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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민중사42-에필로그 1 한국의 유토피아-새로운 혁명과 개혁의 이상향, 공동체와 시와 사랑의 산실 부안

그간 부안독립신문사의 각별한 의지와 지원으로 가능했던 창간 13주년 장기연재특집으로 독자제현의 뜨거운 반응과 기대 속에서 일 년간에 걸쳐서 매주 연재하여 왔던 부안민중사를 이번 에필로그 1과 다음호 2를 통해서 깊은 감사 속에서 마감하려 한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힘을 주시고 격려하고 귀한 자료와 말씀들을 주셔서 오늘의 작년 9월에 시작된 부안민중사가 그 대미를 다음 호에 마치게 되었다. 한분 한분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막상 부안민중사라는 표제로 글을 써 가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애로는 무엇보다도 전혀 선행연구가 없었으며 또한 의외로 심각한 상태의 자료의 빈곤이었다. 거의 일 년을 초기에는 부안군립도서관에서 살았고 후반에는 부안교육문화회관에서 살면서 각종 전국적인 자료를 섭렵하기에 나름대로 애썼다. 조금 더 구체적인 부안 쪽의 자료의 도움에는 다음 호에 가능한대로 적시하여 감사를 표시하려는 마음이다. 부안민중사라는 표제와 주제였지만 필자로서는 전체적인 한국사의 흐름과 더불어 유기적인 부안민중사의 구성을 목표로 하였고, 부안민중사의 예각적인 의지는 강하였으나 의외로 민중들의 역사나 삶은 그들의 익명성이나 역사 속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당대의 민중을 표상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필연성이 있기도 했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E. 블로흐는 그의 명저인 ‘희망의 원리(Das Prinzip der Hoffnung)를 통하여 역사에서 유토피아적이며 공동체적인 희망의 연속선을 논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적으로 인간의 사상과 역사에 있어서 많은 진보와 인간의 해방이 이루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중국의 위대한 국부로 추앙되는 손문의 경우에도 그의 삶을 마감하는 유촉에서 혁명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혁명상미존(革命尙未存)을 남기었고 또한 그의 뒤를 이어서 중국혁명을 완수한 모택동의 경우에도 중국혁명의 미래는 부단혁명(不斷革命)과 영구혁명(永久革命)에 달려있음을 항상 강조하고 과제로 설정한 바 있었다.

조선 유토피아의 상징 허균(許筠)

우선 필자가 주목한 것은 부안에서의 전국적으로 가히 역사에서의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필자 스스로 부안민중사의 기점으로 설정했던 허균과 유형원의 부안에서의 그들의 머묾과 삶으로 인해서 부안은 가히 전국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유토피아- 이상향과 공동체를 추구하는 산실의 축복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의 너무도 크고 깊은 의미를 부디 부안의 신임 군수를 비롯한 관변은 물론이고 부안의 만간에서도 충분히 이를 알고 그 자부심, 자긍심을 지니고 더 나아가 그 놀라운 의미와 가치를 허균과 유형원 및 그 훨씬 후에 위대한 동학농민혁명과 그 전개에 있어서 가히 역사적인 백산기포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크게 선양하고 기릴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며 기원 드린다.

허균은 아마도 우리의 전체 고금의 역사를 통해서도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고 나아가서 세계에 내놓아도 쉽게 비견할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을 정도의 빼어난 사상가였고 시인이었다.

허균은 그의 빼어난 금수저출신의 명문거족의 환경과 출세길이 보장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체질로 인하여 참으로 롤러코스트와 같은 극적인 삶을 살아갔다. 빼어난 지적자질로서 허균은 일찍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그의 벼슬길의 도처에서 그는 필연적으로 역풍을 맞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벼슬을 이어갔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비록 자신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고, 그가 성장한 곳은 강릉의 수려한 외가였으나 허균은 그가 잠시 벼슬을 얻어 온 부안의 풍광에 완전히 매료되어, 우반동의 옛 김씨가 소유하던 정자를 구입하여 정사암으로 일컫고 그의 만년의 서실과 삶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정사암은 풍광이 빼어난 우반동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홍길동을 저술하고 많은 글을 썼고 그곳에 그의 마음의 벗이자 문우인 매창이 허균을 찾아 정사암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물론 깊이 헤아려보자면 필자가 이미 허균과 유형원을 다룰 때에 충분히 진단하고 분석한 것처럼, 허균과 유형원의 인물됨과 특히 그들의 사상적 세계의 차이는 자못 큰 것이었다. 허균은 그의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 전체를 통해서도 참으로 놀라운 경이를 느낄 만큼의 혁명적 사상가였다. 조선이라고 하는 주자학에 찌들은 이데올로기적 숨 막히는 유교적 지배사상과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교산자 허균이라는 놀랍고 비범한 혁명적 사상가가 배출되었는지는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더구나 허균은 개인적으로 본다면 당대의 동인의 영수였던 그의 부친이나 형들의 비범한 자질과 그로 인한 벼슬과 조선 사회의 존경 속에서 가히 최고의 가문으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살아가기에 필연적인 최상층의 귀족적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당대의 가장 불우한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민중에게 그의 온전한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거기에는 감수성 깊은 허균이 성장기에 교육을 받을 때에 그의 형의 천거로 서자 출신으로 매우 불우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비범한 당대의 시인이던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던 것도 매우 큰 계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처음에 허균은 이달을 탐탁하게 보지 않았으나 그가 제대로 그 수하에서 시를 배워가면서 이달의 재주의 천품에 감탄하고 제대로 시를 배웠는데, 이런 귀한 인물이 한낱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소외당하며 음지에서 불우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허균은 크게 분노하고 불의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달에게서 허균은 물론 천재적인 그의 누이이자 시인으로 중국에까지 그 문명을 떨친 허난설헌도 시를 배웠다.

이후에 허균은 금수저로서의 자신의 삶을 영달과 출세로 치달리는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혁명적인 자유사상가로서 낡은 주자학과 유교의 타부를 과감히 뛰어넘어, 조선의 사회에서는 타부시하고 천시하던 불교의 진리에도 귀의하고, 노장의 가르침과 진리에도 깊은 공부를 하며 특히 신선사상에도 심취하여 부안에서 만나 귀한 마음의 벗으로의 인연을 만든 매창에게도 더불어 수행을 권유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놀라운 지적 탐구의 주인공이었기에 만권의 서책을 비범한 기억력으로 꿰고 있었으며 스스로 독서광으로 일컫었다. 심지어 허균은 천주교의 진리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가히 르네상스적인 인물과 정신과 사상가였다. 또한 그는 천재적인 비범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방대한 독서를 통한 지적 내공이 깊었을뿐 아니라 그는 혁명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나라와 공동체를 그가 소설을 통해 추구했던 홍길동처럼 당대와 현실에서 혁명적으로 추구하다가 그는 참으로 형조판서까지 벼슬이 이르렀으면서도 일약 최소한도의 합리적 제도적인 사법적 절차도 생략된 채로,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형벌로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제내의 개혁가 유형원

그 반면에 허균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유형원은 매우 제도권 안에서의 사실상 안정과 보수적인 체질로 합리적 개혁을 추구한 사상가였다. 그것이 너무도 치우쳐서 당시에 완전히 망해가던 명나라를 숭배하다 못해서, 늘 부안에서도 명황제의 안위를 걱정하고 언젠가 그가 피해서 오면 그를 맞을 준비를 실제로 하던 것이 유형원이었다. 이런 면모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매우 실망스러운 그의 인물됨과 사상가적인 뚜렷한 한계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원은 그의 한평생을 통해서 비록 주자학적인 뚜렷한 세계관의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기존의 조선사회의 틀거리 내에서의 나름대로의 상당히 합리적인 국정전반에 있어서의 개혁을 추구하고 시도하려하였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의 부친이 당쟁의 비극 속에서 스스로 자살을 했던 유형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평생을 불우하게 야인으로 지내면서 비록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체제내의 개혁사상가로서 저술을 하고 새로운 나라를 튼실하게 추구하는 광범한 정책을 내놓았다.

필자가 부안의 관민에게 진심으로 당부하기에 허균과 유형원을 부안의 상징으로 추구하자는 권고이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부안의 지적 상징은 단연 그리고 오직 반계 유형원 일인이었다. 그러나 유형원은 이미 소위 학계에서 반계학(磻溪學)을 운운할 만큼이나 상당히 그의 연구나 선양이 이루어진 편이다. 물론 앞으로도 더욱 반계연구나 선양도 지속적으로 더욱 있어야 하겠지만 필자가 매우 강력하게 권고하고 싶은 점은 반계에 앞서서 교산자 허균이 부안에 머물고 특히 우반동에 자신의 정사암을 만들고 그곳에서 저술하면서 사상과 공동체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한 역사적 사실과 그 상징을 반계와 더불어 부안의 크고 놀라운 가치로 인식하고 기리며 선양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능하다면 반계서당을 복원한 것처럼 마땅히 역사적 자료를 탐색하여서 허균이 머물렀던 정사암의 복원 및 그의 유토피아적인 아카데미를 우반동이나 부안의 변산 쪽에 만드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허균의 삶의 부안에서의 부활 및 정사암의 복원에는 참으로 고매하면서도 필자가 신분을 초월한 조선 최고의 플라토닉 러브로 그렇게 일컫는 아비가 아전이고 어미가 노비출신인 전형적인 민중의 딸 매창과의 아름다운 관계도 더욱 기리고 선양될 매력과 상징성이 너무도 크다. 일방적으로 잘 알려진 매창의 로맨스의 대상인 같은 천민출신이었던 유희경보다도 필자가 보기에는 신분의 차별을 뛰어넘고 1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매창과 허균의 정신적인 교유와 사귐은 참으로 깊고 깊은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매창 영정 작품

허균과 매창의 교유하던 정사암과 봉래산으로 일컫은 변산일대의 산과 계곡, 개암사, 월명암등의 사찰과 허균과 친구들과 함께 가서 즐기고 홍길동의 율도국으로 꿈꾸며 형상화하였던 위도까지도 참으로 멋진 스토리 텔링의 부안의 명물과 산책과 여행코스로 부안군이 충분히 개발하여 국민대중에게 제공하고 차원 높은 관광코스로 이용케 할 가치가 크게 있다고 생각된다. 옛날에는 변산이 산적이나 해적이 머무는 웅거지로 소문이 났었을지 모르지만, 허균과 매창이 출현하고 아끼고 그들의 플라토닉 러브와 교유의 산하와 바다로 떠오른 변산은 또 다른 로맨스와 정신적 품격과 유토피아로 채색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부안군이 비범한 혁명아와 빼어난 천재적인 시인 허균을 자신 안에 뜨겁게 안아 부활시킬 때에, 거기에 필연적으로 매창과 90세까지 천수를 당시로서는 드물게 누린 유희봉 말고도 극적이며 불꽃같은 영혼과 사랑과 혁명적 이상으로 삶을 불태웠던 허균과 매창이 다시 리얼하고 박진감 있게 우리에게 떠오르고 다가온다고 믿어진다.

아울러서 우리 부안은 반드시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혁명에서 벗어난 외곽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오늘날 갑오동학혁명의 성지로 가히 독점적인 역할과 위치를 구가하고 있는 정읍에 못지않게 백산을 성지화하고 또한 전국적으로도 매우 귀하게 남아있는 동학혁명기의 부안집강소도 훌륭하게 다시 보수하고 관리하여 동학혁명의 위대한 정신과 의미와 가치를 부안이라는 지역사회 안에서 충분히 훌륭히 선양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무상한 것이기는 하나, 만약에 부안의 대접주 김낙철이 북접에 관계하지 않고 동학농민혁명의 본류인 남접과 함께 강력히 연계되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은 부안민중사를 쓰면서 끊임없이 들었다. 어차피 김낙철의 북접로선의 견지로 말미암아 부안은 조금은 동학갑오혁명의 직접적인 현장과 불꽃은 상대적으로 피해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차피 조선의 지배층과 일본군은 그러한 김낙철 본인이나 주변도 결코 그대로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던 것이 명백한 현실이었고 때문에 동학혁명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부안이 입은 투쟁적 인물과 민중의 피해는 결코 가볍거나 만만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막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낙철만이 아니라 부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청춘과 같은 노병 김기병과 같은 살아있는 민중 속에서 뛰쳐나온 비범한 새로운 지도자와 전투적인 혁명가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처절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때문에 부안에 있어서의 동학혁명기의 상징적 인물이 필자로서는 동학내부의 부안의 조직의 수장인 대접주 및 집강소의 수장으로서는 김낙철이었지만 실제 동학혁명이라는 치열한 현장에서는 또 다른 민중적이며 투쟁적인 김기병과 같은 지도자가 또 다른 상징과 실체였음을 우리가 또한 기억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어쩔 수 없이 김낙철이 동학혁명기에 소극적인 북접로선을 견지한 것과 함께, 그 이후에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친일적인 동학단체인 시천교에 상당기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 빠져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김낙철의 행태가 역사적으로는 결코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파악된다. 때문에 물론 논난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당위론적으로는 부안의 민중적 차원에서의 역사와 동학혁명의 상황에서의 김낙철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극복과 비판대상이 아닐까라는 안타까운 판단이 들기도 한다.

이후에 부안은 의병활동으로서도 변산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옛 동학혁명의 기상과 투쟁의 연속선을 이어갔던 것이며 이 연속선은 다시 일제하의 지운 김철수를 비롯하여 호남의 그 어느 곳에도 비견할 수 없는, 전국적으로도 사회주의자들이 강한 지역으로 그렇게 부안은 민중적인 의지와 실천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최자웅  fernster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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