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먼저 되어라”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 남겨
‘백로의 춤사위’로 신명나게 울고, 하늘로 돌아가다

“영원히 굿으로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라”, “연습 많이 하고 많이 쳐봐야 한다. 100번 연습한 사람보다 101번 연습한 사람이 뭣인가가 더 낫단다”, “인간이 먼저 되어라. 아무리 예술을 날고 뛰고 잘해도 인간이 못되면 예술이 빛이 안 난다” 나금추 명인이 제자들에게 남긴 가르침이다.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이자 부안농악의 큰 어른인 나금추(본명 나모녀) 명인이 11일 새벽 3시 별세했다. 향년 81세다.
‘천하 상쇠’로 일컬어지는 나금추 명인은 여성농악단의 초대 상쇠로서 호남우도농악의 명인들인 김재옥, 정오동, 김병섭, 이정범 등의 가락과 몸짓을 이어받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 부안농악 예능보유자다.

나금추 명인의 부포놀이는 ‘너름새와 쇠가락이 일품이며 장단과 춤과 소리가 하얀 부포의 움직임에 넘칠 듯이 묻어나며 여유로우면서도 경쾌하며 한의 정서와 신명이 멋들어지게 들어있다’는 평을 받아왔다.
나금추 명인은 고령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물집 유사 천포창’이라는 희소병을 앓았다.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지난 11 새벽 3시 심장마비로 운명했다. 빈소는 호남장례식장에 마련돼 유가족과 제자들이 그 곁을 지켰고, 평소 명인의 예술을 흠모하는 추모객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선생님은 호남우도농악의 상쇠로서 부포놀이의 대가입니다. 꾕가리 가락이 흐드러지고 잔가락이 발달되어 있는 명인이었죠. 가락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르치실 때는 예술인 이전에 사람이 되라. 인간 도리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예술이다고 사람됨을 강조하셨습니다. 문하생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 칭찬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앞에 서면 실수하고 오그라들기 마련인데, 선생님은 늘 잘 한다, 뭐든 이룰 수 있다 격려해주시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나금추 호남우도농악 이수자인 이철호 씨(51)의 증언이다.

나금추 명인은 1938년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에서 8남8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57년 임춘앵 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고 국악에 눈을 떠 광주국악원에서 판소리와 승무를 배우며 전통예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춘앵 국극단을 따라 남원으로 넘어가 남원국악원의 남원농악단 징수로 활동하며 농악에 입문했다.
1959년 최초의 여성농악단인 춘향여성농악단에서 3년간 상쇠로 활동하면서 전국순회공연을 다녔고 이때부터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 전주아리랑여성농악단의 상쇠로 합류했고, 그해 장금동 씨와 결혼해 슬하에 2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 시기 가정을 돌보면서도 전주아리랑여성농악단의 전신인 한미여성농악단과 정읍여성농악단 상쇠로 활동하면서 전국에 전북 여성농악단의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나금추 명인의 예술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1976년 전북농악경연대회 개인연기상 수상한 이후 1983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일반부 장원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강릉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이리농악단 상쇠로 출전해 개인연기상은 물론 80여 명의 단원과 함께 단체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어 1987년에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7호 부안농악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1988년부터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30여 년간 꾸준히 후학 양성에 힘써왔다. 2014년 은퇴 후 부안에 정착해서도 제자를 가르치는 데 애쓰면서 2016년부터는 부안군립농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한편, 발인 날인 지난 13일 10시 나금추 명인이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아온 행안면 진동리의 자택에서 노제가 열렸다. 부안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제자들이 함께 스승을 위한 마지막 굿판을 펼쳤다. 유가족과 친지, 제자, 이웃 주민, 지인 등 100여 명이 모여 제를 올리고, 명인이 가장 좋아했다는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 한 대목을 시작으로 살풀이, 설장고, 부포놀이 등 개인놀이에 이어 마지막은 부안 우도농악 굿판으로 끝맺었다.
나금추 명인의 제자 이철호 씨는 “선생님께서 갑자기 운명하셔서 애통하고, 배울 것이 많은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부족하나마 더 갈고 닦아서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다”면서 “부안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 길에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굿판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지는 정읍 화신공원묘지에 마련됐고 나금추 명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0년 붙잡아 온 쇠가락을 가슴에 품고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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