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재 근 전 부안독립신문 기자

어느 세대나 자기 생애에 최소 한 번은 커다란 역사적 변화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성난 강의 급류처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건은 그 세대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세대별로 ‘내가 한창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들어보면 그가 올라탔던 역사적 급류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겐 망국과 해방이었고, 누군가에겐 전쟁이었으며, 누군가에겐 민주화와 혁명일 것이다. 지금 또 한 번 역사가 요동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난 몇 달 우리는 평화가 얼마나 쉬운 것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시간으로 체험했다. ‘이렇게 빠를 수가’ 생각하던 중에 거짓말 같이 얼어붙었고, ‘이제는 안되겠다’ 하는 순간 드라마틱하게 풀리는 과정을 지켜봤다. 예년 같으면 수년씩 걸렸을 대화와 갈등의 사이클이 불과 몇 달, 며칠만에 몇 바퀴를 도는 것을 보며 이번엔 전과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방정식은 변수가 많을수록 어려워지고, 협상은 이해당사자가 많을수록 어려워진다. 한반도 평화를 둘러싼 관련국들의 입장과 그 나라들의 국내정치 이해관계까지 모두 협상테이블에 올린다면 이걸 푸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핵심문제만 보면 또 그리 복잡하지 않다. 결국 시작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미국의 북한체제보장 약속과 맞바꾸는 일이다. 여기에는 서로 믿지 못하는 두 나라를 중재하고 합의를 보증할 제3자가 필요하다. 이 첫 번째 거래가 만족스럽게 끝나면 당사자 두 나라간 신뢰가 생기고 그로부터 좀 더 큰 거래가 시작될 것이다.
지난 몇 달, 남북, 남북미간에 바쁘게 오갔던 대화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 본질만을 보고 대화할 때는 쉽게 풀리는 듯 했고, 여기에 다른 나라들이 끼어들거나, 각국 국내정치의 이해관계가 더해지면 급격히 경색되는 양상을 보였다. 다행히도 남북미 3국의 수장들은 공통적으로 본질에 집중하여 속도를 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지난 65년간 이처럼 3국 지도자의 의지가 일치했던 적은 없다. 동기는 각자 다를 것이다. 역사적 사명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함, 또는 국내 정치에 이용하겠다는 이기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공명심이 뒤섞여 우연인 듯 필연 같은 오늘의 국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들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그 동기를 평가하는 일은 후세 역사학자들이 해도 늦지 않다.
아직 이르지만 다가오는 북미정상회담의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내일은 평화협정, 모레는 통일이라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 비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만 65년의 정전체제를 마감하고,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협력을 만들어가는 가는,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이다. 휴전선이 국경으로 변하고, 비무장지대는 생태보호구역이 될 수 있다. 이미 개성공단에서 보여줬듯 버스와 기차로 국경을 넘어 출퇴근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육로로 국경을 몇 개고 넘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학자들은 남북을 오가며 민속, 언어, 역사, 생태 연구의 빈틈을 메울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북한의 위협을 핑계로 한 거짓구호에 넘어가지 않을 테고, 사상과 이념의 장벽 너머로 모든 가능성을 마음껏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이 평화의 시대에서 나고 자라난 아이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한다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분명 지금보다 더 큰 사회적 갈등과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상의 힘은 굉장하다. 긍정적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을수록 그 상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도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남북이 한나라가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새로운 세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겨둬도 충분하다. 지금은 다만 오랜 가뭄 속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65년의 가뭄 중에 가장 큰 비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곧 열릴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비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한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