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감을 딴다. 우슬재 넘어 변산 깊은 골 창수동에 사는 전씨 아저씨는 동네를 찾은 학생들에게 맛있는 감을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먹시감은 작고 씨가 많고 감 몸에는 먹물이 들어 있다. 감이 설익어 푸르렀을 때는 떫기 때문에 우려서 먹는다. 요즘에 이 먹시감으로 감식초를 만들어 판다는 말도 들었다. 거기에는 속담 한자리가 차지한다. ‘감이 익을 무렵이면 약방이 문을 닫는다’는데 가을 감이 그만큼 사람 몸에 좋다는 말이겠다.
창수동에는 감 천지였다. 70년대 청림골에 사는 학생들 40~50 여명이 이 골짜기를 거쳐 창수동 산몰랭이를 넘어 상서 내동으로 가서 상서나 부안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생들의 가을 군것질은 지천에 깔려 있던 감이다. 이 산중 수입의 절반은 먹시감이었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부안장이나 줄포장에 가서 팔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오기도 했다. 한 때는 창수동 감이 제주도까지 갔다. 땡감을 따서 천연염색 재료로 썼기 때문인데 사과 궤짝에 넣어서 목포까지 가서 제주도까지는 배로 건 넣다. 감골매기는 밭에 있는 감나무를 업자에게 통째로 넘기는 일이다. 빨갛게 익으면 감나무 주인이 값을 높일까봐 장사들은 감이 새파랄 때 찾아와서 가격을 미리 정했다. 이때는 산골에 돈도 궁한 때다.
몇 년 전만 해도 창수동에는 감나무가 많더니 거의 베어내고 밭 가장자리에만 몇 그루 남아있다. 그동안 판로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전씨도 감나무 밭에 회양목, 나일락, 석류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나무를 좋아해서 하루 종일 나무를 돌보며 산다고 했다. 옆집 부부는 메주콩과 서리태콩, 밀을 재배해서 공판에 낸다고 한다.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김남주(1946~1994) 시인은 겨울이 다가왔음을 얘기한다. 유신을 반대하고 남민전활동을 하며 스스로 전사라고 불렀다. 여기서 찬서리는 무엇을 말할까?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니면 그저 절기의 흐름을 얘기했을까. 시의 해석을 떠나서 무서리 내리고, 감나무 끝엔 까치밥 하나 외롭다. 입동으로 겨울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꽁꽁 얼지만 나무 끝엔 미생을 위해 홍시 하나 남긴다.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음력 시월을 농사일이 끝나는 달이다. 이 달은 추수를 끝냈으니 걱정도 없고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는 달이기도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칠 겨울을 생각하면 마냥 놀 수만도 없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창호도 발라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맥질하기
수숫대로 터울하고 외양간에 떼적 치고
깍짓동 묶어 세고 파동시 쌓아두소
우리 집 부녀들아 겨울 옷 지었느냐

 

겨울 나는데 김장은 필수다. 구들질은 온돌 구들의 방고래에 모인 재를 구둣대로 쑤셔 내는 일이다. 집을 고쳐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함께 사는 가축도 추위를 이기도록 띠 거적을 치고 땔나무를 준비하고 따뜻한 겨울옷도 마련한다.
창수동 같은 산골에서도 까치를 위해 감나무에 밥 하나 남기고, 외양간의 말 없는 소를 위해

거적을 덮어서 추위를 함께 났다.
겨울이면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면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이 없다. 이들과 함께 찬 서리를 헤쳐 나갈 따뜻한 길은 없을까를 생각하는 아침이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