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전나무 길 끝날 즈음에 만나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단풍나무 길에 닿는다. 이곳에서 왼쪽의 연못을 돌아 실개천을 건너 양지바른 곳에 있는 부도밭을 오른다. 이곳 들입에는 한 쌍의 간지람나무가 반긴다. 내소사의 부도밭은 한적한 곳에 있어 탐방객들이 눈여겨보지 않지만 사찰 배치에서는 대웅전 마당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찰의 승려가 열반한 뒤 그 분들의 사리를 모시는 탑을 부도(浮屠)탑이라고 부른다. 부도와 탑을 비교해보면 사리를 봉안한다는 면은 같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르다. 또 건립 위치도 탑이 사찰의 중심 위치인 법당 앞에 세워지는데 반해, 부도는 사찰 경내의 변두리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며 이를 부도밭이라 부른다. 부도는 조형 양식이 자유롭게 조성된 경우가 많으므로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주로 밥그릇을 덮어 놓은 형태나 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어떤 것은 목조건축물을 그대로 본뜬 것도 있다. 
  부도에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탑비(塔碑)가 따로 세워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 · 문화상 등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 이와 아울러 각 부의 정교한 불교 조각과 화려한 장식문양으로 조각의 극치를 보이고 있으며, 형태도 전체적으로 균형된 조화미를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꼽힌다.
  내소사의 부도밭에는 10여기의 부도가 2열로 배치되어 있다. 앞줄의 4기는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있으나 뒤쪽의 5기는 법명조차 알 수 없는 부도이다. 앞줄의 부도는 능파당 · 만허당 · 관해당 · 해안당의 근대 부도이다. 비석은 3기가 있다. 맨 왼쪽에는 탄허스님의 글씨로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가 새겨진 비가 서 있다. 해안 스님은 격포 출생으로 내소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출가했다. 평소에 인간애가 넘쳐 제자와 신도들에게 더없이 자상했다고 한다. 1974년에 입적했다. 해안 스님의 비를 쓰면서 선사, 대사라는 호칭을 버리고 범부라고 한 탄허의 안목이 돋보이는데 뒷면을 보니 그 오묘한 반어법이 역시 대선사들의 차지였다. ‘생사가 여기에 있는데 여기엔 생사가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너와 나가 둘이 아니 듯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라는 얘기다. 죽음조차도 평범한 일상으로 본 것이다.
  만허선사비는 제자 해안스님이 주도하여 영호스님이 비문을 짓고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며 천도교 신자인 오세창이 글을 썼다. 비 뒤에는 이 비를 세운 해를 소화(昭和) 19년으로 썼으니 서기로는 1944년 일제강점기다. 여기서 소화는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인데 비에 새겨진 이 연호를 누군가가 뭉개버렸다. 이렇게 글자를 훼손한 것을 부안의 곳곳에서 발견한다. 글자를 뭉개서 화풀이는 할 수 있겠지만, 정작 일본에 붙어서 같은 민족을 못살게 한 부안의 친일파 청산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내소사 부도밭에는 부도 1점이 사라지고 자리만 남아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부도였는데 문화재청에서는 1988년 7월 15을 도난일자로 적시하고 도난품으로 올려놓았다. 높이 2m 둘레 70㎝ 인 부도는 이곳에서 사라져서 이름을 숨긴 채 어느 곳에 놓여 있을까. 언젠가는 내소사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생사가 없는 부도밭에서 조차 아름답고 돈 될 만한 것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과한 욕망으로 경쟁해야하는가.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