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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35-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한국민주화운동과 70, 80년대 부안민중의 꿈틀거림과 그 명암
부안 해창출신의 민중시인 박영근

우리는 지난 회에 한국의 해방 이후 이승만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친 무려 40년간의 반민주주의 독재의 역사에 맞서서 장엄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위대한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권을 위한 긴 싸움과 마침내 승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는 부안민중사의 시각에서 이 중요한 시기에 부안출신의 아들과 주인공들은 어떤 삶으로 이 중요한 시대의 상황에서 조응하면서 살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안민중들의 행태는 이 시기에도 몇 번의 선거국면을 통해서만 살펴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그 민중의 일부인 부안의 아들들과 주인공들이 그것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한 일이건 아니면 부끄러운 일이건 간에 역사라는 엄정한 거울과 성찰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가치와 의미가 있는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시 암울했던 과거의 시대적 상황으로 돌아가 살펴보기로 한다. 1974년은 참으로 절정에 달하며 기승을 떨던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항쟁이 크게 분출하던 해였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실시된 상황에서 민청학년사건이 터졌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열기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파고가 높아졌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극적이긴 하였는데, 1975년 4월에 캄보디아와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반유신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에게는 이 사건들이 그야말로 그에게는 단비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학내에는 어용적인 학도호국단이 부활되고 각종 안보궐기대회와 기독교안의 극우 보수적 어용종교인들은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 나 ‘조찬기도회’들을 만들어 분위기를 잡아 아부를 하고 박정희는 마침내 5월 13일에 반유신운동을 철저하게 금압시키고자 무소불위의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이로써 칠흑같은 민주주의의 암흑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꿈틀거림이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전국적으로도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당시 고등학생이 민주화운동과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바로 전주농림고교 3학년 학생 고영조였다. 1976년 당시 전북대 기독학생회를 중심으로 전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펼친 허종현, 최인규, 박종훈 등과 만나 어린 학생이지만 사회적 인식을 높였던 고등학교 기독학생회 간부였던 고영조였다. 고영조는 3월 6일 민주인사로 유명한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와 고교 선배인 김금룡목사로부터 명동 3.1구국선언문을 전달받고 이것을 임실 오류교회에서 밤새 등사기로 5,000장을 찍어냈으며 이 선언문을 전주, 익산, 군산 등의 교회와 성당에 배포하였다. 그는 6일에서 19일까지 학교수업을 마치고,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익산, 군산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3,000여장을 배포했으나, 결국 수상하게 생각한 주민의 신고로 체포됐다. 그리하여 고영조는 고교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여일의 구금을 거쳐서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 이 후에 한때는 성직자가 되어 민주 민중운동에 헌신하려는 꿈으로 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후에 70년대 후반에 고향 부안에 내려와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부안의 방패장대투쟁 때에도 대변인역할을 수행한 후에 이어서 부안군의원이 되기도 했다.
 
최유찬(1951~)은 부안출신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0년대 초에 그가 재직하고 있었던 동아방송의 기자에서 전두환의 언론강제통폐합 조치로 쫒겨나 해직이 되었다. 수많은 이땅의 의로운 기자들과 언론인들을 일거에 거리로 내몬 전두환의 폭거였다. 그러나 그는 해직의 아픔을 겪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적인 노력과 열정을 기울여서 전주대 교수로 부임하여 민중시인이던 오봉옥을 제자로 키우기도 했다. 그는 그후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옮겨갔으며 특히 현대한국문학의 민중적이며 예술적 높은 성취로 인정받는 박경리 문학을 심도 깊게 연구하여 이 분야의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작가 박경리도 그의 생전에 이미 최유찬 교수의 자신의 문학에 대한 평론의 심오성을 인정하여 매우 최교수를 가까이 대하고 신뢰하였다. 최교수는 박경리 작가가 사망할 때에도 그의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고 또한 '청소년을 위한 토지'를 완간하고 '한국토지학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전두환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반민주적 언론강제통폐합에 의한 해직기자의 좌절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학문적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룬 최교수의 삶이 개인적 성공을 넘어선 의미있는 승리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70,80년대 민주화투쟁에 있어서의 김근태가 의장으로 이끈 민주화청년연합의 노고와 그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였던 1985년에 자행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의 김근태와 간부들에 대한 끔찍한 살인적인 고문들은 박종철열사의 고문에 의한 죽음과 함께 일반에게도 잘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인적인 고문을 통하여 민청년 간부로 출중한 활동을 하였던 부안의 아들 이을호가 참으로 애석하게도 정상적이지 못할정도로 크게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망가져야만 했던 비극은 대중일반에게는 그리 잘 알려져 있는 안타까운 비극이다.
 
1983년 9월30일 저녁 7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소재 카톨릭 상지회관으로 긴장된 모습의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민주화운동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여기에서 탄생했다. 이 새로운 청년단체의 대표로 김근태가 결정됐다. 그리고 김근태보다도 한세대 젊은 나이에 민청련의 기획실장과 정책위원장의 핵심적 중책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부안이 낳은 전국적인 수재였던 이을호였다. 부안 하서출신의 이을호는 호남의 수재들이 배출되는 전주고교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던 천재로 명성을 떨치고 1974년에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학생운동의 핵심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다가 민청련의 핵심간부가 된 것이었다. 그는 사실상 전주이씨 왕손가이면서도 일찌기 호남의 명문 전주고가 생긴 이래의 유래가 없는 천재로 일컫어졌으며 그가 서울대에 진학해서도 이을호는 당시 80년대의 전투적 학생운동의 중추들이던 작가 김영현과 훗날 박노해와 함께 민중노동문학을 전개한 시인 김사인과 이론과 실천사를 통하여 혁명적 출판운동을 감당한 강금실의 전 남편이었던 80년대 좌파출판운동을 이끌던 이태경들을 리드한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이기도 했다.
 
민청련은 외형적으로는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였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두꺼비는 알을 품으면 뱀을 찾아 나선다고 했다. 뱀을 만난 두꺼비는 자신을 잡아먹으려면 잡아먹어보라고 뱀의 성질을 돋운다.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독 때문에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뱀은 화가 나도 참으며 두꺼비를 무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참다 못한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만다. 뱀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되고 두꺼비 몸 속에 있던 알들은 뱀을 양분으로 삼아 부화해 뱀의 몸을 뚫고 나온다. 두꺼비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새끼들을 키우는 것이다. 민청련은 자신이 언젠가는 전두환 정권에게 뱀처럼 잡아먹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죽음을 양분으로 삼아 이 땅의 민중들이 압제와 착취의 사슬을 깨고 분연히 일어설 것을 기대하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실로 처절한 각오였다.
 
민청련이 출범하면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파고다빌딩에 자리잡은 민청련 사무실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84년 5월에는 그동안 남몰래 찾아가곤 했던 광주 망월동 5·18묘소를 공개적으로 참배해 광주 문제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천명했으며, 84년 3월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기관지 ‘민주화의 길’은 활동가들에게는 운동의 이론과 지침을 전달해 주었고 대중에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각종 소식과 전두환 정권의 잔혹한 탄압상을 알려주었다. 노동현장에서 악덕 자본가와 독재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수탈당하는 노동자들은 민청련의 연대·지원 속에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상호간 굳건한 연대가 형성됐다. 5·17 이후 침묵하고 있던 재야 원로들도 다시 민주화운동에 속속 복귀했다. 마침내 민청련은 이를 기반으로 각 부문 운동을 아우르는 광범한 민주화운동 전선체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추동해냈다.
 
민청련은 김영삼 중심의 상도동과 김대중 중심의 정치계파인 동교동에 버금가는 민주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권의 탄압도 점점 심해졌다. 출범 때부터 민청련 간부들을 불법 연행하는 것으로 맞섰던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 현판을 떼어내고 사무실을 수시로 봉쇄하는 한편 출입자들을 불법으로 검문하고 연행했다. 계속되는 민청련의 공세에 정권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집행부 간부들은 경찰에 수시로 구타당하고 경찰서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야만 했다. 83년 11월에는 김근태와의 개별 면담을 제의한 안기부 수사국장이 회담 도중 김근태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광주사태라는 원죄를 갖고 태어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민청련의 활동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85년 9월 김근태·이을호 등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했고 이어 살인적인 고문을 가했다.
민청년에 있어서 1세대 간부인 김근태나 장영달, 최민화에 비해 세대가 훨씬 젊지만 그러나  민청년의 제2세대의 이론적 실천적 주축부대는 1974년에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부안 출신의 이을호가 감당을 했다. 당시 민청년에 있어서 이을호는 매우 조직상에서 중요한 정책위워장과 기획실장을 맡았고 이 직책은 사실상 민청년의 두뇌역할이었고 또한 기획총책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정권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을호에게 대한 살인적인 고문은 이을호의 정신과 존재를 무참하게 파괴하여 그는 이 고문 이래 그는 심각한 정신병질환에 시달리면서 오늘까지 길고 긴 생애적인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이을호의 부인 최정순 또한 마산출신으로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수차 투옥되는등 민주여성운동권의 핵심이기도 했다. 오늘날 이을호는 긴 투병 끝에 상당히 건강을 회복하여 금년이월까지 모처럼 고향에 귀향할 뜻을 지니고 7년간을 하서 고향에 살면서 두레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심오한 그의 사상적 저력으로 닥아오는 민족통일시대에 대비하여 종교사상적 큰 그림과 컨텐츠를 장기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중에 있다.
마침내 두꺼비를 잡아먹은 뱀은 이제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제 정신을 잃은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와 이을호들이 고문을 당한 바로 그 곳,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이라는 꽃다운 젊은이를 고문으로 살해했다. 그러자 마침내 껍질을 깨고 뛰쳐나온 거대한 민중의 물결이 거리를 누볐다. 6월 항쟁이었다. 두꺼비를 잡아먹은 뱀의 몸 속에서 마침내 수많은 두꺼비의 알들이 깨어 나와 죽음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민주항쟁이 승리를 전취한 것이었다.
 
시인 박영근(1958~2006)은 일찌기 해방후 문학에 있어서 민중문학 특히 노동자문학의 시작을 보여준 시인이었다. 적어도 본격적으로 노동자 시인의 전형을 보인 박노해-"노동해방"라는 필명으로 전투적이며 혁명적인 출현으로 한국문학의 격렬한 민중시대를 열었던 박기평이 나오기 전에는 말이다. 이 시기에는 부안군 해창 출신의 박영근이 초기 노동자문학을 선도하였다.

박영근은 해창에서 상업을 하던 집안에서 삼남매의 끝으로 태어나 해창의 마포초등학교와 이리의 남성중학을 거쳐서 전라북도의 명문고교인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박영근은 고교에 입학하면서 매우 조숙한 독서와 문학청년의 열정과 의식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부추기고 자극을 준 것은 서울교대에 재학 중이던 박영근의 친형과 친구이던 서라벌 예대에 다니던 형의 영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박영근은 고일 시절에 <창작과 비평>이나 <사상계>를 탐독하고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그것에 맞서서 싸운 1974년의 민청학련사건등에도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급우나 홈룸을 통해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여 학교의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교장에게서도 비상한 요주의 학생으로 설득을 당하는 등의 체험 속에서 고교 1년 겨울방학 전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2학년에 올라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에 타오르는 문학적 열정으로 고교문학서클에 가담하여 전주풍년문화원에서 시화전을 열면서 소비에트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시를 보여서 변산의 해창 마포의 그의 집이 가택수색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는 경찰서에서 20일 만에 풀려나는 등 어린 나이에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이후에 서울로 올라가 형님 댁에서 기거하면서 민청학련 관련자도 만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있던 홍영표 등을 만나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나 <우상과 이성>을 읽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1981년 신군부치하의 엄혹한 시절에 군대를 마친 그는 서울 신촌에서 잠시 쌀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민중문화운동, 민중신학, 학생운동, 기독교민주화운동 등에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교류하다가 동인지 <말과 힘>에 참여하고 이 해에 <반시>6집을 통하여 등단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홍익대를 나와 민중화가로 살아가던 성효숙을 만나 이 후에 평생의 동지와 반려로 살게 되었다. 1982년 그는 구로3공단 삼립빵 공장 부근에 살면서 제본회사, 곤로회사 등에 취업하였으며 훗날 노동자시인이 된 조영관 등의 학생운동 노동운동계의 벗들과 지속적인 만남과 교류 속에서 광명시 철산리의 노옹자들과 혹은 동대문 부근에서 소모임을 가지면서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5년에 그는 성효숙과 함께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으로 이사하고 1995년에는 부평 4동으로 이전하면서도 부평에서만 그의 마지막 삶까지 무려 20년을 살았다. 그러나 박영근은 그의 나이 마흔이 되면서부터 울기 시작한 시인이 되었다. 시인 박영근의 울음과 한도 끝도 없는 알콜에의 탐닉이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그는 병고로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만다. 그는 고향의 초상집에 찾아와서도 길고 긴 방조제를 보면서 그리고 무참히 해체되어가는 전통적인 따뜻한 삶의 공동체와 관계를 목도하면서 울었다. 박영근 시인은 가수 안치환이 불러 민중가요로 매우 유명하고 많이 불리워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였다. 한 시절 이 노래가 안치환 작시작곡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박영근 시인의 사후에 그의 부인인 성효숙 화가와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이것이 제대로 시정되었다.
 
부안출신의 출향 인사들이 이렇게 한국의 거대한 민주화 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꿈틀거리고 있을 때에, 비록 큰 반향은 아니었을지라도 부안에서도 주산우체국장으로 봉직하던 주산교회의 김명수 장로가 일찍이 흥사단운동과 농민운동에 관여하여 오다가 그의 민주화의 열정과 양심으로 인하여 70년대 박정희의 민주탄압 상황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그가 훗날에 부안군의회의 초대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안 출신의 인물들이 장엄했던 한국민주화운동에 나름대로 귀한 삶과 희생으로 참여와 역할을 한 것에 비하여 자랑스럽지 못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도 있었다.
역사의 엄정한 반성과 거울을 위하여 이러한 역사도 민중사는 그들의 행태도 조명하고자 한다.

오랫동안 고대총장으로 이름을 떨친 남재 김상협(1920~1995)은 본관이 고부이며 부안 줄포출신으로서 인촌 김성수가 바로 그의 백부였다. 막강한 집안의 재력 속에서 김상협은 일찌기 동경제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젊은 약관의 나이에 고대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고 두번에 결쳐 고대총장을 지내고 9개월간의 문교부장관도 역임한 바 있었다. 그는 총장 시절에는 그의 '지성과 야성'의 지론으로 독재에도 비협조적이어서 학생들에게 신망이 있었던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냉전상황에서 일찍이 그의 저서 <모택동사상>을 출간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만주에 있던 그의 집안의 큰 농장경영에 참여하였을 때에, 모택동이 이끌던 중국공산당의 홍군들의 엄정한 기강과 도덕성을 주목한 나머지, 그 뿌리와 원천이 되는 모택동사상에 주목하다가 저술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정치학교수와 총장으로 신망을 얻고 명성을 떨치던 그가 1980년 3월부터 전두환의 자문기관과 국보위 입법의원에 참여하면서, 결정적으로는 전두환의 국무총리직(1982.6-1983.10)을 아웅산폭발사태까지 수행하면서 그의 삶의 마지막에 역사적으로는 결국 오명과 불명예를 안고서 역사 속에 스러지게 되었다.
필자는 80년대 초반 독일유학 직전에 직접 찾아뵈었던 지운 김철수 선생으로 부터 전두환의 큰 마름역할을 수행한 총리 김상협에 대한 매서운 인간적 질책과 비난을 퍼부으시던 노혁명가의 노기띤 얼굴과 음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금수저의 삶이었으나 전두환의 총리로 굴절된 불명예로 마감한 김상협

또한 사람의 부안출신의 인물이 전두환의 참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안출신으로 전주사범을 거쳐 육사를 졸업한 고명승(1935~)은 호남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특수특권인맥 조직이었던 '하나회'에 전두환계로 가담하여 잘나가는 군생활을 영위하고 특별히 전두환의 12.12구데타에 가담 일조하고 집권 이후에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사령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육군대장으로서 화려한(?) 군생활을 접으면서 고향에서 정치인의 꿈을 지니고 1992년과 1996년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지만 끝내 호남민중의 일부인 부안민심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낙선하고야 말았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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