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타루비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둘은 1년 터울의 최희성 · 은성 형제로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며 읽는 부안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함께했다. 이 행사는 부안교육문화회관에서 야심차게 시도하는 부안의 역사 · 문화 현장을 체험케 하는 시간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거리의 역사교육이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넣어주겠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움직이는 인문학 체험’이랄까?

이곳은 상서 소재지와 감교 사이에 있는 청등마루이고, 큰 싸움을 기억케 하는 타루비(墮淚碑)가 서 있다. 상서 청등에서는 지금부터 421년 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왜구(倭寇)를 상대로 싸웠던 핵심 인물은 도곡(挑谷) 이유(李瑜1545~1597) 이다. 그는 대사간 장영(長榮)의 아들로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의 숙부인 이억영(李億榮)의 양자로 입계하여 양아버지를 따라 부안의 상서면 도화동(桃花洞)으로 이거하여 맑은 시내 물가에 초당을 짓고 은둔하면서 경사를 강론했다. 여러 차례의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의 처가는 부안읍 옹정으로, 부안 김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유는 고경명, 조헌, 김천일의 진중에 의병과 군량을 모아서 보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부안에 침입하자 그는 의병을 이끌고 상서면 청등에서 적군과 3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왜적이 군사를 정비하여 침입하자 진퇴를 거듭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부인도 남편을 대신하여 의병을 지휘하다가 역시 전사하였다. 왜적들은 이유의 집까지 쳐들어가서 집과 귀중한 문권 등을 태워버렸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도 부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겨우 옷가지와 신발 등을 수습하여 초혼장으로 장사를 지내니 부부의 슬픈 참사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 넋을 위로하고 부부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지역사람들은 청등고개 마루에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이 비만 보면 이유 부부의 슬픈 죽음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린다는 ‘눈물의 비’다.

상서의 저기〔돼야지터, 퇴왜지(退倭地)〕 마을부터 호벌치 고갯마루까지는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개암사를 내려 다 보는 주류성에서는 백제 부흥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 싸움은 당나라와 신라를 상대로 백제부흥군과 일본이 벌인 큰 싸움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줄포만을 통해 호벌치 언덕을 넘어 부안을 노략질하려는 왜구를 상대로 부안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정유재란 때 채홍국 등이 왜적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곳도 호벌치다.

부안 사람들은 23번 국도를 이용하여 줄포와 흥덕으로 나가지만 도로 옆에 서 있는 타루비를 무심히 지나친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으니 이곳 청등 싸움은 관심에서 많이 밀려나 있다.

청등을 지나는 분들이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면 타루비를 볼 수 있고 이유 부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신채호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다소 무거운 얘기를 내놓지 않아도, 추석에 조상의 묘를 살피듯 ‘역사의 조상’을 기억하는 것이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이다.

사진 속의 부안동초등학교 1,2학년인 이들의 얼굴은 밝다. 희성은 축구 등 운동을 좋아하고, 동생은 곤충 등 자연관찰을 좋아한다고 한다. 타루비 앞의 배롱나무도 활짝 웃었다. 이들의 웃음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나라와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 이유 부부, 이들과 함께한 부안의병들, 역사의 기억 뒤에 묻힌 이름 없는 전사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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