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장 반대투쟁에서 승리를 한 뒤 환호하는 주민들.

우리는 드디어 부안방폐장대투쟁에 접어들었다. 그 사건과 의미로 보면 2003년의 부안방폐장대투쟁은 부안이 저 1894 갑오년의 위대했던 동학혁명의 불길과 활화산이 터진 이래, 부안군민전체가 하나가 되어 관과 정부를 향해 잘못된 처리를 항의하고 싸우며 끝내 승리한 전국을 뒤흔든 놀라운 민중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건이었다. 갑오년의 동학혁명의 깃발이 인내천과 제폭구민 광제창생 척외양이었는데, 2003년 부안 반핵항쟁은 새로운 광제창생 -즉, 자손만대 살아가는 고향 부안의 생명과 생태를 살려내고 지키자는 숭고한 진심과 가치와 잘못된 군수와 관과 정부에 대한 제폭구민과 민중이 주인인 인내천의 새로운 민주주의 깃발이었다.

무려 1년 이상 진행된 이 사건으로 인하여 3차례에 걸친 서해안고속도로 점거시위를 비롯해서 부안군청 앞과 부안수협 앞의 ‘반핵민주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와 집회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찰과의 충돌과 대치로 억울하게 법적으로 처벌받은 부안주민이 무려 56명이었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 기간에 모두 무려 358명을 수배대상으로 올려놓고 1명을 제외한 전원을 붙잡아 관련법으로 형사처벌을 하였다. 그 결과 검찰에 의한 구속기소는 42명에 달하였고 불구속 기소가 12명, 약식기소 54명 등 무려 100여명에 대한 주민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봉고를 몰고 경찰에게 돌진한 1명에게는 1년6개월의 실형이, 8월 서해안 고속도로를 검거한 이에게는 1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되고 34명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57명은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방폐장반대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3년 8월에는 인구 겨우 7만의 부안에 연인원 8천여명의 경찰 병력을 전국에서 차출하여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사태가 5개월이나 진행되다 폭발한 11월 19일의 부안사태를 ‘민란’으로 규정한 정부가 11월 20일부터 부안은 가히 사실상 계엄령 없는 불문의 경찰력에 의한 ‘계엄’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 허성관 행자부장관은 11월 20일 사태를 주도하는 ‘배후세력’ 운운하면서 부안군민의 비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른바 주동자들을 집시법이 아닌 형법을 적용하여 처벌하겠다고 밝히는 강경책으로 나가기도 했다.

방폐장 백지화를 위해 집회를 갖는 군민들.

지난번에 우리가 다루었던 1985년의 부안등룡리 소몰이투쟁이 부안농민들의 권리를 위한 전국적 싸움의 대단원이었는데 부안방폐장대투쟁은 한걸음 더 나아가 부안군민 전체가 자신들의 현재와 자손들의 미래의 생명과 생태적 가치를 위하여 견결하고 뜨겁게 하나가 되어 싸우고 결과적으로 승리한 놀라운 공동체적 쾌거였다. 또한 운동적 차원에서 본다면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과 부안지역에서의 농민운동의 상당한 발전과 과정에서 생성된 성숙한 시민의식을 결집할 만한 공동체적인 리더쉽과 민중적인 힘의 축적이 어이없는 군수의 독단적인 결정과 그를 처음에는 당연히 지지한 대통령과 정부와 막강한 경찰력들과의 대치와 전선 속에서도 부안민중을 하나로 결속시키면서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다만 1894년의 전봉준 장군과 민중들이 일어나 싸웠던 것이 참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희망이 전혀 없던 탐학군수 조병갑과 망해가는, 아니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던 사대적인 이씨 조선왕조정부였는데 반하여, 아이러니칼하게도 2003년의 부안방폐장투쟁의 상대였던 관과 정부는 부안군민이 선출한 김종규 군수와 부안군이었으며, 그 정부는 특별히 누구보다도 민중을 사랑하고 특권과 권위주의시대를 종식한다고 싸워오고 승리한 노무현 참여정부와 대통령이었음에 우리는 깊고 착잡한 눈과 생각으로 그 발단과 과정과 결과적으로는 부안민중적인 승리의 귀결까지도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부안군민 모두가 마치 1980년의 광주항쟁처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처절하게 싸우면서 뜨거운 승리를 얻어내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승리는 그 패배자가 된 작게는 김종규 당시의 부안군수나 크게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의 패배(?) 앞에서 결코 승리자인 부안민중과 군민전체가 온전히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픈 승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엄연히 이같이 웃을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싸움과 문제의 발단은 분명히 당시 군정을 책임지고 있던 군수의 판단미스와 오만하고 경솔한 단독 정책결정과 그를 인정하거나 결과적으로 추동한 대통령과 주무장관과 정부 측에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사회이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 만으로서의 판단 만이 아닌 감정적인 어떤 사태로 인한 골이나 갈등의 후유증이 있고 골이 의외로 깊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승적 차원에서 반드시 목표와 방향은 화합으로 가고 더욱 높은 가치로 승화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생각된다.
오늘 부안민중사의 대미의 부분으로서의 이 문제에 대한 시각과 진지한 복기와 검토는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부안의 참된 공동체적인 비젼을 넘어서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지역공동체의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보면서 부안방폐장대투쟁의 추이와 과정과 그 교훈과 의미와 과제까지도 가능하면 추출해보고저 한다.

경찰과 대치중인 주민들.

매트 리들리지의 말처럼 때로 국민의 뜻에 반한 “정부는 위험한 장난감”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란 당연히 때로는 잘못된 관과  ‘국가로 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State)’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것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신들의 공복-마름과 종-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 극단적으로는 탄핵을 포함한 비판과 거부로 과감하게 그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주인과 주체로서의 숭엄한 자기결정권이기도 한 것이다.

부안사태를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과연 바람직한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행정대학원장, 한국행정학회장과 한국공공정책학회장을 역임한 김광웅 교수는 그의 저서 ‘국가의 미래’에서 정부의 공직자 중에서 매우 부적절한 6가지 타입을 규정한 바 있다. “그 첫째는 법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있다면 이는 국가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둘째,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방관했다면 이것은 국가에 커다란 부담을 주는 것이다...중략...여섯째, 개방을 지향하는 21세기 행정에 역행하는 공직자는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중에 부안방폐장투쟁에서의 공직자는 첫째, 둘째, 여섯째의 규정을 완전히 부정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반핵과 함께 주민자치와 축제로.

김광웅 교수가 말하는 미래의 좋은 정부는 다음과 같다. 1.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않는 정부 2. 생략 3. 국민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정부 4.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부 5.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정부 6.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부 7. 국민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주는 정부 8.국민에게 용기와 힘, 그리고 희망을 주는 정부 9.국가의 내일을 준비하는 정부. 이와 같은 미래의 좋은 정부의 요건 중에 부안방폐장투쟁에서의 정부는 대부분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유감스럽게 보였다. 참여정부의 초기부터 첫 단추가 너무 잘못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언젠가 연세대학교 특강에서 보수를 매도하며 “보수란 힘 있는 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힘을 가진 대통령이 보수가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원래 그의 성정이나 정치철학으로는 누구보다도 크게는 분명히 비권위적인 대통령의 통치와 행태를 보인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몇 가지 그의 시대에 커다랗게 편협한 그 자신 권위주의와 패착에 빠지고 만 그런 사례들이 있었고 아마도 부안의 방패장문제와 그 거대한 반대투쟁은 이런 대표적인 안타까운 사례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가 부안의 구호 중에 “속지 말라 대통령! 믿지 말라 산자부!”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종규 군수가 행한 분명한 잘못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군수를 격려하고 모든 치안과 어려움은 정부가 감당하겠다고 밀어붙였던 것은 참으로 심각한 오류였던 것이다.

부안시민들의 촛불시위 모습.

2012년 말과 2013년 초에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 노무현정부는 그간 무려 17년간, 많이 미뤄져 왔던 핵폐기장 부지 공모사업 논의에 들어갔으며 이를 위한 관계기관 대책위가 행자부와 산자부와 총리실을 중심으로 해서 꾸려졌다. 당시 초대 행자부장관은 김두관 전 지사였는데 김두관 장관이 4월쯤에 이미 부안의 김군수를 설득하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고창이나 울진이나 신시도는 사실상 애드벌룬으로 띄운 것이라는 설도 후에 나왔다.
이는 완전히 사실로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논리나 이성적으로는 언뜻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전후 상황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이 어려운 핵폐기장 문제를 포함한 국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주적 절차를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부안 핵폐기장반대투쟁 전체에서 이것이 철저하게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던 것이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맨 처음에는 고창이 유력하게 떠올라 현지와 전북대에서 연대대책위를 만들자는 제안과 함께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창은 그 인근의 영광원전 때문에 장미빛 약속이 있었었지만 막상 결과적으로 홍농읍과 그 주변이 심각하게 참으로 황폐해진 것을 보고 아예 진저리를 치며 반대하였고 다음에 군산의 신시도와 함께 동해안의 울진이 떠올랐다. 대통령직인수위의 국정과제 아젠다에도 핵폐기장 문제가 들어있었고 드디어 2월에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래는 나중에 심각하게 떠오른 부안군 위도에 관한 논의나 대두는 전혀 없었다. 전북에서는 고창에 이어서 군산의 신시도가 많이 대두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드시 대책위가 꾸려져야만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고 특히 부안지역에서는 관광지인 격포와 곰소의 주민들이 행여라도 부안에 올지도 모르는 가능성이나 의구심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김종규 군수는 원래 위도 출신이었고 그는 원래는 부안출신의 5공 대표인물인 하나회출신의 고명승 전 대장이 정치인으로 변신할 때에 비서를 역임하고 민주당 천하인 부안에서 무소속으로 나와서 소신과 철학은 약하나 특유의 친화력과 부지런함으로 군수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당시에 위도 주민들이 방사능폐기장 유치신청에 적극적이고 그리하여 도장을 찍은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래 위도는 1963년도에 전남 영광군에서 전북 부안군으로 편입되었고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14여 Km떨어져 있고 뱃길로 40여분이 소요되는 섬이다. 일찍이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산을 품고 있는 바다와 빼어난 절경 및 풍부한 해산물들로 가히 유토피아 낙원으로 건설코자 했던 ‘율도국’의 모델이 바로 위도였다. 위도에는 2003년 기준으로 672가구에 146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위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영광 원전에서 배출되는 온수 때문에 바닷물 수온이 높아져서 고기잡이도 안되고 새만금의 물막이 공사가 진행됨으로 인해서 바다 생태계가 변화하는 상황으로 연근해 어업이 점차 사양길 상태에 심각하여 지는 상황에서 정부와 한수원 작전팀이 위도를 작정하고 투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실 위도가 방폐장 유치운동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1999년 영광원전 보상 등을 받기 위해 유치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었으나 당시에 외부 및 인접지역에서 반발한 탓으로 포기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5월에 주민대표 67명이 참석하여 당시 존재하던 위도면원전보상대책위원회를 방폐장유치위원회로 출범시켰다. 이들은 물론 유혹적인 직, 간접의 보상은 물론이고 또한 극적인 위도 개발을 촉진 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도 큰 동기와 추진력이 되었다. 어업보다 관광산업 혹은 취업확대 등에 따른 소득증대 및 문화시설 확충의 욕구와 함께 특히 35리에 이르는 위도와 육지인 격포까지도 연결해주는 다리건설의 가능성도 내다보면서 위도발전을 가히 100년 가까이 앞당길 수 있는 것들이 강한 추진동기로 가능할 수 있었다. 위도 측에서는 6월 5일 섬대표 1여명이 전북도의회를 방문하여 방폐장유치 성명서를 발표하고 도의 지원을 요구했다.

원래 한수원과 산자부로서는 방폐장 유치문제는 너무도 오랫동안 해묵은 고질적이고 힘든 과제였다. 그래서 한수원의 공작팀들은 섬사람의 저항이나 심리적인 거부를 피하기 위하여 낚시꾼으로 위장하고 투입되기도 하였다 한다. 아울러서 산업자원부가 마련한 장기구상과 핵폐기장 유치를 하는 지역에 대한 투자규모는 향후 20년간 총 2조원 이상의 지역개발 재원을 약속하는 유혹적인 내용도 제시되었다. 그 구체적 조건은 1.핵심사업으로 8600억원: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양성자 가속기, 한수원 이전 2.지원사업 7500억원: 3000억원 이상 지원금, 각 부처별 지역지원사업 3. 지역개발 4900억원: 테크노파크, 산업단지, 주거단지, 관광 레저 단지의 조성 등이었다. 심지어 이외에도 설로서는 현지주민들에게 실 보상금 5억도 나돌면서 최소한 1억 이상씩의 보상금은 틀림없다는 식으로 떠들면서 현지주민들은 핵폐기장이 들어오면 남은 주민들은 여기에 취업을 하고 아닌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떠나면 된다는 식의 여론몰이를 하기도 했다. 여하튼간에 이렇게 조성된 현지 여론을 조작하여 유치신청 찬성 동의서가 군 의회에 제출되자 부안군의회는 압도적 다수로 반대하여 의안상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부안군 전역과 군민은 핵폐기장 반대여론으로 들끓기 시작하였는데, 김종규 군수는 현지 주민들의 신청의사가 법적 근거가 되고 또한 직선된 군수가 신청하는 것이 주민의사라는 말도 논리도 되지 않는 궤변으로 신청서 접수마감 하루 전에 산자부에 유치신청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이 비논리와 궤변으로 추진된 방폐장유치가 ‘판도라의 상자’가 되고 어려움과 만악을 불러온 핵심적 요인이 되었다. 이로부터 어이없는 유치건은 일사천리로 전개되어 전국의 언론들이 17년 묵은 정부의 골치덩이 과제가 부안 위도로 확정된 것처럼 보도하고 산자부도 단 한 번의 지질조사의 흉내만 겨우 낸 채로 후보지로 적합하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러나 반면에 이상한 여론몰이 조작과는 달리 국무회의에서는 국가기간산업에 나쁜 전례가 되는 현지주민들에게 현금 직접보상은 안 된다는 결의가 나왔다.

산자부는 김종규 군수의 논리대로 소위 주민직선의 군수가 신청했으니 이는 곧 부안 주민 다수의 뜻이라며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도 보도자료를 내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사실상 너무도 어이없는 군수의 궤변과 논리가 명백하였고 이 설령 엉터리 논리로 한다 해도 군수만 직선이고 군의회를 구성한 군의원들은 직선이 아닌 것이냐는 질문이 얼마든지 가능한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때문에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장도 당연히 중요한 조약이나 정책 등과 비준에 국회나 지방의회의 동의절차가 헌법상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지방정부의 수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지방의 조례제정이나 중요한 정책 사안들은 모두 다 지방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법과 규정에 정해있는 것이 필지의 사실이었다. 때문에 지방의회의 동의절차를 자의로 무단 생략한 군수의 행정행위가 사실상 완전 무효이고 원천무효행위임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자부의 발표 후에 명백하게 드러나고 밝혀진 김군수의 부당한 행위와 궤변으로 인하여, 곧 김군수 본인의 사과와 해명으로 이어지고 김종규 군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행정행위가 군민의 의사를 무시한 절차상 내용상 명백한 하자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같은 상황에서 후에 부안대책위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 김진원이 회장이었던 부안농민회를 중심으로 방폐장 유치 움직임에 대한 반대의사가 표명되고 종교계, 사회단체들을 망라하여 적극적인 반대준비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5월 19일 방폐장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20일 부안성당교육관에서 부안지역 민주당과 개혁정당, 종교계, 환경단체, 정당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정당관계자 3명, 종교계 3명, 사회농민단체 등 15명 내외로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격포지역발전협의회도 21일 모임을 가지고 방사성폐기장 유치반대를 위해 위도 어선과 여객선의 격포항 입항 저지대책을 협의했다.

7월 10일 부안군청 앞에 천막농성장이 만들어지고 문규현 신부와 김인경 교무들이 군수를 면담하여 다시 핵폐기장 신청할 의향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을 때에 김군수는 분명히 신청하지 않는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하루도 안 된 7월 11일 아침에 김종규 군수가 갑자기 신청을 했다는 것-경찰 쪽에서도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다-이 밝혀져서 난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때 김종규 군수실에 확인 차 들어간 부안농민회 김진원 회장은 배신감에 몸을 떨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군수에게는 차마 못하고 의자를 들어 부수고 시계를 부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부안군수의 이 거짓말은 군민들에게 커다란 배신감으로 당연히 나타나고 첫째로 군민들에 공언하고 약속을 뒤집은 것, 둘째로 군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진솔하게 수렴하지 않은 것, 셋째로 부안이 어느 곳 보다도 관광지라는 특성이 있는 바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들에 대한 커다란 배신감과 불신이 부안사태의 핵심과 태풍의 눈이 되고야 만 것이었다. 이같은 부안군수의 변심에는 당시 전북 지사이던 강현욱 지사 등의 설득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뒤 이어서 부안군의회에서 위도주민이 청원한 위도 방폐장 방사성폐기물 설치 유치건이 부결되고, 부안대책위와 부안군민의 거센 항의와 유치 철회 주장이 강하게 일면서 방폐장관련 부안주민의 항의운동이 7월 11일, 부안군민 1000 여명이 부안군청 마당에서 항의시위와 원천무표 선언으로 일년 여에 걸친 길고 긴 방폐장 유치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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