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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부안민중사를 마치며) “이제 지역 교과서를 고민할 때”

작년 9월 22일(633호) 본지 창간 13주년 특집으로 시작한 ‘부안민중사’가 지난 8월 17일 43회를 마지막으로 1년간의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필자가 직접 2회에 걸친 에필로그를 통해 마무리를 하긴 했지만, 독자의 시각에서 보다 객관적인 갈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요구에 따라 조촐한 좌담회를 마련했습니다. 부안독립신문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그 흐름을 바꿔놓곤 했던 ‘민중의 땅’ 부안을 고찰하는데 고작 1년간의 기획이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그동안 ‘부안민중사’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말

 

참석자

○ 최자웅 (필자)
○ 고영조 (새만금도민회의 공동대표)
○ 이춘섭 (종합복지관 관장)
○ 정하영 (백산고 교장)

 

우병길  우선 어려운 걸음 해 주신 참석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자유롭게 말씀하시는 방식이 좋을 것 같은데요, 우선 집필을 맡으셨던 최자웅 신부님이 연재를 마친 소감부터 말씀해 주실까요?

최자웅 신부

최자웅  우선 정말 지면을 내 주신 부안독립신문사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요, 처음 이 기획을 제안하고 추동해주신 고영조 전 의원께도 감사드립니다. 전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특별히 부안민중사를 소재로 하게 돼서, 집필하는 1년 동안 많이 공부하면서 43회까지 끝을 잘 맺을 수 있게 됐고요, 아무래도 창간기념 특집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지역에서 그런 특집을 작정하고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지역 민중사 작업만이 아니라 한국민중사가 통사적으로 의외로 약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학자도 많고 나름 작업도 많이 돼 왔지만, 적어도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사’를 제외하고는 전체 역사를 담아내는 자료가 없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러니 부안을 비롯해 지방 민중사는 자료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시도 자체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 놀라면서도 한편 반가움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부안민중사의 깃발을 통해 호남이나 전주 민중사 등 여타 지방 민중사로 더 확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적다 보니까 자료의 빈곤 문제가 심각했는데, 역사에 있어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가, 왜 민중들의 소중한 움직임을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안민중사를 통해 최소한 하나의 흐름과 맥락을 만들어 놨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집필을 하는 과정에서 기초 작업이랄까 이런 부분에 도움을 주신 김형주 선생이나 정재철 선생께도 감사드리고, 그동안 꾸준히 자료를 축적해 오신 이분들이야 말로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가, 하는 점도 새삼 느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번 부안민중사를 통해 일반적인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가령 현재 부안에서는 유형원이 개혁의 표상으로 돼 있는데,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유형원보다 더 혁명적이었던 허균과 부안과의 관계라든지 상징성이라든지, 나아가 동학의 김낙철 선생의 공과 과와 함께 상대적으로 묻혀 있었던 김기병과 같은 인물들의 역동적이고 의로운 활동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대담 중에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기로 하지요.

이춘섭 관장

이춘섭  부안독립신문이 발간 때부터 지역의 뿌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해왔다는 점에서 부안민중사를 1년이나 연재했다는 점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보고요. 사실 매회를 꼼꼼히 정독하진 않았지만, 이번 연재에서 나름 부안의 뿌리나 사람을 발굴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고, 이런 바탕 위에서 앞으로는 각론에서 더 찾아내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최 신부님은 아웃사이더이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을 많이 건드렸는데, 백산기포나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해석도 있었고, 해방공간에서 김철수 선생을 재조명 하는 부분이나 부안 출신 가운데 이을호 선생에 관한 부분도 귀중한 발굴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어려운 과정인데 집필하시느라 고생하셨고 아마 작가께서도 긴장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저작을 보면서 부안이 만만한 지역이 아니다, 뿌리가 있는 지역이다, 라는 점을 느꼈으면 좋겠고 또 발굴했다는 데서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하영 교장

정하영  그동안 살면서 단편적으로 들었던 역사적인 내용들을 이번 연재를 통해 최 신부께서 정리를 다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지표를 마련해서 준비를 해 나가느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말하자면 현재에서 앞으로 어떤 미래 비젼을 가지고 준비할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봅니다.

고영조  우선 1년 동안 신부님 고생하셨고요, 지면을 할애한 부안독립신문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하셨다시피 이번 연재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겠죠. 또 근대사 부분에서는 누구 구술할 사람도 없고 결국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현대사 부분은 최 신부님이 부안사람들을 잘 알면 두루 탐사취재

고영조 대표

를 한다든지 그랬을 텐데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깊이나 디테일에서 조금 못 미친 게 아닌가 하는…… 반면 부안 출신이었다면 자기 주관이 들어가기 쉬워 객관적이지는 않았겠죠. 그게 부안에 살지 않는 아웃사이더의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대사 부분에서 탐사 취재라든지 깊이 면에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고생하셨는데 싫은 소리 해서 죄송하네요. (웃음)
이춘섭  아웃사이더로서의 장점과 단점이 다 있는데, 조금 깊게 들어갈 필요성은 앞으로 과제기도 하고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전에 용산 참사 때 미전향장기수이신 임방규 선생님을 만났는데 임 선생님이 저더러 요즘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부안에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임 선생님이 “이 사람이 내 허락도 없이 부안에 있느냐”고 그러세요. 그땐 아무 것도 모르고 왜 저러시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임 선생님이 부안 출신이세요. 임 선생님도 한 시대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인데 이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싶어서 아주 다른 느낌으로 부딪쳐 오더라구요. 출향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고, 부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큰일을 해놓고도 그 의미를 모를 수도 있어요. 방폐장 싸움만 해도 밖에서 보면 시민운동의 획기적 전환이었는데 안에서는 평가절하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런 양면의 통합적인 정리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정하영  최 신부님, 집필하시면서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게 있던가요?
최자웅  첫째는 자료였어요. 부안민중사라는 시각에서 자료를 찾다 보니까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 있고요. 또 하나는, 하나로 꿰는 통시적인 역사 해석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외롭게 개척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동시에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부안에 연고를 두지 않고 부안민중사를 쓴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부안 분들에게는 논란이 되는 점이 있더라구요. 가령 김상협이나 이런 인물들에 대해 민중사적 입장에서 보면 반민중적일 수밖에 없어 혹독하게 평가를 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 부안의 일부 노인층이나 보수적인 분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분들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그런 정서가 자체가 싫다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것도 현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앞으로 부안에서 허균이나 지운을 부안의 상징으로 다시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지운선생은 국립묘지에 안장도 되고 복권도 됐지만 고향인 부안에서는 아직 탄탄하게 정립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또 신석정과 서정주는 동시대의 뛰어난 시인이지만, 민중사적 시각에서 보면 석정은 민족 시인으로, 또 분단에 희생당하면서 꼿꼿이 살다간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과거사가 드러나면서 이제는 슬픈 존재가 돼 버렸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안에서는 석정을 제대로 못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고, 그래서 허균으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답고 뚜렷한 가치에 대해 보다 선명하게 상징화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춘섭  요즘 각 지방에서 이야기를 상품화하고 있는데 사실 사상과 이론적 받침이 없어 공허하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 동학 행사도 굉장히 박제화 돼 있어요. 행사를 위한 행사가 돼 버린 거죠. 우리도 이제 허균이나 이런 인물과 사상을 좀 더 깊이 있게 전문가들의 토론을 통해서 관광자원화하면 내용이 있는 이야기로 살아날 수 있겠죠. 관광 따로 스토리텔링 따로 역사 따로 가면 문제가 있어요.
최자웅  조금 더 보충하면, 한국의 우반동이 유토피아이자 개혁의 산실로서 여태는 유형원 한 사람만을 상징화 시켰었는데, 제가 연재를 하면서 보니까 허균이 있더라 이거예요. 또 허균은 그냥 허균이 아니라 유형원보다 한 세대 앞서 있지만 여러모로 더 혁명적이고 삶도 다채롭고 철저했어요. 그래서 부안에서 허균을 상징화 할 수 있다면 많은 스토리가 가능할 겁니다. 매창만 봐도 유희경과는 천민적 신분의 동질성으로 서로 좋아했지만, 허균은 명문 거족 금수저여서 두 사람은 바로 이런 신분적인 이질성을 뛰어넘어 10년 넘는 플라토닉 러브를 했어요. 말하자면 매창을 유희경과의 단순 로맨스로 상품화하지 말고 허균을 넣을 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겠느냐는 겁니다.
고영조  아까 김상협에 대한 어르신들의 의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연재 중에 논쟁이 촉발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동학을 단순히 1894년 조병갑의 수탈에 대한 반발로 볼 것이냐, 그때까지 쭉 축적된 동학사상까지 포함해서 볼 거냐, 남접과 북접을 대립적으로 볼 거냐, 상호보완적으로 볼 거냐, 얼마든지 논쟁이 붙을 수 있죠. 일테면 부안에 장기수가 13명이 계셨는데, 전국적으로 군 단위에서 장기수가 가장 많은 곳인데, 어떻게 이 작은 동네에 장기수 선생이 그렇게 많을 수 있었는지, 핵폐기장 싸움 때도 인구 7만의 작은 도시에서 그런 큰 싸움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는 일정한 요인이나 배경이 있었을 거라고 보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보고요. 결국 그런 것들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김낙철 선생에 대한 견해도 저는 최 신부님과 좀 다른데, 해월 선생이 ‘꽃도 부안에서 피고 열매도 부안에서 맺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건 김낙철 선생을 매우 아끼기 때문에 나온 말이거든요. 실제로 1894년 동학이 휩쓸고 갈 때 부안은 정말 평화로웠어요. 왜 그랬는지? 그런 부분들이 다 논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우리 부안의 경우 핵폐기장 싸움 이후 시민운동이 굉장히 침체됐는데 이 요인은 또 뭔지, 이런 배경을 견인해보고 싶은 갈증이 있어요.
최자웅  현대사 부분에서는 많은 사람을 대면하고 심층취재 해야 했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나중에 심층취재의 속편 같은 것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요. 어쨌든 근현대 민중사의 흐름에서 그간 놓쳤던 부분을 발굴하고 싶었다는 점 말씀드리고요. 그래서 동학에서도 김낙철의 공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데, 사실 여러가지 논란의 소지가 있어 자칫 공격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김낙철 선생의 공과 과에 대한 균형을 맞추려 했어요. 결과적으로 잘못됐다는 소리는 없었어요. 김낙철 선생 때문에 동학 때 부안은 편안했다는 점은 사실이긴 해요. 하지만 대접주로서 북접이라는 한계를 명확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망하면서 김낙철 형제간을 비롯해 동학혁명군을 혹독하게 초토화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의병활동이 이어지는데, 사실은 동학으로 상징되는 부안의 민중적 에너지는 동학과 의병활동의 패배로 초토화 됐다는 점을 이번에 연재하면서 여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삼일운동 때는 부안이 매우 약했어요. 동진면의 일제 순사 출신이 초라한 지도자로 나설 정도였거든요. 그러다가 다시 부활한 게 지운 김철수를 비롯한 사회주의 지도자가 활동을 하면서 또 지운의 동생 김복수라는 인물이 나오면서 농민운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그러면서 해방 공간에서 전국적으로도 부안의 좌익이 강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죠. 사실 이런 부분은 현재 어르신들에게는 알레르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분명한 역사적 전거와 흐름을 가지고 이런 부분을 드러내야 하지 않느냐, 싶고요. 아울러 최유찬 교수나 이을호 선생을 조명한 것도 이번 연재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생각해요.
우병길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독자들께서 보시면 자화자찬이 심하다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편집국의 입장에서는 이번 연재를 하면서 의외로 독자의 반응이 미지근하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앞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단점이나 보완할 점을 지적하신다면요?
정하영  장단점이 있었죠. 제가 볼 때 좋았던 점은, 학교 다니면서 국사 따로 세계사 따로 배웠는데 이게 서로 연결이 안 돼요. 누구하고 얘기하다 보면 헷갈려서 전체적인 맥락을 놓친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최 신부님은 역사 전체를 다루셨기 때문에 간결하게 정리가 됐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안 좋았던 점은 1년 동안 방대한 양을 연재하다 보니까 지면 한 면을 다 채우고 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다 보니까 대충 넘어갈 때고 있고, 이번에 못 봤으니까 다음  번에 봐야지 그러다 놓치고 그랬거든요. 그러다 보니 감동이 없을 수밖에 없었구요. 그리고 신부님 글이 조금은 만연체잖아요? 양이 많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런 부분이 약간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최자웅  이번 연재를 하면서 우리 민족사나 지역사가 이렇게 참담하구나 하는 대목에서는 제 자신조차 질릴 때가 있었어요. 저야 스스로 맡은 과제이니까 긴 흐름으로 완성해야지 하는 책임의식이 있었지만, 현대사로 오면서는 거의 피와 통곡의 역사기 때문에 읽는 분들도 고통스러웠겠다 싶어요. 말하자면 민중사라는 콘텐츠 자체가 아주 처절하더라, 그 처절함을 우리가 다뤄냈다, 처절함도 단편적인 것은 재미있을 수 있지만 처절함이 통째로 죽 이어진다면 누구나 익숙하게 즐겁게 읽을 수는 없게 되죠. 못 미친 부분이 있을 지라로 전체적으로 부안적 현실에서는 따라오기 힘든 진실한 콘텐츠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춘섭  요즘 여러 지방에서 스토리 찾기에 혈안이 돼 있는데, 우리도 이번 연재물을 토대로 이야기도 만들고 관광산업으로 접목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최자웅  큰 줄기는 나왔으니까 이제부터는 디테일을 살려서 특화시키고 드라마화하고 대중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죠. 구체적으로 과거 역사적으로 부안이 어떠했는가와 현대에 와서도 70년대부터 부안에 만만치 않은 민중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제가 조명해 냈고, 그러한 면면한 흐름이 역사적인 전통과 아울러서 민주화나 생명운동 같은 부안의 놀라운 저력을 끌어낸 것이 아닌가 싶고요, 핵폐기장 운동도 매우 성공적인 쾌거였지만, 그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교육운동, 생명운동, 대안운동이 오늘에도 다시 시민운동과 함께 점화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아쉬움과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영조  이번에 부안독립신문에서 지역의 역사에 관해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공공적 방식으로 첫 발걸음을 뗐는데, 이런 움직임을 모태로 해서 지역 교과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강연도 듣고, 지역의 자긍심도 심어주는 계기도 되고요, 이 아이들이 객지에 나가 살더라도 자긍심이랄지 애향심이랄지 가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싶어요.
이춘섭  사실 지역사 뿐만 아니라 개인사도 단절이 있어요. 일단 자식들이 출향하고 나면 고향에 남아있는 부모의 삶을 구체적으로 몰라요. 장례식에 가 보면 상주가 자기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상가에서 조문보라는 걸 쓴대요. 조문 온 사람들이 고인에 대해 자기만 알고 있는 역사를 정리하는 거죠. 그게 모여서 향토사가 되고 그 지역의 독특한 역사가 되는 거죠.
고영조  지역교과서 얘기를 좀 더 하면, 가령 부안 출신의 지포 김구 선생은 제주 목사를 하셨는데, 당시 재임하면서 돌담을 쌓게 하는 등 공적을 많이 남겨서 제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거든요. 이런 분들에 대한 평가가 정작 부안에서는 박한데 지역교과서를 통해 온전히 평가해야 한다고 보고요. 또 유신 이라든지 계화도 간척사업이라든지 역사적 고비에서 과연 부안 민중은 어떻게 살았는지, 부안시장은 어땠고 부안경제는 어땠는지, 이런 것들을 포함한 교과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지난한 작업이 되겠고 여러 토론이 있어야겠죠. 말하자면 역사에서 사건 중심으로 나열하긴 쉽지만 그 사건이 민중에게 미친 영향을 기술하기는 어렵기도 하거니와 아직까지 성과물이 없어요. 이번 민중사는 기간도 짧고 재정적 부분도 그렇고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런 부분을 보완해서 지자체에서도 역할을 맡고 해서 제대로 된 텍스트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칫 잘못 만들면 국정교과서 같은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는데, 이런 부분을 경계하면서 또 양쪽의 의견을 다 들으면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겠죠.
우병길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고 마치겠습니다. 동학을 비롯해 부안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들이 떨쳐 일어나 흐름을 바꾸어 온 전통이 있습니다. 가까이는 핵폐기장 반대투쟁이 그랬구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시민운동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진 듯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필자께서는 그 요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나요?
최자웅  저로서도 사실 그 점이 최대의 의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민중 중심의 소중한 흐름을 가지고 왔고 또 전승이 되어 오다가 핵폐기장 반대투쟁이라는 놀라운 민중적 폭발까지 경험했는데,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 흐름들이 결실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히 맥락이 선명하게 잡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것은 모두 우리의 문제다, 라는 생각이예요. 분명한 것은 방폐장 투쟁의 놀라운 에너지와 성과를 건강하고 성실하게 시민운동과 연결하지 못한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많은 분들이 떨쳐 일어나 제2의 동학으로 실천으로 상시적으로 일상적으로 시민운동이라는 건강한 작업으로 이어내지 못한 구체적인 어려움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궁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앞으로도 이 부분은 큰 숙제고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병길   바쁜 시간 내주신 참석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마치겠습니다.

우병길 기자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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