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수협앞 민주광장에서 열린 2.14 주민투표 10주년 기념식

김종규 군수는 당연하게 논의 토론되었어야 할 부안군의회의 표결 전에 11일에 기습적으로 주로 위도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모청원과 신청을 한 행태가 부안군민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위도는 14일에 표결을 앞에 두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지만 전형적 어촌인 위도와는 전혀 다른 생존의 여건을 지니고 있는 관광지로서의 격포와 곰소에서는 무섭게 반대여론이 들끓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대책위에 너도 나도 참여하게 되고 여기에는 각종 동창회 조직과 동네의 각종 계모임의 총동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체로 관에 의존적이던 해병전우회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평소에 김종규 군수는 한수원 예산이 부안군 예산보다 크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실무자들이 서울과 부안을 오가면서 위도와 곰소에 대한 선물들을 마련하고 핵폐기장 전반에 대한 청사진과 대책들을 숙의해 왔었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이러한 것들은 군민들로서는 전혀 몰랐던 흐름들이고 그런 과정 후에 상당히 심각한 반대의견과 논의와 토론이 벌어질 수 있는 부안군의회의 동의 절차를 군수가 사실상 불리하다는 판단 속에서 원천적으로 없애는 방향과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이러한 안개와 같은 흐름과 과정 속에서 애드벌룬으로 군산의 신시도를 여론조작 차원에서 띄울 때에 당시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부임한 함세웅 신부가 신시도 문제로 고창이 한참 시끄러울 때에 당시 고건 국무총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고창이나 신시도 문제로 고생이 많느냐는 인사에 고건 총리가 답으로 '신시도는 아니고 좋은 곳이 있습니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곳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부안의 위도로 밝혀졌다. 한편 당시 청와대 주무관은 정읍 출신의 김형욱 시민사회비서관이었고 그 상사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있던 군산출신의 박주현 변호사였다. 그러나 주로 실무는 김형욱 비서관이 담당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대통령이 보는 청와대 보고서를 그가 부안군민의 현실을 오도하면서 작성하였다.

부안사태의 핵심문제는 부안군수의 군의회의 심의나 논의나 동의를 무시한 절차의 추진과 함께 정부의 오판은, 이로써 행정절차나 형식적 절차가 하자가 없게 되었다는 판단과 이 문제에 대한 그래서 다시 논의는 불가하며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소위 불가역적 인식이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섣부르게 형식적이며 절차적 과정만을 중시하고 오판하면서 7월 23일 김종규 부안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주고 통화를 통해서 방폐장 유치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다며 용기를 잃지 말고 국책사업이 잘 마무리되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또 나아가서 부안의 치안문제나 지역개발 사업을 정부가 책임지고 적극 대처할 것이라며 방폐장 사업 유치가 부안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군수에 전화통화와 격려는 군수로서는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대통령이 군수에게 소신껏 추진하라는 격려를 한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경솔한 처사였으며 사태를 근본적으로 매우 어렵게 만든 한 행태이기도 했다.

이와 반면에 전체 부안군민은 한낱 군수가 요령을 피운 행정절차가 아닌 내용적 절차상의 배신과 하자를 당연히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원 측은 당연하게 군수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원하면서 특별히 해당 주민인 위도주민들에게 전체 보상은 물론이고 주민 일인들에게 개별보상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홍보, 설득하고 주민들에게 한수원의 직접 견학과 함께 달콤한 조건으로 회유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노력은 이중적으로 부안 전체 군민들을 이들과 분리시킴으로 우선 현지주민의 마음을 온전히 회유함을 직접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7월 3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주민 설득 담당자들이 이 사업에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외 현지시찰 등을 보내라”면서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막상 심각한 현지의 부안군민들의 목소리가 청와대와 대통령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다.

이에 반하여 부안대책위에서의 부안군민 전체의 중의로 다음과 같은 뚜렷한 시민 측의 네가지 원칙을 강력하게 천명되었다. 1. 핵발전소 문제와 그에 따른 핵폐기장 처리 문제는 향후 장기적인 한국사회의 에너지자원정책의 방향에 관한 본질적이며 심도 깊은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2.지금까지 논의된 핵폐기물처리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이며 지형적으로 가장 안전한 입지 선정이 선결되어야 한다. 3. 과학적으로나 지형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의 타당성이 입증된 후에도 그 현지 지역과 주민의 사회문화적 고려와 주민들의 주체적 동의와 확인이 절대로 필요하다. 4. 당연히 논의와 결정과 추진과정에서 그 지역주민의 불이익에 대한 그 당해 지역의 주민들과의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 같은 원칙의 천명 속에서 찬반 양측은 결국에 마지막 결판의 카드로 연내 주민투표였다.
그러나 이 연내 주민투표라는 카드는 정부로서는 필패의 협상안이 된다고 판단하여 연내 주민투표는 안되고 홍보의 시간을 더 갖자는 안으로 시간 끌기로 임하여 이 같은 정부의 태도에 실망한 부안대책위는 정부의 이런 협상태도가 다시 부안군민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협상결렬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안군민 전체의 이같은 정당한 요구와 시위의 초창기부터 정부는 경찰력으로만 대응하였다. 또한 행정행위 자체는 불가역적이며 불변인 것으로 완강하게 몰아간 것도 불행한 사태를 촉발시키고 심각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부안군민들의 절차상의 하자가 명백한 행정행위를 인정하고 철회하라는 요구를 관과 정부는 불법시위로 몰아간 것이다. 이에 당연하게 부안 주민들의 분노와 반대시위는 점차로 더욱 격앙되어 갔고 정부와 경찰의 시위진압 강도도 강경일변도로 치달아서 결국 격렬한 시위와 유혈사태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각 도하 언론들이 선정적인 폭력적 유혈사태의 현상적 보도와 정부의 미온적 처사를 사태의 본질이 아닌 손쉬운 양비론으로 떠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억울하게도 정당한 부안군민들이 오히려 산자부와 정부의 뜻대로 잠시는 국민들과 여론으로부터 상당히 고립된 상황도 만들어지고 유혈이 낭자한 준 계엄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안방폐장투쟁이 어쩔 수 없는 큰 싸움이었다면 사실상 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결과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 그것은 명분에 있어서나 발단과 과정에 있어서나 방금 위에서 천명한 부안군민을 대표한 시민대책위에서 작성한 네가지 선명하고 대의스러운 원칙이 누구도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원칙과 진실과 정의와 대의였기 때문이었고 이에 반하여 그 상대 쪽인 당시 김종규 부안군수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배신과 식언과 불신을 안고서 일을 너무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만악과 어려움의 명백한 그 원인과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드디어 항쟁의 막이 오르고 인권민주운동에서 그 명성을 떨친 부안성당의 문규현신부와 원불교 김인경교무, 불교의 진원스님, 김선곤 도의원, 이병학 도의원, 상징적으로 서대석 위도 현지주민 등 6인의 대책위원회가 조직되고 김종성 군의원이 집행위원장, 고영조 대변인, 김진원 조직위원장 등이 지도부로 나서고 부안의 전종교계 시민단체 등을 망라하며 전체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부안방폐장대투쟁은 철저히 부안군민전체를 그 주인으로 섬기면서 동원하고 설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각 지역 면단위가 촘촘히 지역대책위원장과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모든 투쟁현장의 리얼한 전개도 철저히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1.군민들의 문화적 삶의 축제를 나누는 것으로 2.군민들의 온전한 자기결정으로 3.가장 힘없는 부안의 전체 할머니, 어머니, 아주머니 여성들까지도 이 투쟁의 주인공들이 되어 나서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모성애와 공동체적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결속력과 대화합과 삶을 나누는 것으로 철저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기간 이어진 부안반핵투쟁의 시간과 과정 속에서 놀랍고 새로운 집회문화가 이룩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같은 아름다운 공동체 결속의 집회문화는 일찍이 부안에서 있었던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이 땅의 딸인 ‘효순이 미선이를 위한 촛불항의와 집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느닷없는 군수의 배신과 일방적인 군민을 무시한 결정과 억지 추진에 자연스럽게 분노한 초기의 군민들의 과격한 격정과 분노로 일어나서 항의하는 것은 자못 격렬하였다. 때문에 초기과정에서는 주민들의 과격한 언행과 함께 때로는 경찰과의 대치 속에서 폭력적이거나 심지어 가스통이 터지는 식으로 가슴의 분을 삭이기 힘든 분노가 터져 나오고 표출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대응하던 경찰의 진압도 과격하여 다수 군민들이나 경찰도 부상당하고 입원하지 않을 수 없던 현실이었다. 여기에 언론과 여론이나 행정당국도 부안군민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쉬운 ‘님비’현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대책위와 군민들은 점차로 단순 과격한 분노와 싸움이 아닌 성숙한 비폭력적인 전술로 임하며 항쟁을 축제화 문화화하면서 진정한 군민들의 에너지와 지혜와 의지를 모으는 촛불혁명의 지속적인 현장을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평화적이고 성숙한 항쟁의 면모로 변화되고 갖추게 되자 오히려 일부 비난 언론과 여론도 달라지고 긍정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와 평화의 전략으로 그냥 맨손으로 피킷을 들고 촛불을 들고 부안전역을 한 바퀴씩 돌면서 행진하다가 수협 앞의 민주군민광장에서 무대가 설치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의로움으로 즉석연설들로 수없이 외치고 싸우면서, 즐겁고 모여서 즐거운 축제의 공동체와 장을 만들어내었다. 늘 신명과 함께 어려움 속에서도 강인하고 질기게 이어진 새로운 역사와 현장이었다. ‘노랑고무신’ 주민노래패와 고령의 할머니들도 참여하는 그룹 ‘난타’들이 투쟁의 가슴들을 고무하며 뒤흔들고 수협반핵민주광장과 부안성당 안에서 군민들의 흥겨운 반핵가 동지가는 물론이고 구성진 노래자랑도 끝없이 이어졌다.

사회학자 최정운에 의하면 처절했던 광주항쟁의 1980년 5월 18일에서 21일까지의 상황을 광주시민의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맨몸과 열악한 무기로 대한민국의 최정예 공수부대로 가공할 명성을 지닌 무려 3개 여단 2,500명에 달하는 군대와 정부권력과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를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로 하나가 되어 공수부대가 처절하게 이땅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학생들과 동료시민과 아들 딸들을 개 다루듯 죽이고 패는 그 잔인성과 야만성 앞에서 그 배후에 전두환과 정부의 군대와 공권력이 막강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하나가 된 놀라운 일체감으로 일군 공동체를 설파한 바 있다. 이러한 절대공동체는 선량하고 존엄한 인간과 전사들의 만남이자 용기 있는 행동과 실천이었으며 결코 이상하거나 비겁한 인간들이 모여 저지르는 폭동이나 집단행위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이 절대공동체는 잔인한 절대적 적인 계엄군들에게 죽지 않기 위해서 저들의 잔인한 폭력과 학살에 맞서서 일어나서 싸워야만 했고 그런 용기와 의로움과 동료와 광주를 사랑하는 가치만으로 하나가 된 시민공동체였다.
부안에 있어서의 최정운의 개념을 빌어 유추하면 ‘부안절대공동체’의 형성은 군수의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독단적이었던 잘못된 행태와 결정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것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주민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고향 부안과 부안의 환경과 생명의 터전을 생태적으로 지켜내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절박한 의식과 연대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절대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아니 되는 오직 하나의 절실하고 절박한 가치와 존재성과 목적과 깃발인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부안군민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어린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와 한 덩어리로 일어선 것이 부안반핵투쟁이었다. 그 내용상에 있어서 명백한 부안군민의 내릴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깃발과 가치는 반핵생명과 절차적 내용적 민주주의의 추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안공동체의 절대공동체적인 형성의 흐름은 이른바 ‘7.22 사태’라고 부르는 날에 전개된 핵폐기장 반대와 부안군수 퇴진의 깃발을 올리며 무려 부안군민이 ‘1만인대회’로 모인 날에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작전과 격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무려 100여명의 부안군민이 부상을 당한 경험을 통하여 심화되었다. 이 현장에서 1만 여명의 부안군민들과 전국에서 차출된 7.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군청 앞과 부안읍내 각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렸던 날은 당연히 군수와 그 배후의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부안군민들의 분노를 크게 증폭시켰으며 군민 100여명의 부상자들의 결과 앞에서 더욱 일체가 된 절대공동체화 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이 ‘7.22사태’에 이어서 9월 8일의 군수응징사태 그리고 군청 앞 집회를 막는 전경들과 대치하다가 전경들의 폭력적 진압으로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11.7사태들이 이어졌는 바, 이같은 사태의 추이와 과정 속에서 부안주민 부상자가 300여 명에서 600명을 넘어서고 그럼으로써, 부안의 절대공동체는 어이없는 가공할 국가폭력과 경찰계엄의 상황 속에서 더욱 더 강렬하고 깊은 힘으로 하나가 되고 일체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체화된 공동체적 분노와 열정이 촛불시위의 일상화로 매일 밤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반핵민주투쟁의 질긴 동력이 된 촛불시위의 과정 속에서 생명과 민주주의의 주인으로서의 자각과 더불어 동참을 생산하고 그것이 다시 질기고 아름다운 투쟁을 이어가고 부안공동체를 증폭시키고 심화시키는 과정과 힘이 되어갔다. 그 결과로 군수 소환 서명운동, 무려 60%가까운 이장들의 사퇴와 부안군의원들의 군의회 등원 거부와 함께 초,중,고 학생들의 대대적인 등교거부 및 대안학교 운영들로 나타났다. 그리고 부안읍 수협 앞의 전설이 된 ‘반핵민주광장’에서의 주민들의 자유발언과 수많은 강사들의 강연으로 교육과 축제화가 일상이 되고 큰 힘으로 축적되어갔다. 그리하여 부안 군 전역을 덮은 노란 반핵투쟁의 깃발들과 도로위의 구호와 그림들, 무려 5000명 이상의 부안군민에 의한 서해안고속도로 점거, 일명 ‘깍순이’들로 불리워진 과감한 여성 집단 삭발 및 부안에서의 전주까지의, 또한 서울에서의 반핵삼보일배, 반핵출정가의 합창, 어른들과 아이들의 상경투쟁과 부안군의 장관이었던 어선 수백척의 집단적 해상시위 와 반핵택시 등 부안 전체는 온통 반핵과 생명의 노란 깃발과 물결로 파도 친 투쟁들이 무려 석 달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평생 큰 소리 한번 치지 않고 가족들을 위한 부엌데기로 살아왔던 주부와 할머니들이 일어나고 뛰쳐나와 나름대로의 자유발언의 소박한 명연설들을 쏟아낸 일들이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르는디요...”로 시작되는 이들의 거침없는 자유발언은 수협 반핵민주광장의 수천 명 군중들을 감동시키는 것들이었으며 부안 아고라의 새로운 카니발의 주인공과 명물과 꽃이 되었다. 맨몸으로 전투경찰과 부딪쳐 싸우는 젊은 아들과 딸들 배후에서 부안의 고령의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이 새로운 반핵 생명 민주운동의 전사로 거듭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들은 주민투표에서도 “꼭 히야 혀...!!” 라고 외치고 되뇌이며 부안 반핵 민주주의운동의 주인공과 꽃들로 피어나고 그 귀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부안반핵투쟁에서는 투쟁이 첫째로 격렬하고 과격한 가스통이 터지는 위험보다 다수 주민들의 일상적인 비폭력적 문화적 삶의 축제로 이루어지고 둘째 부안군민들의 자기결정권과 주체적 참여가 가능했던 점, 셋째로 특히 할머니 어머니들의 평화적 지속적인 촛불집회와 투쟁과 운동에의 참여가 너무도 두드러지고 아름다운 힘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부안공동체와 군민들의 또 하나의 무기로 등교거부투쟁이 일어나고 이것은 부안공동체투쟁의 독특하고 강력한 문화와 투쟁동력이 되기도 했다. 원래 2003년 7월 말의 1차 등교거부투쟁은 미미했으나, 곧 이어 2학기가 시작되는 8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진행된 2차 등교거부투쟁은 부안군 내의 초,중,고의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무려 40일 간 힘 있게 지속되었다. 이는 운영위원회와 학부모 및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로 군 대책위 및 면 대책위가 함께 결합되어 지역상황에 맞게 자율적 내용과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초등학교는 부안읍의 경우에는 부안예술회관에서 ‘반핵학교’, 진서면은 ‘민들레학교’, 돈지와 계화에서는 생태학교 성격의 ‘반핵민주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이들 새로운 대안학교에서는 단순히 기존의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닌 창조적인 대안교육 및 대안학교를 모색하면서 실천하는 능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별히 주산면과 줄포면에서 대안교육에 있어서 사설학원의 참여와 학교 교사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학교교육의 연장선으로 등교거부투쟁을 탄력있게 배치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물론 이같은 부안에서의 등교거부투쟁은 언론의 싸늘한 비판 속에서 단순히 기계적으로 동원된 투쟁이 아니라, 학부모, 학생, 주민, 교사, 학교 등이 갈등과 고민을 긴밀히 나누면서 자발적으로 공론화하고 결정해나간 과정으로서 다양한 힘과 효과를 생산해 내고 결과적으로 부안반핵투쟁과 공동체적 결속에 위협적인 무기로 작용하였다. 부안사회의 미래의 주역인 차세대 어린 학생들이 대안학교 운영을 통해서 생태문화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고 사회주체로 성장하는데 큰 자극과 영향을 얻을 수 있는 학교교육과 지역사회 공동체의 각각 별개가 아닌 긴밀하고 유기체적 하나됨을 확인하는 소중한 교육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부안의 살아있는 반핵민주교실의 흐름은 부안농민회와 청년회와 의식화된 교사들 일부가 주민 및 학부모 학생들과 함께 실무적인 힘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자치교육의 교육의 중심을 이루며 이어진 소중한 실험과 운동이었다. 다만 매우 아쉬운 것은 이 새로운 상황의 변화와 함께 더 지속되지 못한 의미 있는 교육의 중단이었다.
또한 2004년 5월 19일에 부안핵폐기장 투쟁을 통한 지역 자치와 자결, 민주주의 의지를 통합하고, 지역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부안독립신문이 지난 2003년 6월부터 준비모임을 결성하여 오다가 드디어 부안독립신문 발기인 모임이 이루어졌다. 부안독립신문은 국내 언론사상 노동조합이 20%이상의 지분을 소유하는 최초의 언론사로서 무엇보다도 공정한 보도와 편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즉 불란서의 <르몽드>의 한국적인 버전과 모델의 추구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초대 대표이사를 수락한 문규현 신부의 말처럼 부안군을 넘어서 민족의 신문으로 커나갈 원대한 비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경영에 있어서 자본주의적인 제도와 사고가 지배하는 이시대에 그것을 뛰어넘는 대의와 공의를 추구하면서 부안독립신문의 발기인과 주주들이 경영권 안정과 편집권 수호를 위하여 주식지분의 50%이상을 무상으로 증여하는 방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결의는 부안독립신문을 기획한 주식회사 하인미디어의 문병원 대표이사의 제안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부안독립신문은 참으로 매우 의미있는 부안반핵투쟁의 결과와 성과의 하나였다.
그 반대로 역공작도 끊임없이 자행되었다. 반핵에 맞선 핵 찬성의 홍보와 광고도 한편에 쏟아지고 주민들을 매수하고 분열시키는 각종 공작과 분열책들이 난무했다. 특히 부안의 절대공동체적 일체와 결속과 투쟁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교란하고 붕괴시키려 했던 부안군수와 어쩔 수 없이 조직과 제도에 매여 그 하수인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던 공무원들과 한수원 및 한국전력공사와 산업자원부와 그 직원들과 물리적 경찰력이 끊임없이 또 하나의 조직적 힘으로 부안공동체를 흔들고 붕괴시키기에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배후는 막강한 권력의 대통령과 정부였다. 일부지역신문들이 한수원의 일방적 홍보지로 전락하기도 했고, 위도유치위원회와 찬핵세력과 그에 편승한 군의원들, 경찰 공권력 및 수많은 전경들에게 밥을 해주는 식당 등이 부안공동체의 저편에 대칭적으로 포진하고 있었고 작은 부안사회에서의 견원지간이 되고 생각과 뜻과 가치가 전혀 다른 감정적 적과 원수들이 되어갔다. 특히 부안제일교회라는 읍내의 제일 크고 유력한 교회를 맡고 있던 황진형 목사의 경우에는 김종규 군수를 지원하는 내부의 교인들과의 갈등과 그 결과로 제대에서 끌려 나오고 가운이 찢겨지는 등의 교회분열을 무릅쓰고 부안대책위의 공동의장의 한 사람으로서 반핵운동에 자신의 아픔과 희생을 감수하며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의 승패는 사실상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군수의 독단적 결정과 과정상 명백한 비민주적 하자로 말미암아 지루하고 긴 갈등과 싸움이 심각하였으나 부안 군민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싸움은 사필귀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2004년 2월14일의 박원순이 관리위원장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부안 주민투표에서 나타난 총주민 참여 72% 속에서 ‘주민 92% 핵폐기장 유치 반대’라는 민의의 확인 속에서 더 이상 유치찬성은 그 빛과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004년 11월 9일 인권위원회에서는 ‘부안방폐장 건설은 부안군민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는 결정이 나왔고 이어서 산업자원부 장관과 부안군수에게 철저한 감사와 재발방지를 권고했다. 인권위는 부안군이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 등에서 정보를 왜곡하고 공정성에 대한 검증절차를 두지 않아 주민들과의 신뢰관계를 깨뜨렸다며 이는 헌법에서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인권위는 지역 주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은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며 추진해 인권 침해의 소지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4년 12월 1일 부안 원전센터 후보지 자격이 공식적으로 종료됨과 함께 이 문제는 18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에 이날 부안대책위는 부안군민 승리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오후 2시 부안읍사무소 앞에서 승리대회 집회를 열고 전부안관내의 각 읍, 면 주민 등 3500여 명이 참석해 줄다리기, 풍물놀이, 노래공연 등 문화축제로 3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이날 참석자로 연설한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의 말처럼 길고 긴 지난 17개월 동안 반생명, 반환경, 반민주주의에 맞서서 이 땅을 지킨 부안군민의 영웅적 투쟁은 이 땅의 진정한 주민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고귀한 본보기일 수밖에 없었다. 경찰 전 의경이 9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하였지만 주민들과의 충돌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드디어 2003년 7월2일에 발족되어 길고 긴 반핵민주투쟁을 주도하였던, 김인경 교무와 문규현 신부 및 황진형 목사등 원불교와 기독교 천주교를 망라한 종교인들이 앞장서고 부안군 농민회가 가세한 부안대책위가 발족 20개월 만에 2005년 2월 14일에 해산되었다. 군의원으로서 부안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김종성은 “부안대책위를 발전적으로 해체, 지역문제 해결과 주민자치 실현을 위한 조직으로 전환해 상생의 부안을 만들 것”과 이들 자치조직은 각 읍, 면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민을 이기는 그 어떤 힘이 있을 수 있을까? 민중의 뜻과 힘은 때로 성난 큰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고 난파시키기도 한다. 부안의 반핵민주투쟁은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극명한 살아있는 부안공동체와 정신과 가치의 내릴 수 없는 깃발과 함성과 고귀한 투쟁이었다. 저 위대한 1980년의 광주 말고 2003년의 부안처럼 뜨겁게 남녀노소 군민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반핵생명과 민주주의로 승리한 지역공동체가 과연 있을까? 이점에서 부안공동체의 승리와 그 의미는 매우 크다. 1893년 갑오년의 인내천, 제폭구민, 광제창생에 이은, 어이없는 부안군수의 독단과 전횡과 그 배후의 잘못 판단한 대통령과 정부에 맞서서 경찰계엄과 국가폭력의 상황 속에서도 2003년의 내릴 수 없는 반핵생명 민주주의의 새로운 깃발과 함성으로, 부안의 힘없는 할머니와 오직 부엌데기로 살아왔던 어머니들도 그 주체로 일어서고 결코 짧지 않은 18개월의 길고 긴 장정(長征)과 투쟁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당당하게 장엄하게 싸워 이긴 신판 제2의 동학혁명, 부안민중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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