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과 영남의 인간승리를 나눈 강금원과 노무현

1987년 12월의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의 탄생과 더불어 비록 김대중과 김영삼의 야당지도자와 야권의 분열로 인하여 대통령은 어이없이 어부지리로 민자당에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총선거를 통하여 여소야대의 국회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비록 대통령은 못되었으나 김대중의 강력한 제일야당과 여소야대의 정국 상황 속에서 모처럼 국정운영은 과거의 군사독재를 계승한 민자당 노태우 정권에 매우 효과적으로 과거의 적폐와 모순들을 들어내고 제거하여가는 역사적 청산작업도 가능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과 그로 인한 1988년의 헌법과 새로운 헌정질서와 강력한 야권에 의한 전두환을 승계한 노태우 정권에의 견제로 인하여 모처럼 대통령직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차선으로나마 민주화가 실질적으로 점차 가능하던 희망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적이면서도 강력한 김대중 주도의 여소야대의 정국상황이 대단히 불만스러울 수 있던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과 김종필이 어느 날, 갑작이 국민의 뜻에 의한 정당정치와 상식적 정국운영이 아닌, 인위적이고 정치공작적 차원에서의 이른바 3당합당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김대중과 그가 이끄는 강력한 제일야당에 의한 정국운영과 정당정치를 일거에 뒤엎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각각 보수적인 연합을 이룸으로써 호남과 김대중의 정치적 힘과 세력을 고립시키고 소외시키면서,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차기 정권을 이양하려는 정치공학적 야합이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최근에 92세의 천수를 누리며 사망하였지만 김종필이 언제나 회색적이며 기회주의적으로 만년여당에 편승하는 그의 정치적 기생성으로 이같은 정치적 대야합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세력으로서는 박정희 전두환을 승계하는 노태우의 군부독재 영남세력과 비록 야권이었지만 지역적으로는 부산 영남 세력을 대표하는 김영삼과 충청도의 맹주임을 자랑하는 김종필의 야합이었다.

이같은 인위적이고 정치공학적인 3당통합에서, 직격탄을 맞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김대중과 그가 이끄는 강력한 제일야당 평화민주당이었다. 이같은 3당통합이 없더라면, 가장 합리적으로 가시적인 노태우정권 다음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가능성과 집권 가능성이 김대중과 그의 제1야당에게 있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일시에 김대중에서 김영삼으로 뒤바뀌어 진 것이, 민의를 배신하고서라도 그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가 초래된 것이 바로 3당야합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배신의 정치, 상식과 정도가 아닌 정치의 현실에서 김대중과 그의 정당이 아니면서도 강력하게 이를 반대한 소수의 신념의 정치인들이 있었다.

삼당야합에 온 몸으로 반대한 노무현

바로 그 중에 일찌기 부산에서 상고출신의 인권변호사로 민주항쟁의 거리와 노동자들을 위하여 온몸을 불태우다가 김영삼에 의하여 정치권에 입문하여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국민 속에 강력하게 어필한 노무현이 있었다. 그는 너무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민중의 아들이어서 대학진학도 못했으나 고졸학력으로 고시패스를 하고 판사를 하다가 인권 민주변호사로 싸우다가 정치인이 된 인물이었다. 노무현은 3당야합에 누구보다도 길길이 뛰면서 강력하게 항의하고 반대하였다.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 부산출신이고 김영삼에 의하여 정치입문이 이루어진 관계여서, 그는 사실 이런 반대를 하지 않고 김영삼의 그늘에 있었다면 출세의 비단길과 꽃길을 약속 받을 수 있었던 김영삼에 의하여 촉망되고 그 능력을 인정받던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바보' 소리를 들어가면서 비단길을 버리고 참으로 고통스럽고 외로운 자갈밭길을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 결과로 노무현은 참으로 '바보 노무현'의 별칭을 들어가면서 정치적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었다. 그는 강력한 부산지역의 패자인 김영삼에게서 정치적으로 당연히 버림을 받고 부산지역에서 번번히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을 하여야만 했다. 그런 노무현을 김대중이 인정하고 끌어안으면서 부총재직을 주고 격려하였지만 적어도 노태우정권과 그를 이은 김영삼 정권 내내 노무현의 정치적 입지와 길은 험난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 전형적인 영남 민중의 아들 노무현이 바보처럼 신념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런 고통과 외롭고 힘든 정치적 행로 속에서도 그의 정치적 신념과 무엇보다도 지역정치를 뛰어넘는 커다란 정치적 대의를 추구하면서 드디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바보 노무현'이 점차로 선한 국민적인 인정을 받고 대권 주자로까지 그의 입지를 넓혀갈 수 있었다. 노무현이 연거푸 낙선하여 고배를 마신 부산지역을 포기하고, 전국적인 정치일번지에 속하는 종로에서 보궐선거에 나서서 당선이 되었다. 그의 선거과정에서 어느 날, 노무현 선거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왔다. 낮선 전화의 주인공은 밑도 끝도 없이 "후원금을 얼마까지 낼 수 있는가?"를 물어왔다. 법정 한도액을 알려주자, 그 전화의 주인공은 돈을 싸가지고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인간 강금원이었다. 부안민중사의 시각에서 불우했던 부산출신의 정치인 노무현에게 아무런 댓가없이 헌신한, 부안이 고향인 기업인이자 인간 강금원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아직도 천민자본주의적 졸부문화가 판을 치는 한국사회와 함께 망국적 지역색으로 인간을 가르며 흔히 호남과 전라도를 이른바 의리없다고 폄하하는 모든 근거없는 비난을 강금원, 그의 삶으로 모든 것을 뒤엎어 인간승리를 확실하게 증거한 의인이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영남의 노무현과 호남의 강금원의 결합은 지역을 초월한 아름다운 가난한 민초 출신의 인물들의 인간적 신념적 결합이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정앞에서 오열하는 강금원 회장

1952년생인 강금원은 원래 부안출신이었고, 그의 집안은 부안에서도 유명한 만석꾼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비료사업으로 그 많은 집안 재산이 망하게 되어, 식구들이 부안을 뜨고 어린 강금원 또한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전주공고를 졸업하고 섬유화학염색계통의 기술자로 일하면서 그의 사업을 일으키고 입지전적인 성공을 젊은 날에 하게 된다. 일찌기 공고에서 익힌 화학지식과 그가 의정부 공장시절에 일본인 기술자로 부터 절치부심으로 익히고 배운 염색기술과 노력에 의하여 강금원은 가히 전국적인 젊은 빼어난 염색기술자와 권위자로 날리다가 아주 젊은 약관의 나이에 서울에서 무려 7-8개의 염색공장을 운영하다가 정리하고 부산이라는 커다란 산업지역에서 성공적인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산과 울산 등 영남지역에서 이른바 산업역군들로서 호남출신으로 살아가는 호남민중들이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영남에서 차별과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야만 했다.
비록 부산이라는 낮선 영남권에서 호남출신이라는 따가운 차별과 소외를 견디면서도 강금원은 자신의 사업과 분야에서의 탁월한 지식과 전문성과 능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빛나는 성공과 재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강금원은 자신의 섬유염색분야에서 거둔 독보적 성공에 이어서 충주지역에 풍광이 좋은 남한강가의 골프장도 인수하여 다양하게 사업적으로 역시 양양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노무현과의 인연만 없었다면 강금원 회장, 그는 세속적으로 가히 부러울 것이 없던 럭키가이 기업인이었다.

그는 비록 기업가였지만 품성이 강직하고 진실한 인간이었다. 그런 강금원이 바보 노무현을 언제부터인가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불우한 정치적 행로에 대한 연민과 바보 노무현의 인간적인 신념과 강직한 진실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선거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그의 자발적인 후원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비록 연배적으로는 차이가 나지만, 1946년생인 노무현과 강금원은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와 운명적인 동지가 되었다. 이런 깊은 우정과 동지적 관계는 그들이 비슷한 시기에 애석하게 이른 나이에 한 사람은, 참여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권위주의시대를 청산하는 커다란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은퇴 후에 가혹한 이명박 정권과 검찰의 박해와 모욕 속에서 2009년 5월 23일 고향마을의 부엉이바우에서 떨어져 삶을 마감하고, 한 사람은 조금 후에 매우 이른 나이에 뇌암으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호남과 영남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노무현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영결식장에서의 환자 강금원과 문재인

사망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공공연해졌다. 또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보수 언론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노무현의 유서의 내용 중에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라는 내용은 상당한 부분이 그의 생전에 그의 경제적 부담을 기꺼이 부담하고 안았던 강금원회장에 대해 적용될 내용일 수 있었다. 강금원과 노무현은 기업인과 정치인이라는 비록 전혀 다른 삶의 분야와 장르를 살았지만 그를 뛰어넘은, 그리고 태생이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역적 연고를 초월하면서 역경 속에서 진심과 진실과 신념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인연과 관계였다.

인간 강금원은 자신이 기술자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사업분야에서 강직하고 능력있는 사업의 권위자로 자처하였기에 조금도 정치적인 야합이나 정치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나 관계를 추구하는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그가 정치인 노무현에게 접근한 것은 그런 차원에서의 접근이 절대로 아니었다. 강금원은 한 번도 노무현이 어려울 때는 물론이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가 한도 끝도 없이 노무현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무한에 가깝게 베풀었지 한 번도 청탁이나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노무현이 판단착오로 어울리지 않는 장수천사업에 뛰어들어다가 가히 실패를 하고 파산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강금원은 그를 도왔고, 심지어 노무현의 젊은 참모들에게도 그들이 돈이 없는 죄와 상황으로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조건없이 챙겨주었던 것이 부지기수였다.

노무현대통령의 참모인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노사모 회장이었던 이기명, 노무현 정부의 평가포럼 집행위원인 배우 명계남 등에게는 시그너스골프장의 고문·직원 등으로 등재시켜 놓고 급여 명목으로 돈을 지급했으며, 이들에게는 회사 승용차까지 지원했다. 명계남에게는 2006년 10~12월 3차례에 걸쳐 5400만원을 전달했으며, 안희정에게는 2005~2007년 3차례에 걸쳐 4억 100만원을 전달했다. 2008년 8월에는 김우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의 임차료 3억 5000만원을 대신 내줬으며, 2007년 3월 윤태영 전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이 사직하자 2007년 7월 충북 충주의 한 금융기관에서 수표로 1억원을 빼내 건넸다. 2007년 9월 임찬규 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에게 8000만원을 줬고, 2007년 4∼12월 5차례에 걸쳐 참여정부평가포럼에 1000만∼2000만원씩 모두 6000만원을 송금했으며, 2005년 2월과 2007년 7월 2차례에 걸쳐 여택수 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에게 7억원을 건네는 등 20여명과 단체에 총 30여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15억원, 추징금 2억원, 몰수 채권 3억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에관한법률위반(배임) 등 혐의와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3년(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에관한법률위반(횡령) 등 혐의로 기소되고 형을 받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검찰의 기소에 강금원은 2009년 12월에 "일부 유죄 부분은 납득이 안간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결국 대법원에까지 가서 2012년 5월에 강금원 회장은 징역형이 확정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에게 댓가없이 준 자금이 총 30여억원이라면 힘든 정치적 행로를 살아야만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음양으로 그를 도운 강금원의 뜨거운 우정과 지원 및 경제적 도움과 힘은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의 삶과 집권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그 과정에서 어쩌면 인간 강금원은 아름답고 대단한 킹 메이커였을 것이다. 강금원 회장은 노무현을 파멸시킨 기업인 박연차와는 전혀 그 차원이 다르게 기업인으로서 아무런 보상없이 오직 노무현의 불우를 사랑하고 그의 신념과 역경에서 모든 것을 다 주고 이룩하게 한 호남과 부안의 빛나는 아들이었다. 강금원, 그는 모든 특권과 지역차별을 없애려던 노무현의 삶과 정치에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함께 승리를 거두게 만들었던 운명적이며 헌신적인 보살적(菩薩的)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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