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면 출신의 홍성모 화가는 몇 년 전부터 부안을 화폭에 담고 있다. 곰소에 터 잡고 부안의 사계를 그림으로 펴는데,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가 별 말을 못하고 작업하는 모습만 지켜보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의 그림에는 고향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과 존경을 담고 있었다. 위 그림은 내소사의 전나무 길과 겨울눈과 스님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목은 ‘겨울 산문(山門)’이다. 산문은 절의 문이나 사찰을 가리킨다.
  스님은 어디서 걸어 온 것일까? 해방 전이라면 바닷가 검모포(구진)에서 하선하여 내소사로 들어갔다면 환의재를 지나 석포, 용동, 원암, 입암 마을로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자기로 유명한 작도에서 백포를 거쳐 산길을 따라  내소사 앞마을인 입암으로 가는 길이다. 변산의 다른 절집에서 온 스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니 스님은 내소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주문은 절의 경계이다. 절 안으로 걸으면 사천왕문을 맞지만 절 밖으로 나가면 세속의 현실과 맞닥뜨릴 것이다. 전나무 가지가 휘어지도록 눈이 쌓인 날이니 눈이 좀 풀리면 길 떠나기가 좋으련만 바랑 하나 매고 스님은 훌훌 떠나버린다.
   내소사는 일주문부터 사천왕문까지 약 600m의 전나무 길이 조성되어 있다. 비록 2012년 태풍 ‘볼라벤’에 의해 수십 그루의 전나무들이 쓰러져 현재는 텅 빈 느낌이 들지만 내소사는 2014년 ‘전나무숲길 보식작업’을 통해 새로이 전나무를 심어 지속적으로 전나무 길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탐방객들은 이 전나무 길을 걷고자 내소사를 찾는다.
  그러면 이 전나무는 몇 년이나 되었을까? 소설가 이근영은 1938년 7월 초에 내소사를 시작으로 변산 일대를 돌아보고 글을 썼다. 거기에서도 내소사의 전나무 길을 소개하고 있다. 언제부터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이미 전나무 길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전나무는 해방 후에 돛단배의 돛대로 팔려나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60년의 신문에는 ‘사찰림(寺刹林)서 도벌(盜伐), 주지가 임의로 처분’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 전나무 70년 이상 된  20여 그루를 도벌하여 한 주당 6여만 환의 가격을 받고 매각했다는 내용이다. 이 일로 주지는 내소사에서 사직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업자를 몰래 끌어들여 내소사 주변의 전나무를 베어내 밤에 옮기다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재정이 어려운 당시 내소사의 운영을 위해 주지가 나무 베어내는 것을 눈 감았다는 주장 등이다. 이 일로 내소사는 분란이 있었지만 전나무는 지금처럼 살아  남았다.
  1965년에는 월명암 쌍성봉에서 시작된 원인모를 산불로 내소사가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1천여 명이 진화에 나서서 내소사를 지켜냈다. 전에는 내소사의 전나무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노력했다면 지금은 이 전나무가 내소사를 지키고 많은 관광객들을 내소사로 끌어들이는 아름다운 길잡이가 되었다. 전나무 길에는 종교도 사상도 없이 사람들을 이끌어 사찰을 고스란히 방문객들과 만나게 한다. 이처럼 종교에는 타 종교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향기 나는 전나무 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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