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갑(閘)은 물문, 수문(水門), 문을 여닫다. 문을 여닫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 등으로 해석된다. 배수갑문(排水閘門)은 댐이나 하구언 또는 배수로의 하류 끝의 배수구에 설치되어 홍수 시에 바깥수위가 갑문 안쪽보다 높아져 역류할 때는 수문을 닫아 외수의 유입을 방지하고 내수위가 높아졌을 때는 수문을 열어서 방류한다. 갑문을 바다와 만나는 하천 하류에 설치한다면 농사철에 수문을 막아 민물을 농사에 이용하는 저수지 역할도 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여 농사의 피해도 줄일 수 있다.
  고부천에 팔왕갑문이 만들어지면서 하류에는 수류의 변화가 생겨 수해시의 위험과 만조시에 연안옥토의 붕괴와 유실이 심했다.(동아일보 1933)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서 하장 갑문이 추진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농지를 개간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물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징구지 앞에 갑문이 필요했다.
  하장(下長) 갑문(閘門)은 지금도 건재하다. 여기에는 ‘고부천(古阜川) 수문(水門) ○ ○ 10년 7월 준공’이라고 쓰인 머릿돌이 있다. 부안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비석 등에서 뭉개진 글자를 많이 볼 수 있다. 년대 앞에 씌어진 ○ ○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는데, 소화(昭和)라는 일본 연호이다. 여기에 1925년을 더하면 서기(西紀)가 나오니 환산하면 하장갑문은 1935년 7월에 만든 셈이다. 그리고 수문 뒤쪽으로 사람들의 통행을 위하여 도로를 냈다.
  하장리(下長里)는 옛 지명인 하동방의 ‘하(下)’자와 긴곶이의 ‘긴(長)’에서 따와서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장리라는 지명보다는 ‘징구지’라고 부른다. 이곳의 수문을 속칭 물문 혹은 공굴이라고도 불렀다. 공굴이란 명칭은 ‘콩크리트’에서 온 말로 추정한다.(김형주, 『부안 땅이름 마을이름』) 지금도 콘크리트 만드는 것을 공구리친다고 한다.
  계화도 쪽에서 들어오는 바닷물은 고부천을 거슬러 주산면의 밤개(율포) 앞 개양섬까지 드나들었다. 평교, 영원면의 노교까지도 바닷물이 드나들어 이곳을 옛날 갯벌이라는 이름의 ‘구개’라고도 부른다.
  하장리 갑문이 설치되기 전에는 하장리 앞들의 대부분은 갈대밭 갯벌이요 나문재 밭이었다. 거대한 공굴 갑문이 완공되자 인근 각지에서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형주는 옹정마을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 마을 사람 여럿이 공굴 구경 간다기에 그 속에 끼어 구경을 갔다. 그 어마어마한 건축물에 압도되어 무서움이 엄습하면서 어른들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따라다녔다고 한다.
  백산 삼거리에 살던 아이들은 한참을 걸어 징구지갑문에 갔다. 물을 막는 거대한 문에는 고무바킹이 있는데, 이것을 칼로 떼어내서 모으면 공처럼 톡톡 튀었다. 감시원의 눈을 피해 고무를 떼어냈던 갑문에 대한 기억들이 아이들에게 많았다.
  이 하장갑문은 농사짓기를 위해 일제가 만든 거대한 건축물이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의 노동과 경제 착취를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는 일제잔재 청산을 주장하고 만행을 기억하자며 맨 날 목소리를 높이지만 수탈의 산 증거를 간직하는 데는 소홀하다. 증거가 없는 역사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상대가 신화라고 억지주장해도 명백하게 대응할 방법이 없다. 징구지갑문을 보존하여 역사 자료로 쓴다면 자라는 세대에게 좋은 교육장소가 될 것이다. 거기에 징구지 갑문에 얽혀 고생한 어른들의 얘기를 곁들인다면 더욱 살아 있는 역사교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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