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적비 전경

역사적·상징적 측면에 계승 노력 등 지역 참여도 반영해
고창군, “지역 참여도 평가는 정치적인 의도” 강력 반발
부안군은 정중동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것”

황토현전승일이 부안의 백산대회일을 제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로 황토현 전승일(5월 11일)이 선정됐다고 밝혔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14년 만이다.
문체부는 기념일 선정을 위해 지난 2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선정위원회(위원장 안병욱)를 구성하고, 4개 지자체가 추천한 지역 기념일을 대상으로 공청회 등을 거쳐 역사성, 상징성, 지역참여도 등 선정 기준에 따라 기념일로서의 적합성을 심사해 왔다. 이 과정에서 부안군은 백산대회일인 5월1일(음력 3월 26일)을, 고창군은 무장기포일인 4월25일(음력 3월 20일)을 주장했다. 정읍시와 전주시는 각각 황토현전승일인 5월11일(음력 4월 7일), 전주화약일인 6월11일(음력 5월 8일)을 제시했다.
선정위원회는 이날 황토현전승일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관군과 격돌해 최초로 대승한 날로, 이 날을 계기로 농민군의 혁명 열기가 크게 고양되었고, 이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안병욱 위원장은 “위원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측면과 기념일로서의 상징적 측면 그리고 지역의 유적지 보존 실태와 계승을 위한 노력 등을 감안할 때 황토현전승일이 기념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민주당 전북도당도 11일 대변인 논평을 내고 “동학농민혁명특별법 제정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법정 기념일이 제정되었지만 일단 기쁜 마음과 환영의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도당은 이어 “그동안 기념일 제정을 위해 수많은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함께 고민하고 역사적 가치를 승화시키기 위해 연구해온 고창군, 부안군, 전주시의 노력은 경쟁이 아닌 대승적인 차원에서 세계사적 가치 조명이 함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여 탈락한 지자체의 수용을 촉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치열하게 경합했던 부안, 고창, 정읍의 분위기는 사뭇 엇갈리고 있다.
기념일로 선정된 정읍은 일단 속내로는 환영 일색이긴 하다. 하지만 시청이나 동학기념재단, 시민단체 등은 그동안 경쟁했던 부안과 고창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공식적인 입장을 유보한 채 몸을 낮추는 모습이다. 다만 일부 언론 등이 나서 ‘(이번 선정이) 유진섭 정읍시장의 막후 정치력과 숨은 노력이 적지 않았다’고 추어올리는 등 정치적 치적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정도다.
반면, 예상을 깨고 고창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유족회는 12일 “문화체육관광부의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 선정 결과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역사성과 상징성이 뛰어난 무장기포일이 기념일로 선정됐어야 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온 동학농민혁명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대승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이와는 달리 고창군의회는 지난 12일 결의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을 황토현전투일로 결정 발표한 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고 통탄을 금할 수 없다”며 “금번의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결정시 선정기준 중 지역 참여도 평가는 정치적인 의도로 밖에 생각할 수 없고, 모든 고창군민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성토했다.
이들은 이어 “이번 결정은 고창군민의 염원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열정을 외면해버린 것으로 고창군민 모두는 날개 잃은 새와 같은 심정”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의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결정을 제고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불복 입장을 분명히 했다.
조규철 고창군의회 의장도 본지와의 통화에서 “(기념일) 결정과정에서 지역여론을 반영했다는 것은 정치적 판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수용하기 힘들다”면서 “기념일은 역사적 의미를 기준으로 동학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곳을 선정해야 하며, 따라서 고창군의회는 군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앞으로 가용한 수단을 다 동원해 (기념일 선정을) 막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이번 위원회 결정을 행안부로 이관해야 하고 행안부는 고시·공고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에 각 지자체는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의제기가 들어오면 행안부는 다시 원점에서 재검토를 해야 하는데, 고창군의회는 이 과정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부안군은 비교적 차분한 가운데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안군 관계자는 “일단 결과가 아쉽다. 하지만 향후 대응을 위해 행정은 물론 의회와 기념사업회, 또 전문가 등과 논의해 각각의 상황에 따른 몇 가지 시나리오를 면밀하게 준비하고 있고, 앞으로의 추이에 따라 적절한 수위의 대응책을 내놓을 것”이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함구했다. 또 공식적인 입장 발표도 당분간 유보하겠다는 뜻도 아울러 밝혔다.
군민들은 대체로 마뜩찮은 분위기다. 한 군민은 “황토현전승일은 최초라는 의미가 있긴 하지만 단지 큰 전투가 일어난 날인데 이 날이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고, 꼭 부안으로 와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동학정신을 함축적으로 상징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날이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기념일 선정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이번 선정위원회는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장(위원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이승우 동학기념재단 이사장, 이정희 천도교 교령, 이기곤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장 등 5명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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