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

몇 주 전에 광주 역사 탐방을 갈 기회가 생겨서 신청하게 되었고, 백산고를 제외하고도 부안고, 서림고, 여고가 같이 가게 되었다. 같이 광주를 가는 학생들이 나와 같이 1학년이라서 좀 더 마음이 편했다.
우리 학교는 부안고 학생들이랑 같이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다. 첫 번째로 간 곳은 5·18 민주화 운동기록관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해설자 분을 만나서 5·18 민주 항쟁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간략하게 설명을 들은 뒤, 5·18 최초 발포지-구 전남 도청-5·18 민주 광장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전일빌딩이라는 데가 있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기둥을 잘 보면 총 맞은 부분이 있다고 했다. 시간관계상 너무 촉박해서 다른 곳은 미처 보지 못하고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을 1층부터 차례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그 거리를 재연시켜 놓고 그 위를 걸어갈 수 있게끔 만들어놨는데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피 묻은 신발들이 주인도 잃어버린 채 돌아다녔다.  기록관 안에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이라 했다. 그 당시 시민군들은 총 한발 제대로 나가지 않는 총을 들고서 두려움을 뒤로 한 채로 계엄군과 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상을 입은 시민들이 많아서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나이 불문하고 수많은 시민들로 가득했는데 그 중 한분이 박금희라는 여고 3학년 학생이었다. 이 분은 헌혈을 하고 양림교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복부에 총탄을 맞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몇 층을 더 올라가보니 5·18을 소재로 한 영화와 만화가 필름 형태로 나열이 되어 있었다. 이중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나도 몇몇 영화는 본 적이 있다.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내가 직접 5·18민주화운동을 겪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5·18자유공원으로 이동을 했다. 이곳에 시민들이 끌려 온 당시 현장을 재현했다고 한다. 헌병대 본부사무실, 연병장, 헌병대 식당, 영창, 헌병대 중대 내무반, 법정이 재현이 되어 있었다. 한곳 한곳 둘러보는데 헌병대 본부사무실은 시민군들을 연행해 수사하고 재판을 지휘했다는데 이곳에 데려오자마자 때렸고, 진술서를 억지로 쓰게 했다고 한다. 연병장은 잔디가 없는 모래와 자갈이 깔린 곳인데 사람들을 혹독한 기합과 폭행을 했던 곳인 걸 알게 되었다. 영창은 이곳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장소였던 것 같다. 한 방에 150명씩 빽빽하게 가두고는 하루에 16시간을 정좌자세로 있게 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몽둥이로 두들겨 때리고, 식사 또한 1인용 식사를 두 사람이 먹게 하고 밥도 얼마 안 주어서 배고팠고, 한 방에 사람이 많다 보니 여름에는 덥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5·18 민주묘지 참배를 하러 이동을 했다. 그곳에 가니 긴 기둥이 있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긴 기둥 두 개가 사람 손이고 그 가운데 있는 게 알이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그 알이 여기 묻혀 있는 분들의 영혼을 뜻하고 그 영혼을 따뜻하게 손으로 감싸는 거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서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 분들의 묘지를 보고 설명을 들었다.
  오늘 하루 5·18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날이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것도 알게 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때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평화로운 광주는 못 봤을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 은행들이 무사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다.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면 분명 은행이 먼저 털릴 것이다. 나 같았다면 무서워서 저항을 못했을 것 같은데 진짜 시민군 분들은 대단하신 것 같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저항하고, 맞아가면서도 민주화를 외치고. 나였다면 불가능한 일들일 텐데…….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된다.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 자손들에게 알려주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오직 진실된 것만 알려주고 기억하게 해주는 일. 오늘 시간이 부족해서, 너무 급하게 움직여서 자세히 못 보고 지나간 곳들이 많아서 아쉽기도 하고 궁금한 게 덜 풀린 것 같지만 그래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돼서 뜻깊은 활동이었던 것 같다. 이런 기회가 흔히 오는 게 아닐 텐데 그 기회를 잡은 것 같아서 뿌듯하다. 나중에 내가 커서 아이를 낳는다면 오늘 갔던 곳에 가서 진실을 자세히 알려주고 싶다. 

백산고 1학년 오은서

 

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을 다녀오고

쌀쌀한 날씨로 추운 11월 3일, 오늘은 광주 민주화운동 역사기행을 가는 날이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말하자면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이다. 이런 뜻 깊은 민주화운동을 박근혜 정부 때 훼손시키려 했던 것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나는 평소에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도 많기도 했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었다. 또 5·18광주 민주화운동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당시 사람들의 아픔, 진심, 성원을 알고 싶어서 참가했다. 부안고만 가는 것이 아니라 백산고, 부안여고도 같이 간다고 해서 좋았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8시 30분에 목원 웨딩홀로 모여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다. 가면서 선생님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잠깐 알려주셨다. 들어 보니 해방부터 촛불 시위까지 우리나라는 해방되자마자 미국과 (구)소련의 점령지였다. 신탁통치로 몇 년간 지배당하면서 결국 분단이라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또 이승만이나 전두환 등의 독재정치로 인한 그 당시 사람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5·18민주화운동 이후부터 비로소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것 같았다. 2년 전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제로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가 이루어졌는데, 프랑스 혁명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무력을 쓰지 않고 순수 평화적인 민주 정신으로 박근혜를 탄핵시킨 우리 국민들이 대단하고, 이런 국민들의 성원이 국가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첫 번째로 간 곳은 구 전남도청 일대였다. 여기는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총을 쏜 곳이라고 한다. 이런 발포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하여 투쟁이 한층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걷다 보면 5·18 민주광장도 보이는데 거기에는 시계탑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5시 18분에 종을 쳐서 민주화운동을 잊지 않는 광주 시민의 모습이 내 마음에 새겨졌고, 아직도 실종자분들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겁고 꼭 실종자분들을 다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광장의 분수대에서 시민들이 매일 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나왔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대동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대동세상은 ‘함께 더불어 살자’였다. 광주를 위해, 아니 대한민국을 위해 광주 시민들이 힘을 합쳐 신군부에 맞서 싸우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구 전남도청을 보면 살짝 훼손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실은 일제가 옛날에 전남도청을 세웠는데 정부가 없애려 하자 광주 시민들이 반대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박근혜 정부 때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훼손시키려 했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전남도청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5·18자유공원이었다. 이곳은 옛날에 군부대였다. 상무대라고도 불렸다. 이곳에서 ‘5·18 실제 영상’을 잠깐 봤는데,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때리거나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체포된 순간부터 참혹한 고통이 시작됐다. 진압군들은 땅바닥에 엎드린 연행자들 등 위를 군홧발로 쿵쿵 짓이기며 걸어 다녔고, 고개를 들면 곡괭이 자루로 내리쳤다. 또 굴비처럼 줄줄이 엮어 끌고 가서 트럭에 태울 때는 마치 어시장에서 갈고리 생선을 찍어 올리듯 태웠다. 감옥에서는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지시에 불응하면 쇠창살에 매달아 놓고 곤봉과 몽둥이로 매질을 하였다. 매질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쇠창살에 거꾸로 매달아 놓기도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무참한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직접 감옥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조금 앉아 있었던 것도 엄청 힘들었다. 그 당시 시민들이 이런 일들을 겼으며 견뎠다고 생각하니 참 대단하고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택시운전사를 본 사람이면 독일 기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위르겐 힌츠페터이다. 당시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광주는 대한민국 안에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힌츠페터와 같은 외신기자의 목숨을 건 취재 덕분에 광주학살은 더 이상 묻히지 않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또 죽으면‘광주에 묻어 달라.’는 힌츠페터 기자의 유지에 따라 실제로 손톱과 머리카락 일부가 5·18 옛 묘역에 있다고 한다. 힌츠페터가 한 말 중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록했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가도 알고 있었지만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이 말을 보고 광주의 시민처럼 그 분의 진심이 느껴졌고, 자국의 사건이 아닌데도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걸면서 취재를 한 것에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외신기자들조차 민주화운동을 알리려고 했는데, 그 당시 언론은 광주 시민들을‘폭동’과‘폭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 언론들이 광주에 대해 아예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집권자들 때문에 사실을 그대로 못 전했다고 한다. 참, 이런 것을 보면 언론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언론이 사실 그대로 보도를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5·18 민주묘지였다. 이곳은 문재인 정부가 직접 가서 참배도 하고 묵념을 한 곳이다. 나도 학생 대표가 참배하는 것을 보고 묵념을 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시민들의 죽음이 헛되면 안되겠구나!’생각했다. 또 마음이 무거웠고 그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5·18 민주항쟁 추모탑을 봤는데 엄청 크고 아름다웠다. 광주 시민의 정신이 깃든 것 같았다. 추모탑 근처에는 12간지가 있는데 돼지와 쥐는 없었다. 이는 5·18정신은 계속 간다는 뜻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때 돌아가신 분들의 묘를 돌아보면서 고요하고 경건한 마음이 새겨지고, 해설을 들으면서 묘를 보니까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이번 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잊으면 안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곧 5·18 민주화운동을 잊으면 이런 끔찍한 상황이 다시 연출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상황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우리가 5·18 민주화운동을 잊지 말고 계속 기억하면서 민주화정신을 항상 새겨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내가 그 시절 그곳에서 살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과거에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우리가 있는 것이고 현재의 우리가 있기에 미래의 그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의 불굴의 의지와 민주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광장 쪽을 걷다 보면 지금도 5·18 민주화운동의 실종자를 찾는 문구가 보인다. 하루빨리 실종자를 찾았으면 좋겠고, 상처가 아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을 본받고 싶고 마음에 새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서 후대에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안고 1학년 윤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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