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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39-역사의 영웅을 망각하지 말라-지운 김철수의 호남 부안적 존재 의미와 33년 장기수 임방규

어언 우리 부안민중사는 그 대미를 향해 항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지운 김철수선생의 호남과 부안민중사적인 그 의미와 존재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검토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에는 그 성격의 연속선으로 인해서 호남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좌익세력이 강했던 부안의 비극과 함께 그 당연한 결과로서 임방규를 비롯한 장기수들의 문제를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특히 평창올림픽 이후에 한반도에 조성된 남북한 정상의 만남과 새로운 통일과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이런 검토는 매우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와 그 자손을 한분이라도 더 찾아내 기리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한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며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며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다. 기억하고 기리겠다”고 밝혔다.

현재 지운 김철수의 부안 백산면 대수리의 본인이 마지막 삶을 오랫동안 은거하였던 본인이 두손으로 손수 지었던 작은 우거가 훼실될 상황에 처해있는 안타까움은 부안 민중사에서 생생히 다룬바 있다. 이를 방치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다시 한번 안타깝게 부안의 관계 민간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또한 금년 2월의 김철수 선생의 유일하게 남았던 따님 김용화님의 사망 이후에 막상 현실적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의 묘소가 부안 백산면에서 대전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됨에 따라서 그래도 때에 따라서 김철수 선생을 묘소를 찾아 참배하며 추모하던 최소한의 예우도 막상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과거에 지운 선생을 친부모 이상으로 깍듯이 모시며 받들었던 백산고교의 고 정진석 교장 선생이 지운 김철수 기념사업회를 강력하게 이끌던 사업회도 현재로서는 유명무실하게 표류하고 있다.
새로운 부안군수의 부임과 함께 지운 김철수의 생전에 지내시던 우거의 완전하고 안전한 복원과 현양사업이 부안군과 민간차원에서 대대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지운 김철수기념사업회>도 다시 강하게 추진되고 반드시 선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던 ‘독립운동을 하신 가정은 삼대가 망하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삼대를 넘어 번영하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절대로 아니되고 반드시 고귀한 희생과 역사를 우리 모두가 기리고 그 의미를 온전히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살려내는 것이 우리들의 삶과 통일과 미래를 위해서도 너무도 필요한 것임을 통렬히 깨닫고 선양하는 것이 절실한 것이다. 오늘의 밝은 날과 현실은 과거의 우리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불굴의 독립투사와 혁명가들의 역사와 삶 위에서 가능한 것을 망각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거울을 상실하는 엄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제하의 조선독립운동에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과 혁명운동도 강력한 민족해방운동으로 참으로 필연적인 것이었다.

해방 후 박헌영을 처음에는 인정하고 밀어주었다가 후에는 그가 이끄는 잘못된 종파주의적 당운영에 강력한 제동을 건 남로당대회파로 나선 김철수를 포함한 6인은 당대 공산주의운동진영의 쟁쟁한 인물이요, 투사들이었다. 박헌영이 장악한 중앙위원회에 들러리로라도 앉히지 않을 수 없던 중진들이었다. 그중 가장 원로였던 김철수(1893-1986)는 그 경력과 존재로서는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간판이 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전북 부안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1912-16년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후 몇 해 동안 상해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귀국,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이 되었고, 1926년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후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9년 제3차 및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당이 와해된 후 당 재건에 진력하다가 이듬해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 출감하였으나 1940년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마침내 해방 때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총14년의 징역에서 풀려나왔다.
김철수는 해방 당시 공산주의자 중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인물이면서 박헌영의 지도력을 인정해 준 것이 박의 득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찍이 와세다대학 출신에 초기 2.8독립선언에 이어서 빛나는 1920년대의 독립을 위한 불굴의 투쟁과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활동을 하다가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14년 가까운 투옥 끝에 해방 후 공주감옥을 나온 최고의 혁명가의 ‘스펙’을 갖고도 자신이 나서기보다 열심히 일할 사람을 밀어주는 것이 해방 당시 50대 초반이던 김철수의 자세였다. 그런 그가 남로당의 내부분열과 바른 당 리더쉽의 확립과 논의를 위해서 혁혁한 6인의 혁명지도자들과 함께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박헌영은 당권 정지와 출당으로 응했다. 이같은 환멸적인 결과로 공산당에서 나온 김철수는 여운형의 사회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사회노동당이 해산하고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다시 정치에 나서지 않았다.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 30여 년간 궁핍 속에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필자가 독일유학 전에 찾아뵙고 직접 말씀을 들었던 지운 선생은 과연 고결한 민족주의자이며 투철한 인간적 사회주의혁명가이셨다. 강직한 선비 혁명가셨다.

부안과 특히 변산은 일찌기 교산자 허균의 홍길동 전에서 홍길동 활빈당의 근거지이고 유배지이기도 했다. 또한 동학혁명의 성스러운 본향이기도 한 부안에서 현대 독립투쟁과 사회주의운동의 큰 인물 지운 김철수가 배출된 탓으로 해방 전이나 해방 후에 부안은 단일지역으로는 호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진보좌익세력이 강한 곳이었고 따라서 그 연속선으로 한국전쟁 이후에
비전향장기수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비록 동학혁명 시기에 북접과 연결된 김낙철 대접주의 노선 탓으로 직접혁명의 불길은 조금 비껴가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적으로 동학혁명에 관련된 많은 소중한 이들이 무수히 희생되어야만 했고 이후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시기에 수많은 진보인사들과 세력들이 이른바 좌익으로 그리고 빨치산으로 사실상 운명적인 개인과 가정의 피해와 죽음은 물론이고  집단적인 피해와 시체말로 작살나야만 했다.

세계적으로 혹독했던 백인지배의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공의 지배에 싸워 민주주의혁명을 이룩한 장기복역의 영웅이 넬슨 만델라이다. 그 만델라가 장기복역했던 곳이 로빈섬이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물론 이념적으로 그들을 시대착오적 골수사회주의 혁명가들로 지칭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임방규의 증언에 의하면 무려 100명이 넘는 30년 이상을 장기수로 복역한 이들이 있다했다.! 결과적으로 임방규는 32년 6개월을 장기수로 복역하고 우리가 전에 다루었던 허영철도 32년을 복역했다.

필자는 2018년 봄날 한식절 무렵에 부안 출신의 장기수의 삶으로 유명한 임방규 선생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이 날 나눈 인터뷰의 내용을 부안민중사의 한면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그는2000년 6·15를 기념해서 만든 통일광장(비전향 장기수 모임)대표를 맡고 있다.

임방규는 1932년 부안 동진면 생으로 그가 14세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고 1948년 고창중학에 재학 중의 어린나이에 민주학생동맹 활동을 하였다. 그는 그 후에 전주공고를 다니다가 상경하여 의용군이 되어 낙동강 전투에도 참여했다가 다시 쫓겨 임실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빨치산활동을 하면서 체포되어 1952년 만 20세의 나이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에 만 20년이 되던 1972년에 석방되었다. 임방규는 원래는 의용군 2진으로 차출되어 강원도에서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고 그 후에 남하하여 순창의 회문산에 있었고 임방규의 아버지 임병기와 4살 연상의 형 임창규는 모두들 변산에 있었다. 그리고 부친 임병기는 3월5일에 돌아가셨다. 결과적으로 부안 동진면의 임방규 가족은 부친과 형과 본인이 모두 6.25전란을 통해서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모두 역사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임방규는 1972년 9월에 석방되어 물론 요시찰이지만 그래도 감옥밖에서 5년을 살았다. 다시 아무 영장이나 재판 절차도 없이 그냥 구속되어서 청주보안감호소에 쳐 넣어진 거였고 그렇게 해서 총 33년가량 징역을 살았다.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형을 다 살고 나와도 아무 때나 재판 없이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것이 사회안전법인데 이 법이 박정희 때 만들어진 것인데 참으로 반인권이며 반민주적인 악법이었다. 즉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감옥을 살아야 하는 법이었다. 다시 일천만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자는 KBS의 상봉의 잔치가 벌어지던 1977년 10월 1일에 다시 체포 수감되어 그는 다시 모처럼 이룬 가족과도 생이별을 하면서 1989년 9월에야 비로소 석방이 되었다. 그가 1972년에 만 40세의 나이로 출소하여 늙으신 어머님을 다시 뵙고 9살 연하의 부인을 만나서 딸을 슬하에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아빠가 감옥에 들어가서 있는 동안에 딸은 엄마 슬하에서 홀로 성장하여 지금은 한서대를 거쳐서 동국대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다고 하였다. 그가 출소 후에 이문동 경동시장 근처에서 장기수 동지들과 함께 <민중탕제원>을 열고 약을 달이면서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임방규는 출소 후에 장기수들을 대표하여 활동과 저술을 하고 그러던 중에 젊은 사제들이 단식하는 곳에 초대되어 말씀을 증거하기도 했다.

그가 사형언도를 받고 장기복역 중에 그나마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61년도 당시에 전통적으로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던 것으로 유명한 대전형무소에서 무려 790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나서 이들 사상범들이 각 형무소에서 잡범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이 크다고 한 이유로 이들이 1968년에 모두들 대전만이 아닌 대구와 광주와 전주 목포등으로 분산 수용되어 있다가- 이 때 감옥으로의 사색의 주인공 신영복도 대전에서 전주로 이감됨- 1972년에 중앙정보부가 조직한 전향공작반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공작대상이 되어 전향이 이루어지고 석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월남패망 직후에 박정희의 명령에 의해서 아직도 이념적으로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혹독하게 다루고 전향자들을 많이 만들 것이 지시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혹독함은 말할 것도 없었고 평시에 장기수들을 다루는 감옥내의 처우도 참으로 비인간적이었다 한다. 추운겨울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이 불어오는 식의 환기통의 냉기와 감옥 안의 무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가마니 하나에 담요 한 장 덮어 지내는 것도 물론 고통스러웠으며 배식되는 밥의 양도 너무 적어 임방규의 경우에는 밥덩이를 네 쪽으로 나누어 오래 씹어 먹어야했으며 그의 표현에 의하면 밥 적은 것을 먹으면서 깊이있게 사고하기에 힘썼다 한다. 미치 가물가물 거리는 허기와 정신을 가누면서 석유등불이 타오를 때의 치열한 시퍼런 불꽃을 늘 연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건한 낙천성을 지니기에 힘쓰고 만약에 내가 죽어도 자신이 꿈꾸며 신념으로 지녀온 세상이 실현된다는 믿음을 견지하기에 애썼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극도로 열악한 감옥생활의 비참함 속에서도 육체적 정신적 강건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한다.

당시에 박정희는 남한에 공산주의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시화시킬 목표와 정책 지시를 내렸다 한다. 임방규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에 어줍잖은 문인들을 동원해서 엄동설한에 눈이 펄펄 날리는 날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그리고 누이가 오빠에게 드리는 전향의 호소글이 만들어 보내지고 심지어 심리전술로 성우까지도 동원되어 감성적인 동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다. 감옥내의 스피커를 통해서 각 감방에 애상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을 공급하고 반공강연을 들려주기도 했다. 심지어 충북 출신의 이두규의 경우에는 90노모를 업고와서 “애야 너하고 밥을 한번 먹고 내가 갔으면 좋겠다”라는 노모의 간청을 하도록 공작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의연하게 아들이 “전향을 하면 못쓰는 것이고 이 아들이 죽습니다”라고 노모에게 말씀드리자 90노모가 “세상에 우리 아들같은 효자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고 했다. 이북출신인 한축익이라는 장기수에게는 어린 자녀들을 공작반이 데리고 왔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에는 전향서와 한 장의 종이에는 이혼서류를 가져왔는데 결국 이 사람의 경우에는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준 후에 정신이상이 된 불행도 있었다 한다. 그리고 전향공작을 물론 제대로 된 성직자는 아닐 수 있겠지만 목사가 담당을 했다 한다. 이러면서 매우 모순적인 전형적인 악법에 속하는 사회안전법이 실시되고 그 결과로 예비구금이라는 아주 비인권적인 제도가 시행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들 장기수들은 고령의 나이에 석방되었을지라도 아직도 보호관찰법에 늘 묶여 있는 상태로 일상적으로 3개월마다 자기의 생활보고를 경찰에 해야만 하는 강제의무가 있었고 이것을 어길 경우에는 무려 2년의 징역이나 100만원이하의 벌금을 물어야만 하는 규정이 있다. 임방규 선생은 이 말을 들려주면서 껄껄 허허롭게 웃었다. 이제 강제규정이 있지만 더 이상 구구이 신경쓰지않고 산다고 했다. “이미 32년을 살은 내게 그 까짓 2년 복역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미 다루었던 허영철과 임방규 이외에도 부안 출신의 대표적 장기수들은 다음과 같다.

  신인영 ; 1923년 부안출생. 일찍이 동학혁명과 독립운동가문에서 성장하여 1948년 서울상대재학중에 유격대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 한 후에 북한에서 부인과 3남일녀을 둔 상태에서 1967년 월남하여 체포됨. 당시 어머님이 그리워서 고향집에 들렸다가 20분도 안된 짧은 상봉 후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1년간을 복역하였다가 노모에 앞서서 2002년 1월11일 72세로 사망.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 통일애국묘역에 안장됨. 90세된 고봉희 어머니가 고생한 아들에게 칼국수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소원하심. 32년간 모진고문과 전향공작에도 지전향 장기수로 복역하여 국제사면위-엠네스티의 양심수로 선정되기도 함.
  손성모 : 부안출생으로 2남3녀중의 막내로 성장. 가난한 가정출신으로 머슴살이를 하다가 고학을 해서 서울대에 입학. 인민군 점령후에 의용군으로 월북. 1967년에 제대하고 김일성대 역사학부를 졸업 후에 함흥시 교원대학 교수로 근무 중에 1970년대 후반에 전남해안으로 남파되어 승려로 위장활동하다가 1981년 문경에서 체포되어 19년의 수감생활을 함. 1999년 연말에 DJ정부의 특사로 광주교도소 석방되어 남쪽의 누님과 조카들과 이별하며 2006년 6.25남북공동선언에 의하여 평양으로 송환되어 현재는 조선작가동맹의 시인으로 활동 중임.
 손윤규 : 부안출생으로 해방 후에 남로당 가입 활동 후에 6.25 전란 중에 빨치산 활동 1955년 경찰특무대에 피체 구속.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후에 1976년에 옥사. 파주시 보광사내 공원형태의 통일열사묘역에 안장됨.

어느날, 우리의 민족통일의 날이 도둑같이 찾아오면, 남북의 모든 비극과 모순의 역사에서 희생된 이들을 가리지 않고 참으로 크게 해원 상생하는 그런 날이 가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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