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681호(9월21일자)와 682호(10월5일자) 두 차례에 걸쳐 해창 갯벌에 세워진 장승에 관한 기사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 기사를 접하고 20여 년 간 장승과 벅수를 연구해 오신 황준구 선생이 장승이라는 말 대신 ‘벅수’가 옳은 표현이라는 점, 그리고 부안이 예로부터 매우 귀한 벅수와 솟대가 많은 곳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담은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부안에 살면서도 미처 몰랐던 내용이 많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전재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바라며, 귀한 글 보내주신 황준구 선생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말

 

우리나라 최초로 명문이 표현된 부안읍성의 서문안짐대당산에 세워진 벅수다.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하여 1689년에 세운 것으로 중국의 당나라와 주나라의 장군을 표현한 두창벅수다.

누가 감히 ‘벅수’(法首)를 ‘장승’(長栍)이라고 부르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수호신 역할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장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거리다. 벅수를 보고 장승이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찌꺼기다.
장승이란 것은 본디 신라 21대 소지왕에 의해 서기 487년 우리의 땅과 큰길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도입된 역참제도의 한 부분으로 길을 가는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5리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에서 세우고 나라에서 관리를 한 푯말을 우리 조상들은 장승이라 하였다.
장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와 이웃마을의 이름과 거리, 방향을 세밀하게 적어서 세웠다. 장승은 주로 나무로 만들어 세웠으며, 장승의 표정은 그 무렵에 중국에서 발생하여 길을 따라 몰려오는 추잡한 귀신들과 무서운 유행병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미르(龍) 혹은 치우(蚩尤)의 괴팍한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여 큰길의 가장자리에 세우고, 그 곳을 장승배기(장승박이)라 하였다. 지금도 우리 땅에는 1200여 곳의 옛 장승배기 터가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때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며, 국도의 5리나 10리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세우고 모자의 꼴을 씌워서 몸의 가운데에는 지명과 리수를 썼다. 한어(漢語)로는 ‘土地老兒’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토지노아’를 ‘댱승’으로 표현하여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몽어유해’(蒙語類解,1768)와 ‘역어유해’(譯語類解,1768)에도 쟝승과 댱승이 함께 쓰여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문화를 망령된 신앙(迷信)으로 취급하여 가치를 깎아 내렸고 1895년 역참제도의 폐지로 우리 땅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없어진 장승에 벅수를 포함시켜 장승으로 쓰고 부르도록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다. 그들은 1912년부터 준비하여 1933년에 완성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확정시키고 발표를 하여 벅수를 장승으로 변질시킨 무뢰한들이다.
조선시대 때의 여지도서와 대동여지도에는 부안 땅의 장승배기를 일곱 곳으로 기록하였다.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부안군 행안면 대초리, 부안군 행안면 삼간리가 장승을 세웠던 부안 땅의 대표적인 장승배기였다.
벅수(法首)란 무엇인가? 벅수는 우리 민속신앙의 뿌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과 절집, 그리고 성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1520년 일십당 이맥(李陌)이 목숨 걸고 쓴 상고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百逸史) 개국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벅수는 선인(仙人) 혹은 신선(神仙)을 뜻하며 선인왕검(仙人王儉)이 곧 선인법수(仙人法首)다>라고 표현하였다. 벅수는 단군 할아버지를 뜻한다.
실제로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에는 환웅과 왕검을 표현한 벅수가 세워져 있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0호다. 이 벅수는 우리나라 벅수 탄생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선인계의 벅수로 1700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매우 귀중한 자료다.
그리고 삼신오제본기에는 <하늘 아래, 동서남북과 중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은 천하대장군이고 지하의 다섯 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지하대장군이라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벅수를 뜻하는 말이다. 태백일사에는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하여 금지된 책으로 지정되어 깊숙하게 숨겨져 왔었다. 350여년이 지난 개화기 때 이맥의 후손 해학 이기(李沂)에 의해 그의 제자들에게 알려졌고, 천하대장군과 지하(여)대장군이라는 벅수가 우리 땅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과 140여 년 전의 일이다.

역참제도의 폐지로 지구상에서 오직 한 점만 남아있는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장승이다.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이 1890년 인천의 만수동 장승배기에서 훔쳐간 것이다.

우리나라 벅수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이며 최초의 벅수는 강원도 양구 광치령의 고인돌들 틈에서 1969년에 발견된 ‘선돌멩이’라고 하는 선사시대의 돌 벅수다. 명문이 없는 민짜벅수로 우리 조상들에 의해 미륵의 모습으로 전승되어 계속하여 세워져 왔으며, 1600년 무렵부터 중국 땅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역병과 잡귀를 막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벅수의 가슴에 명문을 쓰거나 새기기 시작하였다.
벅수에서 명문이 최초로 발견된 곳도 역시 부안 땅의 서문안 짐대당산(부안읍성)으로, 미술평론가 이태호와 유홍준에 의해 1980년 무렵 발견되어 알려졌다. 그들도 역시 벅수와 장승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하고 장승이라고 표현하였다. 서문안 짐대당산의 벅수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오목새김 되어있다. 우리의 토종 벅수가 아닌, 중국의 주나라장군과 당나라장군을 표현한 이름표를 달고 있는 두창벅수(痘瘡法首)다. 1689년에 세워졌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8호다. 이들 두 벅수를 우리의 민속학자들은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였고, 할머니장승과 할아버지장승으로 나눔 하였다. 수염이 표현된 벅수는 할아버지이고 수염이 없는 벅수는 할머니란다. 음양을 따져 분류하였다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수염이 없는 벅수들 대부분이 수염이 표현된 벅수들 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크고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벅수를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의 황제나 장수들을 조선 땅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임명을 하여 중국에서 떼를 지어 밀려오는 역병과 귀신들을 막아내기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였다. 1700년을 앞뒤로 하여 만들어진 벅수들의 대부분이 중국의 장수들을 표현한 두창벅수들로 주장군(周將軍) 당장군(唐將軍)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아미산하교(娥眉山下橋) 보호동맥(補護東脈) 왜주성선(媧柱成仙)등으로 표현된 중국의 신화 속 인물들을 표현하여 그려낸 벅수들이다.
우리 토종 벅수들의 명문은 주로 1800년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방축귀대장군(五方逐鬼大將軍) 류가 주로 표현되었고, 후반에는 태백일사가 공개된 영향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장군이란 의미는 우리 정서에 어긋난 표현으로 심각한 성차별을 하고 있다. 지하대장군이 올바른 표현이다. 여장군으로 계속 고집을 한다면 천하대장군은 천하남장군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솟대(짐대)는 돌이나 나무기둥 위에 새의 모양을 만들어 올려놓아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주는 <신의 기둥>을 뜻한다. 화재와 가뭄, 질병과 재앙을 막아주고 해결하여 주는 우리의 땅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벅수와 함께 세워지면 복합당산이라고 한다. 주로 풍수사상과 입신양명의 상태에 따라 마을의 생긴 모양새가 행주형(行舟形)의 꼴을 하고 있는 마을에는 배의 돛대를 상징하는 솟대(짐대)를 세우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사는 곳에는 화주대라고 하는 솟대를 세웠다.
부안 땅의 솟대(짐대)들은 주로 마을의 생긴 꼴이 행주형이라는 풍수설에 의하여 세워졌다. 행주형인 마을은 배가 가벼우면 쉽게 파선될 수 있음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돛대의 역할을 하기 위한 큰 돌기둥을 세우고 배를 무겁게 하여 마을을 안정시켰다는 통일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창북마을의 다섯 방향을 지켜주는 짐대(솟대)로 새마을운동 때 네 곳의 벅수는 소멸하였고 중앙 짐대만 남아있다. 독창적인 표현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 솟대로 알려져 있다.

부안 땅은 벅수와 솟대의 본향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명문이 표현된 벅수와 솟대가 보존되어 있고, 최초로 우리의 조상을 표현한 단군왕검과 환웅을 뜻하는 벅수가 세워져 있으며, 우리나라 유일의 절집당산에는 오래된 나무벅수가 보존되어 있는 우리민속문화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부안 땅에는 12곳에 벅수와 솟대를 세운 전통 당산들이 오밀조밀하게 밀집하여 있다.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 5방짐대당산,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 머리낭자(전북민속자료, 제17호),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서문안짐대당산(중요민속자료, 제18호),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동문안짐대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짐대당산(전북민속자료, 제19호), 부안군 하서면 언독리 섶못당산, 부안군 백석면 죽림리 공작당산(전북민속자료, 제20호),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 단군벅수(전북민속자료, 제30호),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리 웃선돌(전북민속자료 제6호),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우실당산, 부안군 위도면 대리 원당, 그리고 내소사 절집당산의 오래된 벅수는 부안 땅에서 오직 하나뿐인 나무벅수다. 지금도 보호되어 모셔져 있다.
마을마다 민속문화재로 등록된 보물들이 넘쳐흐르는 별천지에서 누가 감히 벅수를 장승이라 부르는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은 장승이 아니라 벅수다. 진리의 우두머리이며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 할아버지가 곧 벅수다.
오늘날의 벅수를 표현한 조형물들은 하나같이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하품하는 꼴을 하고 세워져 있다. 모두가 쓰레기다. 그리스 로마의 판테온(Pantheon, 萬神殿)에 모셔진 수호신들은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의 벅수문화와 비교하여 조목조목 따져볼 필요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입으로만 찬란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외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안 땅의 벅수와 솟대들은 다르다. 부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립되고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만신당을 찾아온 느낌이다. 호화찬란하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더욱 아름다운 낙원으로 변화된다.

황준구

그래픽 디자이너
홍익대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 전공
선경그룹과 현대중공업 홍보실 근무
20여 년 동안 장승과 벅수에 대해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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