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의 민주화는 70-80년대의 참으로 치열한 투쟁 속에서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선도하던 학생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각 부문의 농민운동, 노동운동, 전교조 운동 등이 투쟁적으로 참여하고 성숙하여져 갔다. 이번 호 민중사에서는 부안에서의 1985년의 치열했던 지역 농민들의 소몰이 투쟁과 민중적 생존권을 위한 그 흐름과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군단위의 농민들의 투쟁이었지만 부안소몰이투쟁은 가히 전국적인 농민들의 소몰이 대투쟁의 대단원을 이룬 가열찬 투쟁이었으며 아울러 서울로까지 상경하여 당시에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상징과 심장부이던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의 6층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의 농성투쟁과정에서 마침내 최고의 야당지도자와 국가 전체 운동적 차원에서 농민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결말을 이루어낸 결과적으로 승리한 쾌거였다.
일찍이 한국카톨릭농민회(카농)는 1970년대부터 정부의 농민에 대한 강제 농정을 비판하고 농민문제에 대한 바른 주체적 방향을 제시하면서 전국적 농민조직으로서의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카톨릭의 종교운동 환경과 형식의 활동은 자칫하면 종교탄압으로 보일 수가 있어 농민들과 운동의 보호막과 방패 역할을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서 카톨릭 교회 제도와 조직체계를 통하여 전국적 단위의 체계적 조직활동이 가능하기도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각종 농촌에서의 농민투쟁과 문제에 있어서 해결사적인 운동을 선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각종 부문의 민중운동이 성장하고 따라서 농민운동 또한 자발적 농민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어서 점차로 카톨릭과의 갈등문제가 보이고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농민들의 투쟁적 집회와 시위방법 등에 있어서 교회상층부의 따가운 시선과 교회내부의 비판이 이미 안동교구의 오원춘 사건들로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갈등스럽게 나타나고 확산되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춘계 카톨릭교회의 주교회의는 카농은 1) 농촌의 복음화와 농민 선교활동 2) 사람과 땅을 비롯한 자연을 살리는 생명농업의 실천으로 방향과 활동을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카농이 스스로 1983년에 ‘제14차 전국대의원총회’에서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고 추구하는 ‘삶의 공동체운동’을 그 해의 활동 목표 중의 하나로 설정한 것에 비하여 상당히 후퇴한 카톨릭 주교회의의 방향설정일 수 있었다.
한편 1985년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안에서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민족전통을 이어받은 주체적 농민문화’와 ‘민주화, 협동화를 통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농민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원을 받으며 현장농민교육과 농민문제 홍보 및 조직화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큰 흐름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농민대중운동으로서 새로운 방향설정이었다. 이같은 기독교농민운동은 1984년 함평, 무안의 농민대회, 1985년의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과 안에서의 시위 등에 있어서 농민들과 시민들이 함께 하는 새로운 형태의 농민운동을 시도하였으며 전남, 전북지역과 충북지역에서 ‘농민생존권쟁취 및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반대투쟁위원회’를 지역농민 및 주민들과 연대하여 공동으로 결성하여 대중운동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과 추세 속에서 전국적 농민운동의 조직노선은 1986년에 크게 흔들렸다. 즉 자체 조직만으로 ‘9.1미국 농축산물 수입반대운동’을 전개한 카농은 자기 조직관리와 종교운동적 방향과, 이에 만족할 수 없던 또 하나의 농민운동의 통일적 기반을 조성하려고는 하지만 자체 역량이 미흡하고 부족한 기독교농민운동 등 기존 농민운동 조직은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 결과로 1986년부터 몇 개의 자생적인 군 단위 조직이 생겨나고 기존의 군 단위 조직들도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농민운동의 활동을 지향하며 확대해 나갔다. 특히 기독교농민회는 조직을 자주, 자립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농민운동의 지도성, 물적 토대 등에 있어서 자립적인 군 조직이 가장 명예로운 조직이다”라고 하였으며 전국농민협회 또한 창립 때부터 이같은 조직형태와 방향성을 확실하게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탈종교적. 자주적 농민조직으로 ‘전국농민협회(전농)’가 광주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제3의 농민조직으로서 태동되었다.
1970년 후반부터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비교우위라는 논리로 개방농정을 지향하면서 외국 농축산물을 수입하는 구조적 체계를 구축했다. 이 결과로 농민은 곡물을 비롯한 모든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말미암아 농사거리를 잃어버리고 빚더미에 몰리게 되고 이농의 대열로 도시의 변두리 민중으로 대거 흘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돼지고기 수입으로 인한 돼지파동, 쌀수입으로 인한 쌀파동과 쌀값 폭락, 과일 채소값 폭락에 이어서 외국소와 외국 소고기 수입으로 국내산 소값이 폭락하면서 1985년에는 2년간을 정성스럽게 키운 소가 한 마리당 무려 60만원의 적자를 보고 팔아야만 하는 현실과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에 대한 전두환 정권과 당국의 대책과 보상은 전혀 없는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1985년 카농과 기농의 중점투쟁은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소값 피해보상활동’을 통한 ‘외국농산물 수입반대운동’이었다. 그리고 1985년 4월 22-23일 기독교농민회원, 카톨릭농민회원 등 100여명은 서울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관에서 ‘전봉준장군 91주기 추모식 및 미국의 농축산물 수입개방요구 규탄대회’를 갖고 미국대사관에 항의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4월 22일 저녁 기독교농민회원 20여명이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은 농축산물 수입개방 요구를 철회하라” “정부는 외국 농축산물 수입을 중단하라” 등의 유인물을 뿌리며 항의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16명이 연행되고 23일에도 대사관 안에까지 들어가 연좌농성과 항의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어서 전남대와 전북대생 9명이 1985년 12월 12일 오전에 광주 미문화원을 점거하여 미국 대사와의 면담요청과 내외신기자회견 및 대규모 시민대회를 도청 앞 분수대에서 개최할 것을 요청하다가 모두 연행되기도 했다.
카톨릭농민회는 1985년도 투쟁활동의 중심을 외국농축산물 수입반대와 소사육 농가의 소값피해보상투쟁으로 정하고 전국적인 투쟁의 전개를 촉구했다. 기독교농민회 역시 카농과 연대하거나 공동개최로 이같은 항의운동과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과로 1984년 6월에서 1985년 12월 31일까지 카농회원들의 집회 시위와 농성횟수가 48회에 달하고 기농은 24회에 달하였으며 여기에 총동원된 농민의 숫자는 무려 1만 5천명에 달하고 연행자 419명, 부상자 29명, 구류6명, 불구속 기소 1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지역 농민들의 소몰이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게 되었다.
농민들의 소몰이 시위는 경찰의 농민시위를 저지하는 강력한 수단인 최류탄의 남발을 무력화시켰다. 기왕의 농민들의 시위나 농민대회는 대체로 천주교 성당 밖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고, 성당 밖에 진을 친 경찰의 최류탄 공격 앞에서 번번히 무산되고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몰이 투쟁은 만약에 소가 최류탄을 맞으면 시위 군중과 경찰들 속에서 어떻게 성을 내고 날뛸지 몰라 농민측이거나 경찰측이거나 인명 피해가 클 수 있어, 이를 우려한 경찰의 최류탄발사를 무력화시키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몰이 시위를 통하여 농민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일반농민들과 지역주민에게 잘못된 농업정책과 억울하기 짝이 없는 농민들의 현실문제를 알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수십마리의 소와 수백명의 농민들이 항의하면서 걸어가는 대열의 진풍경 속에서 주민대중들도 농민문제를 이해하고 박수로 지지하거나 시위에 가담했다. 농민운동이 이같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운동으로 확산되는 소몰이투쟁과 시위는 한국의 농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민중적 쾌거였으며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경남 고성에서 7월1일에 시작되어 충북 음성, 경북 의성과 다인, 전남의 무안, 전북의 완주 진안과 임실을 거쳐서 드디어 소몰이 투쟁의 대단원의 서막이 부안에서 1985년 8월 24일에 열려졌다.
1985년 원래는 8월 9일에 예정되었던 부안군 카농과 기농이 연합한 ‘소값피해보상 요구대회’투쟁이 연기되어 마침내 8월24일 아침에 소몰이 시위를 하기 위하여 전북 부안군 하서면 등룡리의 작은 야산에 집결해 있던 농민들을 경찰이 급습하여 방패와 구둣발로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인근 천주교 등룡리공소로 피신한 농민들은 연행자 즉시 석방, 피해보상, 부상자 치료 및 보상, 부안군수 및 경찰서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8월 27일까지 농성했다.
원래 이 시위는 8월 24일이 부안장날이었음으로 부안성당에서 농민대회를 할 것을 본당 서신부와 의논하였으나 거절을 당하면서 등룡리공소에서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유감스러운 일은 원래 등룡리공소는 유서 깊은 천주교 교우촌으로 부안지역 최초의 성당이 1918년에 세워졌던 장소이기도 했지만 여기의 책임 서모신부가 농민들의 투쟁과 시위를 반대하고 이들을 쫒아냈기에 등룡리투쟁이 야외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예상되는 경찰의 원천봉쇄에 대비하여 하서면 노곡리 농민들은 소들을 미리 끌어다가 등룡리 회원집에 맡기고 많은 회원들이 미리와서 등룡리공소 옆 카농부안지역협의회 김동현 회장댁에서 그날 밤을 지냈다. 중학생 15명 정도가 경찰 진압에 대비하여 주변의 돌들을 모아 돌무덤을 만들고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최재은 등의 학출들이 화염병을 만들기도 했고 숨겨놓기도 했다.
이에 맞서서 경찰과 관도 철저하게 8월8일부터 시위의 지도자 박배진의 집이 있는 산내면 모항리를 완전히 봉쇄하고 주민들을 통제하고 소를 강제로 실어가거나 7마리나 돌려보내기도 했다. 21일부터는 등룡리 일대를 예비군들로 포위하고 대형트럭으로 곳곳을 차단하면서 무려 1000여명의 공부원들이 동원되어 행사준비를 방해하기 위해 임원들을 찾아가서 폭언과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 이미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이 행사를 반대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인식한 경찰서장이 카톨릭의 보호가 사라진 상태에서 마음놓고 잔인하게 이 등룡리의 농민시위와 투쟁을 분쇄하고 짓밟아 버리겠다는 사전계획이 철저하게 진행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카농 부안지역협의회 김동현 회장은 “소몰이 시위를 부안성당에서 하려고 한 것을 본당 신부님이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서면 노곡리 사람들이 소를 끌고 산을 넘어오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가슴이 아프다”라고 술회한바 있다.
드디어 오전 9시에 등룡리앞 공소 앞 동산에서 대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11시경에 경찰들이 쳐들어왔다. 농민들은 소들을 앞세우고 중장비로 차단된 공소입구까지 나가 경찰과 대치하였으나 경찰은 돌무덤도 자기들 차지로 하여 농민들에게 무차별로 돌을 던지며 가까이 접근하여 방패와 군화발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농민들의 식사준비로 되어있던 동산에 걸어놓은 솥에 준비되던 국수들도 군청직원들과 소방서원들이 와서 발로 짓밟고 엎어버렸다. 경찰들에 밀려 공소안으로 들어간 농민들은 마당굿을 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농민들은 심하게 얻어맞으면서 연행되고 어린 중학생까지도 닭장차에 연행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분노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평소에 온건하던 도청리의 카농회원 오건이 중장비 페이로다에 올라가 유리를 깨고 역시 같은 회원인 노곡리의 김인술이 경운기에 올라 신나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등 격렬한 사태에 이르렀다.
하서면 노곡리의 김갑섭, 김인술, 조병태, 황선관, 황재근 삼현리: 고점석, 홍일권
변산면 도청리의 박배진, 박형진, 오건, 이백연, 이재천, 조찬준 등이 적극적으로 투쟁한 이들이었다. 전체 투쟁의 지도부 역할은 박배진 고영조 오건 김인술 조병태 김진원 이백연 박형진 등이 감당하였다. 인하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학출로서 서울의 중앙농민운동과 조직에서 간부를 지내다 부안에 귀촌한 김진원도 이 전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날 오후에 경찰들은 공소마당까지 들어와 농민들을 방패와 몽둥이로 구타하고 19명을 더 연행해갔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하고 린치하는 만행은 5.18광주사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야만적이고 잔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당신부는 공소안에서 농성을 하던 농민들에게 수도를 단수시키고 전력공급을 중단하는 처사를 감행하다가 드디어 8월 27일 쫒아내고 공소의 문을 잠그고 말았다. 고영조와 시인 박형진은 나가서 전주에서의 농성장소를 물색해야만 했고 이 와중에 시위의 주동자인 박배진과 김인술이 잡히면 죽는다고 하여 날이 새기 전에 탈출을 권유하여서 이 두사람은 깊은 새벽 두 세시에 삼산 뒷길을 타고 경찰 검문소를 피해 힘겹게 이서의 기독교농촌개발원에 도착하고 그곳에 있던 오건과 합류하여 부안농민들이 농성하고 있던 서울기독교회관의 농성장으로 가서 합류하였다.
처절하게 싸우며 농성하던 부안농민들은 8월 28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시국대책협회회대회’에 대표로 13명이 참석하여 부안경찰의 만행을 폭로하고 기독교회관의 9층 기독학생연맹 및 7층 인권위원회사무실에서 9월4일까지 농성하면서 민주화운동단체와 사회각계에 부안사태의 진상을 알렸다. 이 결과로 야권의 최고지도자 김대중이 인권위원회사무실로 방문하여 긴 시간 대책을 심도 깊게 논의하고 대책을 수립하였으며 뒤이어 김영삼도, 부안김제지역의 국회의원 최낙도도 방문하였고 9월 25일에는 민통련을 비롯한 농민, 노동, 빈민, 청년, 학생, 종교단체 등 23개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소값피해보상 및 농축산물 수입반대 농민투쟁 진상보고대회’를 열고 외국 농축산물 수입중단과 소값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결과적으로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는 1894년의 동학이래의 부안농민의 전국적으로 거둔 귀한 투쟁과 승리였다.
이러한 치열한 농민운동의 결과로 자주적 농민단체인 전국농민협회가 1987년 2월 26일 전남 광주 장안회관에서 군단위 농민 조직 대표와 각 지역에서 농민 조직을 준비하는 활동가들과 대표들이 모여 창립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초대 회장에는 전남 강진의 장영근이, 그리고 부회장에는 전북농민회 및 부안 소몰이투쟁의 박배진이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