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을 만난다. 이 마지막 문을 지나면 대웅보전에 닿는다. 이곳은 법당(法堂)이고 그 집은 ‘진리로 가득 채워진 집’이다. 내소사에는 불이문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있는 봉래루(蓬萊樓)라는 웅장한 누각을 만난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누각으로 현재는 법당으로 인도하는 문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141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1823년에는 만세루(萬歲樓)란 이름으로 중건되었으며 봉래루란 현판을 별도로 달아 별칭으로 사용하다가 봉래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봉래루 내부에는 각종 현판이 가득하다. 고려중기 대표적인 시인 정지상의 시를 비롯해, ‘내소사만세루중건기’, ‘변산내소사사자암중창기’ ‘변산내소사영세불망기’ 등이다. 만세루중건기에 따르면, 영조 순조 어간에 두 번이나 불이 났으며 중건 시에 주지는 계홍, 도편수는 경훈이며 승려였다.
  사찰에서 대중들의 중심공간은 대웅보전 앞의 마당이다. 일상 예불이 이 마당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귀족층 지원으로 대규모 예불이 야외에서 치러졌다. 대웅보전 앞에는 야외 예불을 위해 큼지막한 괘불탱을 걸었던 돌로 된 걸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야외에서 크게 베푸는 설법의 자리에 많은 신도들이 모여드니 말 그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서면서 야외의 대규모 예불은 거의 사라졌다. 농민이나 서민층의 신도들이 야외 예불에 쓰일 막대한 재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일상 예불이 바깥마당에서 실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불전의 실내는 바닥에 박석을 깔았다가 예배장소가 옮겨지면서 나무로 만든 마루로 바뀌었다. 대웅전의 불상도 뒤편으로 배치되면서 앞쪽으로 예불 장소가 확보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오면 대웅보전의 실내는 거의 다 마루를 깔게 되고 이제는 실내 예불이 보편화 되었다.
  마당과 연결된 대웅보전 앞의 누각의 쓰임은 첫째, 법회가 있을 때 마당에 연결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둘째, 이곳은 승려들의 휴식처로 쓰이기도 했다. 셋째,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을 접객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내소사 봉래루의 기둥은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높낮이가 다른 주춧돌에 기둥을 얹다 보니 길이가 짧았다 길었다 한다. 봉래루는 2층의 누각이지만 밑으로는 퉁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다. 봉래루의 마루면이 마당 면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봉래루 밑으로는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의 역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누각 밑으로 사람들이 통과하는 길이 만들어졌다. 아래층 기둥들을 살피면 원래의 높이보다 60㎝ 정도 들어 올린 흔적이 보인다.
  봉래루는 마당이 누각 마루면과  연장되는 구성이었다. 하지만 건물을 두자 정도 높임으로 마당과 이어지는 연속성을 깨뜨렸다. ‘건물높이가 조정되면서 전체 조화면에서 안산을 가리고 말았다. 이것은 백제계 사찰의 일반적인 원리, 평지성의 원리를 간과한 결과이다. 지금이라도 봉래루의 아래 기둥들을 낮춘다면 내소사의 수평적 공간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김봉렬, 『김봉렬의 한국 건축이야기 1』)
  봉래루라는 날렵한 현판은 변산을 봉래산으로 불린데서 온 듯하다. 부안군청 뒤의 ‘봉래동천’이라는 글씨와도 일맥상통한다. 봉래루는 묵직한 목조 구조임에도 사통팔달의 기둥으로 인해서 위압감 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단청을 하지 않았기에 목재에서 아늑함이 풍겨 나오고 봉래루 기둥을 받치고 있는 덤벙주초는 이웃 아저씨처럼 친근하다.
  누각 밑에 서면 가느다란 바람이 기둥 사이를 헤집고 어느새 달려와 지친 몸에 속삭인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곳에서 만난 모든 느낌은 오롯이 당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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