형, 박선생, 회장님, 조합장님, 입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마치 낯설은 호칭 같다. 아주 터놓고 물어본다.
- 뭐라고 불러드리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부르든 간에 제가 말입니다.
“허, 김의원님. 오랜만에 만나 별소리 다 듣소. 아무렇게나 부르시오, 그 까짓 놈의 호칭 뭐라고 부르면 어찌여. 그냥 어이! 어이! 하지 않소. 자네 해도 좋고 단위조합장도 감투라고 대접한다고 더러 조합장님 조합장님 하지만 그거 다 합쳐 봐도 쬐께 밖에 안 돼”
- 쬐께 몇 년이지요?
“한 6년이던가, 8년이던가”
열 살까지 어린 시절은 빼고라도 ‘농투성이’ 70평생에서 보면 ‘쬐께 밖에’ 라는 말이 나올법하다.
- 그때도 조합장 자리 다 부러워했다는데.
“나는 그런 거 몰라요. 월급이야 많지요. 뭐 판공비라는 것도 있고. 하지만 경조비로 다 나가요. 까투리가 콩 밭에만 마음이 있다고 하잖아요. 내가 그 꼴이여. 집안에 벌려놓은 농사 일이 눈에 밟히여.”
듣고 보니 ‘천생 농투성’이다.
- 요즈음 하루 몇 시간 일하고 몇 시에 잡니까?
“김의원 어려서 농촌에서 살았다면서 그걸 물어 보세요? 다섯 시간도 일하고 열다섯 시간 일 할 때도 있고. 일에 쫓겨 다녀요. 쫓아다니기도 하고. 새벽 눈뜨면 일 해요. 꼬무작거려요. 방 안에서든 밖에서든. 잠은 고단하면 그냥 자요. 오후 3시에도 자고 6시에도 자고. 요즈음은 해지면 자요.”
- 식사 시간은?
“굴풋하면 그냥 먹어요. 많이 먹기도 하고 적게 먹기도 하고……”
방바닥이나 탁자 위나 먹을 것이 널려있다. 누룽지, 무말랭이, 자잘한 고구마, 볶은 땅콩, 시루떡 조각.

등용리 소몰이 투쟁

전두환의 미국 소 도입으로 국내 소 값이 폭락했다. 그런데도 7만원에 산 송아지 3년 키우면 40만원은 받았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뒤 그 값도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전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소를 몰고 서울까지 올라오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소몰이 투쟁은 급기야 궁벽한 시골 부안군 하서면 등용리의 천주교 공소에서 집회를 막으려는 경찰과 정면 대결을 하기에 이른다.
1985년. 8월 24일은 부안 장날이었다. 가톨릭 농민회와 기독교 농민회가 당초 읍내 천주교회에서 하려던 계획은 서 아무개 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천주교는 소몰이로 일어날 천주교 자체에 대한 탄압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읍내에서 10㎞나 떨어진 등용리 공소에서 하기를 종용했지만 정작 이 공소마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 집회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농민들은 공소 가까운 야산에서 대회를 열었다. 그 주력은 석불산 동북쪽 노로지(노곡)와 삼현동의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소를 몰고 석불산 산길 10리를 넘어 등용리 농민 회장 집 근처에 숨겨 놓았다. 소몰이 투쟁은 경찰의 최루탄 공격을 무력화시키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소가 최루탄을 맞으면 천방지축 모르고 날뛰는 그 피해는 예측을 초월하는 무서운 사태가 벌어진다. 하서 노곡과 삼현동의 김갑섭, 김인술, 조병태, 황선관, 황재근, 고점석, 홍일권과 변산면 도청리의 박배진·형진 형제, 오건, 이백연, 이재천, 조찬준이 주동이었다.

부안 읍내 천주 교회가 생기기 훨씬 전인 1918년 일본 강점 아래 있는 부안에서 최초로 세워진 등용리 공소는 60여년 뒤 우리가 세운 대한민국 경찰의 탄압에 맞서 싸웠다. 이곳이 전국적인 농민운동의 성지로 기록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80년의 광주 학살이 전두환의 공수단이 탄압의 주력이었다면 부안 경찰은 역시 전두환의 그 탄압 수법으로 농민운동을 짓밟았다. 급기야 소와 돌맹이로 맞서던 투쟁의 선봉에 선 박배진과 김인술은 잡히면 경찰에게 맞아 죽는다 해서 동지들의 보호를 받으며 격돌의 현장을 탈출해 전주를 거쳐 서울로 튀었다. 이들은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이 있는 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경찰의 만행을 폭로했다.
투쟁의 방법에는 제한이 없었다. 투쟁의 장소는 부안이나 전주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난을 뚫고 사선을 넘어 도착한 서울의 한 복판에는 새로운 싸움을 벌일 진지가 있었다. 이 농민들의 항쟁은 얼마 뒤 공교롭게도 민주화의 길목에 선 노무현 정권 때 벌어진 핵 폐기장 반대투쟁으로 생존권확보를 위한 투쟁으로 맥을 잇는다. 한여름 24일을 집밖에서 살았다.

통나무를 실은 1톤 트럭 앞에 선 평생 농사꾼의 모습        사진 / 장정숙

지금 농민운동은 어떤가

- 지금 농민운동은 어떻습니까?
“다들 애 많이 쓰고 있어. 농민에 대한 수탈이 멈추지 않는 한 투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어. 그런데 한 가지 좀 이상하다 싶은 것이 있어. 농민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농업의 각 분야에 따라 이해가 상충될 수도 있어. 그 기능에 따라 투쟁의 강도도 달라져야 한다 이거지. 더구나 지금 보면 투쟁의 범위를 너무 넓히는 것이 아닌가. 농어민의 생존권투쟁 만도 벅찬데 다른 투쟁의 현장까지 원정해 가지고는 그쪽 힘을 보탤는지는 몰라도 우리 목표가 희미해져요.”
- 지난 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단계적으로 본 그런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요. 그때 유신만이 살길이다, 수출만이 살길이다 한 것처럼 통일이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들 했어요. 우리 농민운동 하는 사람들까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사람들 표어 따라 다니다가는 농민운동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운동의 현장에서 떠난 지 오래라서 그런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거위가 꽥꽥 소리를 지른다.
- 저거 때까우지요?
“허, 김의원이 때까우를 다 알고... 누가 온 모양이네요. 한때 60~70마리 키웠는디 지금은 딱 두 마리. 저게 아주 영물이오. 내 차 소리만 나면 꽥꽥 산을 쩡쩡 울려. 반가워서. 모르는 사람 오면 꽥꽥 야단이오, 집은 항상 문이 열려 있어. 혹 뭐 들어갈까 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는 저 소리 듣고 그냥 도망가요. 또 우리 집에는 육군 외에 공군이 있어요. 내가 다니면 암시랑토 않은디 손님만 오면 말 그대로 벌떼 같이 덤벼들어. 따로 경보장치가 필요 없어. 우리 집이 요새요 요새. 난공불락의.”
변산면 도청리, 새 주소로 변산로 3669-9다. 모항 지나 오른쪽에 재실 근처 국도변 바로 옆 골짜기에 둥지를 튼 이후 7대 째란다.
“우리 아버지는 배 만드는 목수였다요. 김제 심포에서 영광 법성포 까지 우리 아버지 배 잘 만들었다고 소문이 났대요.
70 넘은 왕년의 농민운동가는 아직도 패기가 만만하다.

 “기운이 좀 딸리지만 어차피 내가 하는 농사는 손발로 히어야 항게 꼬무작 꼬무작 하는 거지 뭐.”                                
마지막 남은 스물여덟 살의 재래종 땍가위 두 마리, 순종 농민과 잘 어울린다.

김진배
전 언론인
전 부안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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