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1909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개성 호수돈여고(1928)와 이화여전을 나와 시를 쓰는 한편 연극활동을 했다. 잡지『삼천리』의 기자를 거쳐 경성방송국 조선여성 교양강좌과로 들어간(1936) 모윤숙은 이미 시집『빛나는 지역』(1933)을 낸 데 이어 유명한 일기체 연가인 『렌의 애가』(1937)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모윤숙은 1940년경부터 자신의 회고록과는 다른 활동을 한 여러 기록들을 남겨두고 있다.

●‘조선의 딸’보다 ‘동방의 딸’

일제의 어용화를 위하여 만들어진 조선문인협회 문예대강연회(1940)의 연단에 서는 것을 시작으로 모윤숙은 임전대책협의회(1941), 총독부 학무국이 만든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9) 등 각종 여성 관련 친일단체에서 활약을 했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살려 조선 여인으로 하여금 고루한 민족 관념을 버리고 일본의 서양 정복전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제를 노래한 시「동방의 여인들 (『신시대』, 1942. 1)에서 모윤숙은 이렇게 노래한다.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국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전쟁의 단말마 속에서 내핍을 강조하면서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는 ‘동방의 딸’을 강조한 이 시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여성들에게 교화시킨 전형적인 작품의 하나다.

●메논 설득에 한몫

인도인 쿠마라 P.S.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위원장에 선출되어 유엔소총회가 1948년 2월 26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결의할 때까지 많은 활동을 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부터 단정수립 반대국이었던 인도의 대표로서 한국에 온 메논은 모윤숙의 노력(?)으로 하지 중장을 떼어버린 채 이승만과 단독 대좌를 했다.

이승만으로부터 메논을 설득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받은 모윤숙은 일제 때부터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자 결혼 중개인이며, ‘영운’이라는 자신의 아호까지 지어주었던 이광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상의했다.

단정수립 확정 후 메논이 한국을 떠난 뒤의 심경을 모윤숙은 “고마운 사람! 나만 아는 잊을 수 없는 은인.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우정과 신의에 가득 찬 영혼을 가진 세계의 외교관이었다. 이 박사는 실로 그 은혜를 잊을 수도, 또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라고 썼다.

이 중요한 역사적인 고비를 넘긴 뒤 모윤숙의 활동은 차라리 사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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