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 장승-새만금방조제를 등진 채 해창갯벌에 버티고 서 있는 장승들. 일부는 쓰러져 있고 일부는 상단부가 부러진 채 썩어가고 있다.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갯벌이 보존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며 해창 다리에서 서북쪽 300걸음 갯벌에 매향합니다”
바람모퉁이를 돌아 해창벌 입구에 있는 매향비 내용이다. 이 비는 지난 2000년 1월 30일,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을 주축으로 전북환경운동연합 등 7개 단체가 갯벌을 지키려는 마음을 모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내용을 읽을 수 없다. 비석이 주춧돌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기 때문이다. 비석 위로는 무성한 풀과 나뭇잎이 무심하게 글자를 가리고 있다.
매향비 아래 쪽 갯벌이었던 곳에는 장승들이 신산스런 모습으로 하늘을 이고 서 있다. 애초 70여 기였던 것이 지금은 4~50기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제 몸 하나 가누는 것도 힘에 부쳐 보인다. 전염병과 잡귀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뭇 사람들의 소원까지 이루어주던 강건함은 오간 데 없다. 이들은 왜 이 쓸쓸한 곳에서 여기저기 썩고 쓰러지고 목이 잘린 채 나뒹굴고 있을까.

장승이 바다로 온 까닭은?

그해 3월 26일, 이곳에서는 매향제 이후 ‘바다로 간 장승제’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의 제가 열렸다. 현장미술가 최병수를 비롯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승 깎는 목수들이 부안 땅에 스며들었고, 팔도 각지에서 가져온 나무로 장승을 깎아 세우고 제를 올렸다.
“나리님 나라님들이 머리를 모았습니다/바다를 막자고 세계 최대의 똥통 하나 만들자고/국민혈세 펑펑 쓰며 이 산 저 산을 마구 깎아 내립니다/덤프트럭 포크레인 소리가 지축을 흔들어댑니다/바다를 막는 소리입니다/반지락 농발게가 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굴 따고 백합 잡아 자식들 키워 낸 울 엄니 한숨이 길어집니다……”
새만금사업의 허구성을 꿰뚫어 보고 각지에서 모인 이들은 하늘과 바다를 향해, 또 자신들이 세운 장승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장승이 이곳에 서 있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보다 못한 천하대장군님 지하여장군님 화가 났습니다/그리고는 바다로 갔습니다/바다를 지키겠다고/뭇 생명을 품고 있는 저 갯벌이/절대로 육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수천 년 동안 살뜰하게 생명을 품고 키워온 갯벌이 죽음의 땅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새만금대장군, 갯벌여장군, 평택호대장군, 관악산여장군, 안산시화대장군, 창원·마산수질오염지킴이, 강동송파철새대장군, 유종근환상퇴치장군, 석산지킴이장군, 여주·이천새만금지킴이, 시흥오이도여장군, 농게대장군, 백합여장군, 당진새만금갯벌사랑, 과천갯벌여장군, 비무장·광릉숲생태보전대장군, 대구생태지킴이, 목포습지보존지킴이, 경주자연과함께하는삶 등등 이름도 모양도 제각각인 70여기의 장승들이 버티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해창 갯벌을 수호하고 나선 것이다.

비폭력 평화투쟁 ‘삼보일배’

이 장승의 신통력 때문이었는지 이후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1년이 지난 2001년 4월 8일 불교가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해 '새만금갯벌 생명평화 법당'을 열었고, 이어 천주교가 '새만금갯벌 생명평화 기도의 집’을, 그 해 12월 21일에는 개신교가 '새만금 생명교회’를, 2003년 3월 8일에는 원불교가 ‘새만금 생명 보은의 집’을 여는 등 4대 종단이 모두 동참해 새만금사업 반대에 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2003년 3월 28일, 마침내 문규현 신부와 수경스님,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 등 4대 종단을 대표하는 성직자들이 해창 갯벌에서 서울까지 순례를 떠났다. 장장 305km에 이르는 먼 길을 세 걸음 떼고 절 한 번, 삼보일배를 하며 65일 동안 길바닥에 가없는 땀과 눈물을 뿌렸다.
이들의 비폭력 평화투쟁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개발’을 상징하는 새만금방조제 너머에 ‘생명’을 상징하는 갯벌이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 챘다. 또한 ‘삼보일배’라는 운동방식은 그 후로도 생태·평화·환경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마도 해창벌 장승들이 이들 성직자들의 순례길에 함께 했으리라.

장승, 잊혀지다

하지만 그 해 부안에서 터진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새만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일거에 흡수해 버렸다. 부안 군민들은 당장 핵폐기장을 막아내는데 절박했고, 여타 시민환경단체들도 부안군민의 투쟁에 힘을 보태느라 새만금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다. 1년여의 끈질긴 투쟁 끝에 마침내 핵폐기장을 막아냈지만, 새만금과 장승의 존재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 사이 백합·동죽·바지락 등 죽은 조개껍질이 해창갯벌을 하얗게 뒤덮었고, 철새들은 굶주림에 지쳐 둥지를 떠났으며, 백합을 캐던 어민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영세자영업자로 전락했다. 장승만이 밑동이 뿌리째 썩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 죽음의 땅을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 격포행 4차선 도로가 새로 날 때는 농어촌공사 측에서 해창 장승벌을 가로 질러 길을 내겠으니 장승을 철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문규현 신부 등이 나서 일단 막기는 했지만,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개발론자들은 언제고 기회만 있으면 장승을 치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들

장승이 아주 잊혀 진 것은 아니었다. 실낱같은 인연이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장승벌에 새 식구가 둥지를 틀었다. 새만금갯벌여장군과 파타고니아장군이었다. 매달 새만금 환경조사를 하고, 매년 해창갯벌에 모여 장승을 돌보던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회원들이 2017년 10월 새 장승 2기를 깎아 세운 것이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관계자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새만금 반대를) 염원했던 장소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장승벌을) 보살펴 왔다. 우리에게는 일종의 성지와 같다”면서 “현재는 황폐화 됐지만 계속 관리를 함으로써 (개발론자들이) 함부러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돌 볼 예정”이라고 담담하게 밝혔다.
이들은 다음 달 첫째 주 토요일인 6일, 1박 2일 예정으로 이곳에 모여 새로운 장승도 세우고 토론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부안에서도 작은 꿈틀거림이 감지된다. 장승이 처음 세워질 때 참여했던 부안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장승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쓸쓸함이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제 그만 부끄럽자는 작은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 군민은 이렇게 말했다. “몇 년 후 잼버리대회가 열리는데, 세계 청소년들에게 보여 줄 것은 사실은 새만금 방조제가 아니라 이 장승들이다. 교육적 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우리 부안사람들이 덜 부끄럽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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